2014-03-20.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해 자신의 무덤에 안치한다.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된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5:42-16:8
한글본문.
42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16: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영어본문.
42 It was Preparation Day (that is, the day be-fore the Sabbath). So as evening approached, 43 Joseph of Arimathea, a prominent member of the Council, who was himself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went boldly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 44 Pilate was surprised to hear that he was already dead. Summoning the centurion, he asked him if Jesus had already died. 45 When he learned from the centurion that it was so, he gave the body to Joseph. 46 So Joseph bought some linen cloth, took down the body, wrapped it in the linen, and placed it in a tomb cut out of rock. Then he rolled a stone against the entrance of the tomb. 47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oses saw where he was laid. 16:1 When the Sabbath was over,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bought spices so that they might go to anoint Jesus’ body. 2 Very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just after sunrise, they were on their way to the tomb 3 and they asked each other, “Who will roll the stone away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 4 But when they looked up, they saw that the stone, which was very large, had been rolled away. 5 As they entered the tomb, they saw a young man dressed in a white robe sitting on the right side, and they were alarmed. 6 “Don’t be alarmed,” he said. “You are looking for Jesus the Nazarene, who was crucified. He has risen! He is not here. See the place where they laid him. 7 But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He is going ahead of you in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just as he told you.’ ” 8 Trembling and bewildered, the women went out and fled from the tomb.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afraid.

도움말.
안식 후 첫날(2절). 마가는 정확한 날짜를 기록해 이 날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사흘째 되는 날임을 분명히 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어디에 계셨는가(16: 6-7)?
⬇ 아래로 인간. 여인들은 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는가(16:1)?
? 물어봐. 여인들과 제자들이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7b)?
! 느껴봐. 부활의 주님이 지금도 내 삶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나는 오늘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된 소식과 의미를 전할 것인가?

Meditation. 부활의 날, 그 전과 후
부활의 날을 기점으로 두 날의 스토리가 연결되고 있다. 안식일 전날과 안식 후 첫날의 에피소드다. 불과 사흘 간격을 둔 이 두 날은 사실 너무도 다른 날이었다. 안식일 전날은 예수님의 무덤이 배경이 되어야 했지만, 안식 후 첫날은 무덤이 아닌 갈릴리를 배경으로 삼아 전개되어야 했다(7절). 그 여인들은 갈릴리로 가야 했고 그 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부활의 날 이후에도 여전히 무덤을 찾아 갔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 앞에 서 있던 주의 천사는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7절)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일깨운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잊고 있었다. 말씀의 기억이 없이 걷는 걸음은 결국 무덤 앞에 이른다. 그 길에서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은 경험할 수 없다.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당신은 말씀을 기억하려 애쓰는가? 말씀 묵상 없이 시작하고 말씀의 기억 없이 행하는 일들은 없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에서

