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즈음하여, 시간이 지나도 기억해야 할 내용들.

<장기영 박사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 탄핵 정국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세: 종교개혁 499주년에 돌아보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신학에는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웨슬리 학자로서 신학의 어떤 주제에서 루터 시대보다 웨슬리 시대에 더욱 발전한 신학적 요소들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과 체험을 통해 루터만이 기독교 공동체에 줄 수 있는 깊은 차원의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특히 루터가 가르친 하나님의 두 왕국 교리에는 오늘의 신자들, 목회자들,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에 관해 배워야 할 깊은 통찰이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깊이 있게 가르칠 수 있었던 외적 요인 중 하나는, 그가 사실상 한 시대의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까지 통치했던 신학자였다는 사실이 있다. 루터는 칼빈이 제네바 시의회와 맺은 관계처럼 평등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작센을 통치했던 경건한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절대적인 신임과 보호 아래 종교와 사회 전체에 포괄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 신학자가 어떤 환경에서 신학했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유대적 환경 속에서 자란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로마 시민으로서 헬라 문화와 학문에 능통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은 것은, 환경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태중에서부터 예정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준비시키신 것과 같은 섭리를 루터에게서도 발견한다. 루터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필요로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독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뿐 아니라 여러 제후들을 지지자로 주셔서 루터에게 매우 특별한 정치적 입지를 주신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의 일면을 드러내는 일을 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을 십분 활용했다고 믿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현재의 탄핵 정국에서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의 공적인 질서를 엉망으로 만든 박근혜와 최순실, 그들을 비호하면서 꼭두각시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해온 한통속 범죄자들의 무리인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새누리당과 검찰 집단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로부터 배우기 위한 것이다. 이 나라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박근혜를 꼭두각시로 내세웠을 때 정보력이 제한된 이 나라의 대중들은 “박근혜가 불쌍해!”라는 감정적 이유로 박근혜를 선택했다. 현재의 탄핵 정국에서도 정보력이 제한된 대중은 박근혜-최순실-새누리-검찰-전경련이라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장악된 언론을 통해서만 정보를 접하기에, 그들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망국적 위기에 빠뜨렸으며 또 지배력 영속화를 꾀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언론은 지금도 박근혜도 피해자라는 논리로 “박근혜가 불쌍해” 분위기를 조성하여 탄핵 정국 와해를 꾀하고 있고, 새누리와 검찰은 박근혜의 실정을 감추고 증거를 인멸하려는 조직적 작업을 감행하고 있다. 야당은 그들에게 약점을 잡혔는지, 의지가 없는지, 철저히 무력한 가운데 탄핵을 열망하는 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에 나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탄핵 정국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함부로 박근혜 용서를 말하지 말라!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신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법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회인이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따라야 할 두 가지 법, 그리스도의 법과 이 사회의 법 사이에 분명한 모순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악에는 저항하지 말고, 폭력을 감수할 것을 가르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법은 죄인을 벌할 것과, 악에는 저항할 것, 잘못을 저지른 원수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것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악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말씀을 따를 책임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악과 불의의 근원을 벌하여 사회를 지켜낼 책임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면서, 어떤 실천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듯한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실천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가? 먼저,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이 모순된다는 이해 자체를 교정해야 한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은, 흔히 사람들이 서로 모순적인 관계로 이해하기 쉬운 두 가지 법,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은 모두가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인간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세 종류,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구분했다. (1) 우리가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현세적인 법률을 다루는 내용이 아주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신체나 재산 등에 해를 끼친 경우 어떤 형벌을 받고 어떤 보상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율법이다. 루터는 이를 시민법(또는 정치적 율법)이라 불렀다. (2) 다음으로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하기 위한 각종 제사제도 등 예배의 외적 형태에 관한 율법이 나오는데, 루터를 이를 의식법으로 불렀다. (3) 그 외에 믿음과 사랑을 명령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데, 루터는 이를 도덕법으로 불렀다. 이 세 가지 율법 중 루터는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념하는 성례로 대체되었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시민법은 어떠한가?

