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1

[자유의지와 노예의지1]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성결가족 여러분,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처음 듣는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신학용어인 데다, 다른 교단 신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몇 해가 지나 처음 이 말을 접하고는 무척 생소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예의지가 뭐지? 노예근성? 노예들만의 특성?’

노예의지가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렇다면 사람이 그저 꼭두각시라는 것이야?’하는 모종의 반발심과 함께, 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 읽고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저는 혹 자유의지를 가르쳐온 우리 교단의 신학보다 오히려 노예의지가 성경적 가르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 논리에 깊이 설득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를 다녔고 신학교에서도 자유의지를 배운 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노예의지를 가르친 분들은 성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 존 칼빈 등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자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거나 사고력이 부족하거
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와 경건한 목적의식은 순수하고도 강력해서, 어쩌면 노예의지를 반대하는 것은 은혜와 영광의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두려움마저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노예의지란 무엇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크게 동식물과 사람이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하나님과 천사들, 마귀와 귀신들이 활동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노예의지론의 핵심입니다. 물론 영적 세계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 교단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그 영향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서 자유의지론과 노예의지론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틴 루터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짐승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누가 올라탈지를 인간이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죄인들의 의지를 지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 지배를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내쫓고 그 사람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그의 의지를 지배하셨기에 가능합니다. 믿음과 거룩한 삶은 노예의지에 의해 피동적으로 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통해 능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지는 꼭 점검해야하겠지만, 먼저 그들의 의도부터 살펴보면, 그들은 인간의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습성, 즉 나쁜 일에 대해서는 늘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면서 좋은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로 돌리는 교만과 배은망덕, 간사함을 꺾어버리려는 것입니다. 회개도, 믿음도, 거룩한 삶도 우리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못박아버릴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방법을 찾는 하이에나 같은 우리의 습성은 좌절되고, 영광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부정은 인간의 자부심, 인간의 자기 우상화, 인간의 마귀화를 막는 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근원에 관하여“오직 은총으로”라는 말을“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사람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오직 믿음”을 해석할 때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사람이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도 신적 결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과 거룩한 삶의
여부는 100% 믿음을 주실 것인지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에게서 노예의지는 예정론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의지론이 인간의 책임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불신과 멸망까지 하나님께로 그 원인이 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과연 신적 결정론만 가르치면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선택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 교단 신학(기독교대한성결교회/웨슬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음호를 기대해주세요.

2014-03-01. QT큐티체조. 대한 독립 만세!

간단설명. 사두개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사로잡혀 있음을 밝히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8-27
한글본문.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영어본문.
18 Then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with a question. 19 “Teacher,” they said,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and leaves a wife but no children, the man must marry the widow and have children for his brother. 20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one married and died without leaving any children. 21 The second one married the widow, but he also died, leaving no child. It was the same with the third. 22 In fact, none of the seven left any children. Last of all, the woman died too. 23 At the resurrection whose wife will she be, since the seven were married to her?” 24 Jesus replied, “Are you not in error because you do not know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25 When the dead rise, they will neither marry nor be given in marriage; they will be like the angels in heaven. 26 Now about the dead rising–have you not read in the book of Moses, in the account of the bush, how God said to him,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27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badly mistaken!”