Compartmentalization…
참말로 단어도 길다. ㅋ
최근 새로 나온 심리학 용어인데, 우리 뇌속에서 자연스레 구획(compartment)을 나눠서 각각 기억을 따로 저장한단 얘기다.
말하자면 이방에서의 일이 저쪽방에 가서 기억이 안난다고 건망증이니 뭐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다시 이방으로 돌아오면 그 기억이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저쪽방에 뭘 가지러 갔다가 뭘 가지러 왔는지 기억이 안나서 그냥 돌아오면 다시 기억이 나곤 했던 현상을 말하는 것.
읽는 순간부터 이 이론은 참 많은 선교사들에게 위로가 되겠단 생각아 들었다. 한국에 있음 파푸아에서 필요한게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나고, 센타니에 있으면 왕그말로에 가져가야 할 물건이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 이런 비슷한 경험을 이 곳의 선교사님들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푸아에 돌아온 지난 몇달간… 아무리 정상적이라 하지만… 그래도 다른 compartment에 분류되어 뇌세포속 깊은 곳 어딘가에 묻혔던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되살아 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특히 최근 돌아온 몇조각의 기억들은 안식년 전부터도 잊고 싶었던 것들도 있었고, 또 실제로 잊었었던 것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고구마 캐듯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기억들이 종종 내 마음을 괴롭게 했던 지난 두주간… 남편이 웍샵으로 바쁜 탓에 혼자 집에서 조용히 이일 저일을 하다보니 머릿속엔 그 많은 생각들로 가득해 지고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적도 있었다.
오늘 오후… 이런 얘기들을 다 들어주고, 그럴때 뭘하면 잊어지고 도움이 되냐고 물어주는… 게다가 담주에 함께하자 말해주는… 큰언니 같으면서 스스로 친구라 불러주시는 분이 계셔서 참 감사한 오늘 하루였다.
오늘 저녁 그분과 함께 내 곁에 앉아서 함께 내 이야기를 듣고 계셨던 그 분이 나를 찬양의 시간으로 인도하셨다. 감정에 대한, 잊고싶은 일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처방이었다.
최근에 카스에 가사를 올렸다가 글쓴이 이름을 적지 않아 내가 저런 훌륭한 글을 썼는 줄 오해 받았던 그 두곡의 찬양도 오늘 저녁 처방 약에 포함 되어 있었다. 이 약들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듯…^^ 찬양할 수 있음에 감사!^^
최2

최1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나요? 4]

어떤 분들은 제게 “기도를 꼭 해야 하는 것 맞죠?”라고 질문합니다. 이 말은 사실 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 안 하고 살아도 잘들 삽니다.

그냥 옛사람에 휘둘리면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화나고 억울한 삶을 누리고 살다가 죽을 때 “왜 이리 살았을까!” 후회하면서 죽으면 됩니다. 기도는 유익이 많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세상적인 가치로 보아도 좋은 점들이 많습니다.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분명 유익합니다. 복 받기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 경험상 꾸준히 기도하면 꼭 기독교적인 영적 차원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봐도 정말 많은 복을 받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기도하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저는 원래 소심해서 항상 생각이 많고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단순해지고 웬만한 일엔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2. 기도하면 인상도 좋아집니다. 제가 봐도 제 인상이 참 많이 밝아졌습니다. 뭐 특별하게 좋은 일들이 많아진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편해지니 인상도 푸근해집니다. 여자들은 얼굴이 분명히 예뻐지고 동안이 됩니다. 마음이 편해져 식탐도 줄어 다이어트도 효과적으로 잘해냅니다.

3. 기도하면 인간관계도 원만해집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충만해지니 욕심을 덜 피우고 남에게 이해 타산적으로 굴지 않고 잘 베풀게 되고 이해심이 많아집니다.

4. 기도하면 감정소모가 줄고 삶의 활력이 넘칩니다. 주어진 일을 의욕적으로 하게 되고 항상 감사하게 되죠. 저를 잘 아는 한 정신과 의사 페친이 저를 겪어보고 감정소모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람들 대부분은 안 그렇다고 하네요. 제가 봐도 예전보다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시간이 정말 줄었습니다. 중년의 나이 때문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정신과 선생님께서 아니라도 하더군요. 확실하게 기도 때문입니다.

5. 기도하면 외로움과 우울함을 덜 탑니다. 주변에 보면 젊은 싱글들의 경우 내면의 자신감은 넘치고 열등감이 줄어 이성에게 인기가 높아집니다. 귀찮을 정도죠.

6. 기도하면 돈을 많이 저축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돈을 쓸 시간도 줄어들지만 확실하게 불필요한 쇼핑욕구가 줄어듭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외로워서 과잉쇼핑을 한다고 합니다. 일종의 중독이죠.