루터는 각 사회가 가진 나름대로의 사회법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민법과 동일한 범주로 보았다. 루터는 구약 속 시민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온 세상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양심의 법(또는 자연법)을 모세가 탁월하게 해석해냈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양심의 법(또는 자연법)이란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말씀한 데서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원천적으로 새겨놓으신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원리를 의미한다. 이 자연법은 인간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사회에 법과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 법을 새겨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모세의 법 안에 있는 훌륭한 시민법의 정신을 현대의 실정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성적으로 사람 속에 새겨주신” 자연법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영혼을 다스리고 개인적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해야하는지의 원리 뿐 아니라, 각 사회의 공의와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적인 원리를 모두 포함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법과 같이 믿음과 사랑을 명령할 뿐 아니라, 구약 속 시민법과 같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질서와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을 벌해야 한다는 명령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혼과 양심만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의 공적인 영역도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져야 함을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과 세상의 법, 즉 용서하라는 명령과 처벌하라는 명령 사이를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모순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는 성경을 매우 오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용서해야 하고, 죄인을 정죄하거나 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포괄적이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용서만 해야 하고 정죄하거나 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자택일을 피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즉, “죄인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죄인을 벌하여 세상이 악과 불평등과 무질서에 빠지지 않게 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자 사회인으로서 이 두 가지 말씀 중 어떤 때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때 죄인을 벌하라는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으로서 이웃을 대하는 자세와 공인으로서 공적인 법을 대하는 자세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루터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우리는 직분과 개인 사이를 뚜렷이 구분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녀로, 나를 아버지로 만드셨다. 한 사람은 주인, 다른 사람은 종으로 만드셨다. 한 사람은 왕, 다른 사람은 백성으로 만드셨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한스 또는 닉이라는 개인으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작센의 제후, 아버지, 또는 주인으로도 만드셨다 …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각 개인인 자연적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직분자의 위치나 통치자로서의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날카롭고 엄격해야 하며, 분노하고 형벌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 공적이지 않은 다른 관계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기를 배워서 이웃에게 부당하게 대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 말 속에서 루터는 “개인”과 “직분” 사이를 구분한다. 달리 말하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개인적인 관계와, 사회 속에서 맺는 공적인 관계를 구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루터가 개인과 직분, 개인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구분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성경 말씀만 적용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는 그런 식의 이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만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를 포함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두 왕국 모두에 속한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두 왕국 모두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든, 교회 속에서든, 공적인 관계에서든, 사적인 관계에서든 그리스도의 사랑의 율법을 자신의 삶의 유일한 원리로 여기고 실천해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미덕들은 세상 나라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유효한 법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지적하는 또다른 내용은, 동일한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방법이 개인적 관계에서와 공적인 관계에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우리는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이 세상에 적용할 때에는 죄인의 용서에 제한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방법 역시 달라야 한다. 신자의 마음이나 개인 관계가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움직이고 다스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공적인 영역에서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양식과 수단과 방법은 시민법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죄인을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신자들의 “신자들의 마음가짐” 및 그들이 다른 사람과 맺는 개인적 관계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 세속 사회를 다스리는 공적인 규칙이 될 수는 없다. 공적인 사회 속에서 공적인 대중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방법은 시민법을 공정하게 적용하여 죄인을 엄벌함으로써이다.

루터는, 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사회에서, 특히 두 왕국의 법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일 때는 더욱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인리히 보른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왕국을 통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맺는 두 가지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한쪽에는, 그리스도인 자신의 존재와,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개인적 태도들, 그리고 그의 복음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 이 영역에서는, 용서와 인내와 희생에 대한 무조건적 명령이 유효하다.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이 있다. 이 삶에서 법은 필히 악을 확고히 제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아무도 불의를 겪거나, 타인으로 인한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적절한 균형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라는 어리석고 악한 지도자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 드러나게 된 이번 일을 사례로 들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인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범죄자 박근혜에게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와 같은 공적인 죄인은 철저히 시민법을 통해 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것인가? 이런 경우 죄인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적용한다면, 박근혜 개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시민법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회 전체에는 막대한 피해가 따르게 된다. 박근혜가 권력을 남용함으로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가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외면하고, 박근혜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할 책임, 즉 대한민국을 부패시키고 불평등과 불의를 사회전반에 만연케 한 일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면, 박근혜 한 개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죄인을 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무분별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적용한 결과는,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불의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그 일을 행한 자는 개인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스스로 자위할지 모르나, 그는 박근혜 이외의 모든 사람, 정의로워야만 유지될 수 있는 공적인 사회 전체에 악을 지속시키고 유포시킨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될 뿐이다.

용서의 법은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향해 개인적으로 실천해야 할 법이다. 그러나 공공의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범죄한 박근혜 무리에게 용서의 법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을 처벌하고 엄청난 대가를 지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을 더 이상 타락하지 않게 지켜내는 일이 된다. 우리의 후손들 앞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런 판단력도 없이, 성경의 어떤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박근혜를 용서하자고 말하는 신자와 목회자는, 온 세상에 악을 편만하게 하는 사탄의 사악한 일에 동조세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도록 그 진노를 높이 쌓으시게 하는 일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탄핵으로 박근혜를 심판하고, 그의 실정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화합을 말하지 말라!