간단설명.
사두개인(18절). 내세와 부활, 영의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세적인 유대주의 종파 중 하나다.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26-27절)?
⬇ 아래로 인간. 사두개인들의 오해와 곡해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24절)?
? 물어봐. 부활한 사람은 어떤 존재와 같이 되는가(25절)?
! 느껴봐. 나는 신앙생활 중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오해와 불신을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해 속에서 해소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Meditation. 우문현답 속에 드러난 하늘의 비밀
올무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악의적인 질문이 예수님께 주어진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형사취수법’(신 25:5-6)을 빌미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의적이고 어리석은 질문을 되받아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더욱 선명하고 풍성한 진리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부활 이후에 천사와 같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와 불신앙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통렬히 밝히신다.
신앙생활 중에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들이 생겨나고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붙들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공허한 사색과 논쟁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면 풀리지 않는 믿음의 난제란 없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가? 이성과 상식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 안에서 용납하고 있는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2-02-2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자신을 책잡기 위해서 세금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데나리온을 보이라고 하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3-17
한글본문.
13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영어본문.
13 Later they sent some of the Pharisees and Herodians to Jesus to catch him in his words. 14 They came to him and said, “Teacher, we know you are a man of integrity. You aren’t swayed by men, because you pay no attention to who they are; but you teach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Is it right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15 Should we pay or shouldn’t we?” But Jesus knew their hypocrisy. “Why are you trying to trap me?” he asked. “Bring me a denarius and let me look at it.” 16 They brought the coin, and he asked them, “Whose portrait is this? And whose inscription?” “Caesar’s,” they replied. 17 Then Jesus said to them,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And they were amazed at him.

도움말.
데나리온(15절). 로마 황제 가이사의 화상과 그의 신적통치를 표현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은전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7절). 이 표현 가운데 헬라어 ‘카이’라는 접속사가 번역에서 생략되었다. ‘카이’는 순접(그리고)과 역접(그러나)의 의미를 다 포함해 문맥에 의해 번역해야 하는데, 본 구절에서는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15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을 책잡으러 온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17절)?
? 물어봐. 하나님의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17절)?
! 느껴봐.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을 가진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드려지고 쓰임 받기 위해 어떠한 부분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는가?

Meditation,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세금에 대한 논쟁 기사는 예수님의 대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단적으로 표명해 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7절)는 이 언명은 자신을 책잡으려는 질문의 의도를 피하기 위한 수사학적 답변만이 아니다. 이 대답은 세속 국가인 가이사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두 구문 사이에 번역이 생략된 카이(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함께 읽어야 한다. 곧 ‘가이사의 화상과 글이 있는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 주어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말씀을 받은 너희의 삶 전부는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다. 마가는 전체 문맥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권의 절대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이 주어졌다. 당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당신의 시간과 재정과 재능과 관계는 지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적인 기독교인의 심각한 우울증?

최근 유명한 한 목사의 죽음이 심장마비가 아니라 자살이었다는 기사가 떴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고 연이은 자살 시도 끝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일반인도 해서는 안 될 자살을 목사가 왜 선택했을까? 그는 성령 충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분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정직하고 개혁적인 분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심각한 우울증은 정신의 병일 뿐일까? 신앙의 차원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이 이야기는 필자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십여 년 전 가까이 지내던 한 여집사가 자살했다. 개인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파탄 났다. 남편의 사업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사라진 어린 자녀를 제대로 보살피며 키우기엔 젊은 남편의 삶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여집사는 성품이 모질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산 사람이었다. 대형 교회의 집사로 구역장으로 항상 솔선수범이었다. 목회자를 섬기는 면에서 언제나 정성을 기울였고 새벽 기도, 거의 매일 있는 철야 예배,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당시 사업하던 남편이 매달 건네준 큰 액수의 생활비가 항상 크게 모자랄 정도로 교회 봉헌을 열심히 하였다. 자신은 물론 아이들 옷 한 벌 제대로 사지도 않으면서 봉헌했다.

여집사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농약을 마셨다. 여집사에게서 가장 많은 물질적 혜택을 본 그 교회 부목사가 장례식장에 왔다. 그리고 자살은 죄며 그녀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국엔 갈 수 없노라고 했다. 당시 외국에 살던 필자는 그 소리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미친 것 아냐! “수십 년 전에는 그렇게 믿던 목회자들이 뜻밖에 많았다. 아니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미신적인 사고가 보편적이어서 우울증은 귀신 소행, 자살은 마귀의 행위라고 믿은 이들이 다수였다. 사실 대부분 우울증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지금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처럼 말이다. 지금은 그 목회자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분도 일정 부분 희생자다. 신학의 빈곤으로 생긴 일이기 때문에 탓하자면 끝이 없다.