7. 기도하면 직관력이 좋아집니다. 기도하면 직관력이 좋아져서 자기 원래 능력보다 말도 잘하고 글도 훨씬 잘 쓰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예수쟁이들은 말을 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보통 기도많이 하시는 목회자들 보면 신학은 빈곤할 수 있어도 설교는 호소력 있게 잘합니다. 느낌있는 설교를 하고 싶으면 기도가 기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글을 재미있게 잘 쓴다고 합니다. 예수님 태운 나귀가 칭찬받는 격입니다. 원래 글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예전보다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떠오르고 확실하게 쉽게 잘 표현하고 것은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글이 전보다 맑고 순수해져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제 담벼락 글들이 교회에서 말할 주제들과 내용을 제공한다고 좋아하시는 분들의 반응에 정말 흐뭇합니다. 제 글은 주로 기도의 열매들입니다. 기도하면 또한 예술적 감수성도 풍성해집니다. 저는 미적 감각이 둔했었는데 기도하고 나서 음악과 미술의 예술에 대해 조금 눈을 떳습니다. 기도는 예술이에요. 통하나 봅니다. 예술, 문학 하시는 분들 기도 많이 해 보세요.

기타 등등입니다. 더 생각나시는 것들은 나중에

꾸준하게 기도하면 맘 편해지고, 인상 좋아지고, 예뻐지고, 동안되고, 다이어트 효과있고, 외로움 우울감 줄어들고, 인기 좋아지고, 인관관계 좋아지고, 돈 절약되고, 직관력 좋아지고, 창의력 높아지고, 말 잘하고 글 잘쓰게 되고, 예술성 높아지고, 면역성 높아져 감기도 덜 걸리고, 건강해 지고, 장수하고 좋아요.

그러나 믿는 자에게 기도의 최고유익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얻는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동행함!

계속하여…

[기도는 즐거운 훈련으로 지속될 수 있습니다. 3]

<아래의 글은 Lee, Min Kyu 교수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도 예배 마치고 기도실에 들어가 잠깐의 기도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세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평화와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세 시간씩이나? 그 시간이 짧다고? 자기 경험에 따라 긴 시간일 수도 제가 상대적으로 의지가 대단하거나 침을성이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는 정말 짧은 시간이었고 저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은 결단코 아닙니다. 힘들지 않았냐고요? 언제부터 이렇게 기도하느냐고요?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삶의 허무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점차 그 환희를 누리기 위해 하다 보니 기도란 제게 가장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저희 형님은 골프 마니아입니다. 마니아(maniac)란 영어표현은 “광적인 열중이”란 뜻이지요. 한마디로 미친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 필드에 나가고 온통 골프 생각입니다. 한국에 잠시 방문해 TV를 봐도 골프채널만 봅니다. 그 바쁜 중에도 시간을 억지로라도 내서 남들이 다 자는 그 이른 새벽부터 종일 필드를 돌아다니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형에게 골프는 고된 일일까요? 아닙니다. 골프를 잘 칠까요? 네, 당연히 준프로급입니다. 과정을 즐기니 결과도 좋은 것이죠.

저도 이 느낌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등산과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몇 년 전에는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공릉 능선을 거치는 설악산 종주를 했습니다. 새벽 두 시에 한계령에 도착하기 위해 저녁 8시에 집에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앉은 채로 잠을 자야 하니까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벽 두 시에 출발, 대청봉에서 잠깐 “야호”를 한두 번 부른 후 하산하기 시작합니다. 다음날 오후 5시나 돼서야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힘들었을까요? 14시간 이상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험산준령을 다녀와 보세요. 잠 못 자서 피곤하고 나중엔 무릎관절에 열이 나서 찬물로 식혀가면서 걸었습니다. 힘드니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힘든 것 역시 저에겐 즐거움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력이 약하고 꾸준한 산행훈련이 되지 않은 초보자에겐 이러한 일은 피곤울 넘어 살인적인 고통일 것입니다. 다녀오면 천만 원을 준다 해도 도저히 못 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들 추워서 밖에 나가기를 꺼리는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북한산 인수봉을 가볍게 산책 삼아 다녀오는 저 같은 사람은 돈을 내고 다녀오는데 말입니다. 올라가면 배낭 안의 물이 꽁꽁 얼어 마시지도 못합니다. 칼바람 부는 산꼭대기의 체감온도는 영하 25도 정도 됩니다. 이 고행 같은 미친 산행을 왜 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미쳐야 합니다. 이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산 정상만 바라보는 사람에겐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도에서 오는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산행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기쁨과 같은 것일까요? 다릅니다. 사실 이것은 감정적인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기도의 기쁨은 관점의 변화에서 오는 평화로움과 환희입니다. 그냥 심리적인 긍정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안이 열러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의 체험이죠.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의 가슴은 내가 주인 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분을 만날 때 누구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화와 기쁨, 안전의 포구인 주님을 만나 그저 불안 초조하고 걱정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이것은 노력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입니다. 그리고 불만 가득했던 내 현실도 온전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니 감사가 넘칩니다.

