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의미- 싸구려 믿음을 버릴 때]

1. 영어에서 believe란 단어는 원래는 전치사를 동반할 수 없는 동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believe는 항상 전치사 in과 함께 다닙니다. 직역하자면 ‘~을 믿다’가 아니라 ‘~안에 믿다’라는 의미입니다.

2. 영어 believe가 전치사 in과 함께 다니는 이유는, 실은 신약성경 헬라어에서 ‘믿음’을 의미하는 동사 피스티스란(pistis) 말이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전치사 ‘en’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영어 빌리브는 헬라어 피스티스에서 파생된 용법을 그래도 물려받은 것이지요. 그럼 왜 헬라어 피스티스는 전치사 en을 동반하면서 역시 직역하자면 ‘~ 안에 믿다’라는 의미를 드러내려고 했을까요?

3. 이것은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됨”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4.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신앙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5.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그 믿음이 나(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듭니다. 즉 예수에 대한 믿음이 나(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음으로써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연합을 시킵니다.

5. 그리하여 그 믿음의 결과로, 나(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과 동일(동등)한 효력이 나타납니다. 즉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6.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여 죄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선취적인 의미에서 (이미)예수와 함께 부활한 사람입니다. 종말론적인 부활의 사건이 이미 선취적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7. 그런데 특히 바울은, 이렇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주권의 변화(change)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8. 즉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하에서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예수의 주권 아래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상징언어가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말씀입니다.

9. 예수를 믿고, 예수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예수의 주권 아래로 들어와 사는 삶을 가리켜 “예수와 연합한 삶”, 혹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의 삶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동사 피스티스 혹은 빌리브란 단어 뒤에 꼭 전치사 en 혹은 in을 동반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0.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일요일에 예배당에 가고, 십일조 하고, 술담배 안하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에 걸쳐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주권(lordship)아래 순종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11. 또한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도, 단순히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복을 받아 누리다가 죽은 다음에 저 천국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고, 지금 여기서 주어진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며 또한 구원받은 삶입니다.

12. 그럼 예수님을 자신의 삶으로 모시고 사는 구원받은 삶의 구체적인 원리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3. 사랑은 절대적이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성격을 띱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다른 것을 사랑하는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4.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 역시 같습니다. 이웃을 이용과 착취와 지배와 밟고 일어섬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수준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5. 또한 사랑은 자기 희생적 성격을 띱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16. 이것이 예수를 믿고,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에 대한 성경의 이상이자 권면입니다.

17. 그리고 성경은 역사와 우주의 종말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대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예수와 얼마나 깊이 연합하여서, 예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는지를 평가받고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8. 그런 맥락에서, 신약성경, 심지어 바울 서신은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받을 것이라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19. 여기서의 ‘행위’란 개신교인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어떤 인간의 공적이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온 생애를 통틀어서”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살아온 존재 전체, 인생 전체, 삶의 흔적과 자취 전체를 의미하는 상징어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20. 애통하게도 오랫동안 한국 기독교를 망친 것이 바로 싸구려 믿음, 값싼 은혜였습니다. 즉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감정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나의 구원의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고 그 다음에 남은 핵심 문제는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서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 가서 이미 분양권을 확보해두었던 100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으로 오해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믿음과 구원의 이해가 한국 기독교인들을 지극히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21.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적 믿음은, 예수를 믿고 예수와 연합하여 그분의 주권 아래 들어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런 삶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옳게’ 여겨주실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희망과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22. 한국 기독교가 이런 진짜 성경적인 믿음과 구원의 이해를 회복한다면,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독교’란 말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만을 절대적 가치로 섬기고 사는 삶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에게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종종 자신을 절대적 존재로 착각하는 악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과 저항을 동반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도서출판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의 펫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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