심각한 우울증이 원인인 자살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수 세기 전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한 이의 장례식장에서 관을 두드리며 유족들 앞에서 “뜨거운 불 가운데 잘 타고 있는가”하고 호통치던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차마 이름을 밝히지 않겠으나 우리에게도 아주 잘 알려진 서양 부흥사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확신 있는 복음 전도자의 성령 충만한 행위인 양 여겼지만 그런 방식은 사실 성경적이지 않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근본주의자들이 지배하던 당시에는 이런 행태를 확신 있는 신앙으로 보았다. 우리 사회에도 아직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럴 때는 성경을 신학 서적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니 신학적으로 왈가불가한들 바뀔 것이 없다. 이미 자살한 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일 것이다.

필자는 그 여집사가 신앙이 잘못되어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는 이미 자기 의지에 의한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도움을 주지 못했던 가족과 교회가 안타깝다. 이럴 때 치명적인 실수는 목회자가 환자에게 신앙으로 고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만이 아니시다. 만유의 주님은 좋은 의사를 통해서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병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면 곧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유전적 우울증인 경우 병원 치료를 통한 완치율은 30% 미만이라고 한다. 유전적인 우울증은 후천적으로 관리는 할 수 있어도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적 우울증은 불치병이라 부를 정도로 재발률이 몹시 높다. 그래서 다수 환자는 더 악화하지 않게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며 우울한 자기를 보살피면서 평생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주변에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신앙으로 극복해 보고자 애를 쓰는 기독교인들을 본다. 안타깝게도 신앙으로 극복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크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신앙은 의료적 도움과 병행할 때 확실하게 큰 도움이 된다. 가벼운 우울 증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 긍정의 힘을 주장하는 산술적인 책이나 강사들을 추종하여 교회에서도 이를 신앙으로 둔갑시켜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가 만든 귀신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인 긍정적인 사고로 우울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보통의 우울한 감정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온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 생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그런데 생각은 무의식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최소 95% 이상 인간의 의식을 조종한다. 즉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고자 해도 생활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초등학교 학생과 전문 격투기 선수와의 싸움처럼 언제나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의식적인 좋은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도 곧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이 나를 지배하기 쉽다. 다시 말하거니와 건강한 사람도 잠시 겪는 지나가는 우울증 이야기가 아니다. 무의식과 뇌가 이미 강하게 우울증에 노출된 경우 의학적 도움 없이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높은 영성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훈련된 영성가의 경우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완치는 힘들어도 우울증을 잘 다스릴 수만 있다면 유익한 면도 있다. 첫째, 우울증을 겪는 이는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당하다 보니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해 준다. 둘째, 우울한 감정이 예술과 문학적 감성의 에너지로 변화되기도 한다. 우울감은 창조의 에너지다. 셋째, 인간의 연약함을 깊게 인식하고 신앙에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기도 한다.

정신착란(schizophrenia)이 아닌 노이로제(Neurosis)의 일종인 우울증은 감기같이 흔한 질병이다. 영국 스펄전 목사도 옥한흠 목사도 헨리 나우엔도 우울한 성향이 강한 분들이었다. 유명한 설교자나 기독교 작가 중엔 우울증이 기본인 분들이 많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가? 우울함이 신앙으로 잘 승화하면서 오히려 좋은 설교와 글이 나왔던 경우다. 그러나 문제는 심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한 우울증이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니까요. 나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죠. 물론 마음이 약해질 때도 때론 있지만, 항상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거든요. 내가 어떻게 심한 우울증일 수가 있어요? 난 아니거든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이리 외롭고 우울한 거야. 모든 것이 짜증 나!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거야? 난 알고 있어. 다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난 성령 충만해야 해! 마음에 위로를 주는 설교와 글, 집회를 찾아봐야지.”