십여 년 전 아직 한창이실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가 기억납니다. 저는 당시 하나님을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저는 십 대 때부터 오랜 외국생활을 하였기에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귀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어머니를 데려가신 것이었습니다. 제 설교를 처음 라이브로 들으시고 으쓱으쓱 자랑스러워 하시던 모습, 학교에 교수로 청빙 되어 기뻐하시던 모습도 잠시 저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더한 일도 많습니다.

저는 불행한 관점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불행과 행복은 관점 차이입니다. 좋은 환경도 옛사람의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불행이고 힘든 환경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행복입니다. 지금 저는 일찍 돌아가셨어도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직 젊은 나이에 백내장 수술을 하여도 지금까지 잘 보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원칙적으로 힘들어도 불행할 필요는 없고요, 그 무엇도 우리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빼앗긴다면 그것은 사탄 마귀 때문인 미혹된 마음 때문입니다. 그냥 숨을 쉬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고 죽는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본질에서 환경의 변화보다는 모두 관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제 인생에 가장 큰 관심은 기도입니다. 요즘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사역하시려고 제게 주신 소명이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러나 제가 기도에 관해 읽은 책은 열 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기억나는 책도 사실은 없습니다. 누가 좋은 책이라고 읽으라고 가져도 줘도 몇장 읽다 맙니다. 그런데 제 가장 큰 관심은 기도입니다. 저는 기도가 책을 읽어서 이해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학자입니다. 물론 적당한 이론이 필요하지만 저는 기도의 영성이 “기도학”과 같은 신학적 탐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안을 여는 길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말씀”은 그냥 우리의 육안이 아닌 영안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라보면 관점이 달라집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관점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입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든 노동도 아닙니다. 가장 쉬운 길입니다. 때론 힘들지 않냐고요? 저는 아직 아니지만 기도의 고수들은 이런 질문에 힘든데 쉬는 것이 힘드냐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육을 가진 우리가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때대로 힘들지 않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의 의미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에겐 기도는 힘든 것 그 이상입니다.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훈련이 되고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나 기도의 놀라운 보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도에 관해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성경에 관심이 덜하거나 왜곡된 문자적 해석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기쁨은 어느 정도 알지만 삶과 사역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도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기도와 같은 주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기도학”과 같은 주제는 엉뚱한 신령스러운(?) 신비주의 목회자들이나 다루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학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성경해석을 제대로 할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죠.

올바른 기도에 관한 성경의 지침은 사실 성서학에서 연구되어야 할 분야입니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은 기도의 영성 같은 내용을 머리로 알지 실제로 기도생활의 깊이를 체험한 분들은 드뭅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글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이론에 불과한 내용이 많습니다. 정작 본인의 체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영성을 배우려면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한 쉬운 환경으로 고독은 필수입니다. 혼자 있어서 괴로운 외로움과 다른 방해받지 않는 홀로있기입니다.

연약해서 기도하기 힘들다고요? 저는 너무나 연약해서 안식을 누리지 않으면 삶이 피곤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피곤한 사람이 많이 쉬는 것을 괴로와 할 필요가 없듯이 연약에는 기도가 보약이고 해답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약할 때 기도를 통해 강함을 더 체험하기 때문이죠. 늘 기도하던 바울이 약함을 자랑질(?)한 이유입니다.

계속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