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1

[자유의지와 노예의지1]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성결가족 여러분,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처음 듣는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신학용어인 데다, 다른 교단 신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몇 해가 지나 처음 이 말을 접하고는 무척 생소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예의지가 뭐지? 노예근성? 노예들만의 특성?’

노예의지가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렇다면 사람이 그저 꼭두각시라는 것이야?’하는 모종의 반발심과 함께, 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 읽고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저는 혹 자유의지를 가르쳐온 우리 교단의 신학보다 오히려 노예의지가 성경적 가르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 논리에 깊이 설득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를 다녔고 신학교에서도 자유의지를 배운 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노예의지를 가르친 분들은 성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 존 칼빈 등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자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거나 사고력이 부족하거
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와 경건한 목적의식은 순수하고도 강력해서, 어쩌면 노예의지를 반대하는 것은 은혜와 영광의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두려움마저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노예의지란 무엇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크게 동식물과 사람이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하나님과 천사들, 마귀와 귀신들이 활동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노예의지론의 핵심입니다. 물론 영적 세계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 교단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그 영향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서 자유의지론과 노예의지론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틴 루터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짐승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누가 올라탈지를 인간이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죄인들의 의지를 지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 지배를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내쫓고 그 사람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그의 의지를 지배하셨기에 가능합니다. 믿음과 거룩한 삶은 노예의지에 의해 피동적으로 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통해 능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지는 꼭 점검해야하겠지만, 먼저 그들의 의도부터 살펴보면, 그들은 인간의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습성, 즉 나쁜 일에 대해서는 늘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면서 좋은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로 돌리는 교만과 배은망덕, 간사함을 꺾어버리려는 것입니다. 회개도, 믿음도, 거룩한 삶도 우리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못박아버릴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방법을 찾는 하이에나 같은 우리의 습성은 좌절되고, 영광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부정은 인간의 자부심, 인간의 자기 우상화, 인간의 마귀화를 막는 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근원에 관하여“오직 은총으로”라는 말을“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사람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오직 믿음”을 해석할 때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사람이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도 신적 결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과 거룩한 삶의
여부는 100% 믿음을 주실 것인지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에게서 노예의지는 예정론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의지론이 인간의 책임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불신과 멸망까지 하나님께로 그 원인이 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과연 신적 결정론만 가르치면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선택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 교단 신학(기독교대한성결교회/웨슬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음호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