이런 심각한 경우는 뜻밖에 목회자들 사이에 더 자주 발견된다.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몸부림친다. 문제는 그들이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 사실 사소한 일인데도 감정이 더 상하고 낙심되는 느낌! 그리고 이 화의 감정은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죄책감! “목회자로서 내가 이래야만 하는데 지금 나는 어떠한가?” 결국, 감정에 삶의 에너지가 다 낭비되어 하루를 시작할 힘도 없어진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깊은 우울함에 빠질 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많이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우울증에 대해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빠져나올 수 있다면 심각한 우울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와 위기의 느낌에 관한 생물학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뇌 기능의 한도가 넘어선 상태이기 때문이다(Kramer, p.131). 즉, 감정을 다스리는 뇌 부분의 기능이 감소한 경우에 개인의 의지가 감정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의 원인은 뇌 화학물질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이런 경우 누구나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환경적인 심한 충격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환경이 나빠서 모두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유전적인 요소가 오히려 개인의 반복되는 우울증에 가장 큰 요소다. 유전적으로 우울증에 강한 사람은 우울감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한다. 우울증에 덜 걸린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건 조상 덕분이란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성령 충만한 영적인 목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중생했으니까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우울증을 벗어나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왼발 가려운데 오른발 긁는 꼴이다.

가벼운 우울증이나 우울증 예방에는 신앙생활이 확실히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은 이미 신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다.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전문 치료가 필요한 중병 환자에게 음식 조절하고 잘 쉬면 치료되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 노화가 진행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육체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는 생물학적인 이유로 임상적인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유전적 병은 육체적 질병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우울증은 “믿음의 부족” 혹은 “나쁜 태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주변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다 믿음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꼭 정말 신앙심이나 선한 양심이 털끝만치도 없는 이들 중에 우울증과 거리가 먼 사람도 많지 않은가? 아픈 사람에게 질책은 금물이다.

우울증은 마음과 몸의 상태에서…마음과 몸은 긴밀하게 연결

첫째, 짧은 시간의 우울증은 때론 단순히 축적된 피로와 힘든 상황의 결과다. 왕상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홀로 삼백여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의 힘든 싸움에서 이긴 후 심하게 탈진했다. 그런데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결국 그는 우울감에 빠져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끝내 달라고 소리친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잠을 자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회복된다. 주변에 충분히 잠을 잘 수가 없고 학업이나 생활고에 지쳐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우선 생활이 힘들더라도 정신적으로 힘든 짐은 그리스도에게 다 맡기고 정신적인 쉼을 얻어야 한다.

둘째, 가벼운 우울증은 건강한 음식 섭취와 정기적인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다. 음식과 운동도 우리의 감정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준다. 온갖 가공되고, 포화 지방이 넘치는 음식,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면서 운동은 멀리할 때 우울감은 당연하다. 건강한 음식 섭취를 하고 정기적인 운동을 할 때 상당수의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누릴 것이다. 우울할 때 끌리는 초콜릿에 빠지지 말고 평소에 영적인 생활을 즐겨라. 우울감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인간은 원래 육체적으로 노동하고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되었다. 정기적인 기도와 찬양, 예배를 드리는 삶은 분명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에 도움을 준다.

셋째, 우울증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몸의 화학적인 불균형으로 오기도 한다. 특히 유전적인 경우도 많고 여성들이 갱년기 때 겪은 우울증은 사실 육체적인 문제다.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과 근육 증가 운동이 도움되는 것은 틀림없다.