루터는 『세속 권력: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1523)라는 논문에서 사람을 참된 신자와 세속적인 사람 두 종류로 나눈 후, 참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어떤 소송이나 제소나 법정이나 판사, 형벌, 율법, 칼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 즉시 덧붙이기를 “그런 신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 그러나 악인은 언제나 수가 많다”고 말한다. 루터에 의하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심각한 죄인이므로 그들을 벌할 세상 나라의 칼은 언제나 필요하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 신자들과 목회자들, 신학자들이 루터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인식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순진한(too much naive) 신뢰를 가지고 있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기 전에도 그가 얼마나 사악한 자이며 얼마나 사악한 자들을 위해 봉사해온 자인지는 수없이 많은 기사와 정보를 통해 이미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악의 현실을 북한의 김정은에게만 적용할 줄 알았지, 대한민국의 통치자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사탄을 공중 권세 잡은 자로 묘사하고,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사로잡아 그들을 통해 역사하는 존재임을 그 스스로 가르쳐온 목회자들도 악한 영의 역사를 대한민국의 부패한 통치 권력과 기득권 세력에는 적용하지 못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은 사탄의 종된 자들, 대한민국을 부패시킨 자들을, 대한민국을 부강케 한 자들, 나라를 세운 자들로 완전히 뒤바꾸어 존경하고 숭배해왔다.

대한민국 보수 기독교인들이 루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참된 신자는 세상의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좋은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탄의 종된 자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숭배해 왔으니, 그들 역시 어리석고 영적으로 어둡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지금도 용서와 화합을 말하지만, 루터는 이러한 주장 속에 담긴 오류와 어리석음을 분명히 보았다. 루터 시대에 재세례파와 농민전쟁 지도자들이 “이 세상을 복음으로 다스려야 하며, 모든 세상의 법과 칼은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루터는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임을 바르게 판단했다. 오늘의 보수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바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루터는 사탄의 종된 악인들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용서하고 화합하자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으로 온 나라 또는 세상을 다스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한 우리 속에 늑대들, 사자들, 독수리들, 그리고 양들을 함께 넣어두고, ‘자유롭게 지내고, 서로 사이좋고 평화롭게 지내거라. 우리는 막혀있지 않고 서로 통해 있고, 우리 안에는 많은 양식이 있다. 너희들은 개들이나 몽둥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짐승들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게 하려는 목자와 같다. 의심할 바 없이 양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주인이 준 음식을 먹고 평화롭게 지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짐승들 역시 살아남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수천 명 중에 참 그리스도인은 한 명을 찾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쉽게 믿은 결과는 ‘사람들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한 나머지 세상은 혼란 그 자체가 되고 말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박근혜의 사악한 눈물을 보았는가? 수없이 많은 국민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생존권을 뒤흔든 장본인 최순실이 흘리는 사악한 눈물을 보았는가? 사악한 박근혜 정권을 비호하고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방해해온 새누리당의 비열한 단합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검찰들이 증거를 인멸하고 정권의 개가 되어 대한민국의 공의와 법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루터가 말한 “늑대들, 사자들, 독수리들”임을 보지 못하는가? 수없이 속고도 여전히 순진하게 그들을 믿고, 그들이 포함된 거국내각 구성을 말하며, 특검을 말하며, 즉시 탄핵을 외치지 않는자는, 그들의 사악함에 동참하는 악한 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맹수와 양을 같이 뒤섞어놓고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외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선량한 의도로 그들에게 베푸는 어떤 선의도 그들은 왜곡하고 악용하여 더욱 사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하는 뻔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박근혜와 최순실만을 보는가? 그들 배후에서 대한민국 99%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며, 자신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존과 기본권을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 1%를 보지 못하는가? 그들의 잘못을 수없이 경고해온 사람들, 대한민국의 앞날을 염려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취급했던 사람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에 반대의 댓글을 달기 전 지금까지 조중동에 정신을 헌납한 채 살아온 과거를 인정하고, 진실을 외치는 다양한 매체들이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어떤 기사들을 쏟아내었는지 먼저 공부라도 해보라. 기독교 구원론의 전제인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하는 신자와 목회자들이여, 악인들을 악인으로 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성경을 다시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말하라.

박근혜를 즉시 물러나게 하느냐 아니냐는, 단지 현재 드러난 박근혜의 실정을 심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희대의 사기꾼 이명박과 희대의 어리석은 대통령 박근혜 배후에서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이 대한민국 지배력 영속화를 확고히 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 꼭두각시들 배후에 숨어서 대한민국을 망쳐온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을 심판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자신들을 개 돼지들을 지배하는 자로 아는 1% 부패한 기득권 세력 지배의 영속화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참된 주권자들이면서도 그들의 폭정 하에서 고통하며 참아온 99% 서민들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 회복 사이의 투쟁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명박근혜를 처벌할 기회를 영원히 날리고 대한민국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경고한 한 페친의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검찰도 박근혜다
새누리도 박근혜다
조중동도 박근혜다
전경련도 박근혜다
진실성 없는 야당은 없느니만 못하다
나라 살리는 길은 국민행동밖에 없다

하나님 아버지, 대한민국이 망할 위기에 있습니다.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아는 참된 주의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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