넷째, 우울증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문제다. 오늘날 탐욕과 소비를 부추키며 항상 경쟁을 시키는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소진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요즘 남녀 간의 사랑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다. 예전보다 남자는 돈, 여자는 미모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많은 젊은이에게조차 진실한 사랑이란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사회에서 서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예전부터 백의의 천사로 불리던 간호사들의 현실은 지금 과도한 업무 그 자체다. 그래서 힘들게 대학에서 공부하고도 4년 내 이직률이 가장 높은 직업 중의 하나다. 병원에서도 중요한 것은 ‘돈’이다. 비용 절감 때문에 결국 업무 스트레스는 계속 높아진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것 모두 우울증을 유발한다. 충분하게 쉴 수 있는 휴가가 필요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직장,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겪는 우울증은 사회적 문제다. 돈 때문에 형식적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수없이 외쳐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 빈익빈 부익부를 벗어날 수 없는 희망없는 미래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우울증을 감소시키려면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우울증은 영적인 문제일 수 있다. 하나님 뜻에 맞지 않게 살았다는 죄책감은 우울증을 유발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과 남을 해친다. 특히 기독교인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복음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가 아님에도 성경을 잘못 읽어서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목회자들은 죄책감을 심어 주는 율법적인 말씀은 잘 전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서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청소년 중에는 성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자살을 생각한다. 많은 교회에서 그 고통을 이해해 주고 상한 마음에 위로를 주고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날 길을 제시해 주기보다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심하게 정죄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섯째, 유전적인 우울증의 잠재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또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고 누구나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도 습관이고 생각에서 감정이 발생한다. 평소에 늘 감사하고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성서적인 세계관이 무의식까지 침투되어 있기란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관점이 체득되어 있고 기도의 힘이 축적된 사람은 사실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거나 또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쉽게 우울해지지 않는다. 우울함에 빠져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빠져나온다.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하듯이 오랜 기간 영성 훈련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강하게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서로 보살피는 양육 관계(보살핌을 받는 것 이상 보살피는 기회도 크나큰 기쁨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 성경의 영성 훈련은 영혼의 보약이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해야 하는 예방이다. 그러기에 이미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으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목회자의 지도 아래 오랜 훈련을 통해 영적인 관점이 체득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관리 가능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조절이 안 될 때는 더 심해지기 전에 무조건 전문 병원에 가라! 이런저런 주변의 말을 믿지 말고 전공의의 말을 신뢰하라. 현재 우울증 치료는 예전보다 상당히 발전했다. 가까운 곳에 경험이 많은 전문 상담가 혹은 정신 건강 전문 인력을 찾아가야 한다. 병이 있으면 그 분야의 좋은 의사를 만나야만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상담과 의료계에서 그 분야에 검증된 전문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찾아야만 한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상담가와 의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문이나 인터넷 광고, 언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전문가를 만나 치료를 받는 것은 뜻밖에 쉽지 않은 일이다. 제삼자가 볼 때는 당연한 일임에도 심하게 우울증을 겪는 이에게는 전공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 보통 지독하게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울증이 있을 때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길 원한다면 그쪽의 최고 전문가를 찾는 길을 여러 전문가를 통해 모색해야 한다.

둘째,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면 정직해야 한다. 그들은 점쟁이가 아니다. 말을 안 하고 보여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은 도우려고 있지 정죄하거나 판단하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 많이 자신의 속마음을 개방할수록 더 많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끝으로 ‘목회는 목사에게, 질병은 의사에게’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우울증 환자를 상담하고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심각한 정신병에 대하여 목회자로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목회자가 개입할 부분과 전문의에게 맡겨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니면 목회자는 탈진될 정도로 에너지만 소진하고 가족들에게 원망을 사고 상처만 남겨 원수가 되기 쉽다. 필자의 신앙 친구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기립 원장의 말처럼 “우울증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이해하는 과학적 관점이 한국의 교계에는 아직 많이 결핍되어 있다, 의지가 부족해서 또는 믿음이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이 사고를 벗어나는 길이 환자를 돕는 길이다. 우울증!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 NES N JOY에서 가져왔습니다>

기도에 대한 작은 소품들.

[기도는 누구를 위하여?]
기도는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 내 필요는요?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면 내 필요는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기도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욕심내지 말고 부모에게 효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직장동료에게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격적으로 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랜 습관으로 말미암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처를 받으면 받은대로 갚으려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막상 상대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가까울수록 함부로 합니다. 결국, 상대를 내 욕심으로 대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합니다. 기도는 사랑을 채우고 실현하는 도구입니다. 사랑은 남을 나보다 더 존중하는 것이고요. 사랑은 영적으로 충만하고 정신이 건강한 사람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흉내내고 애를 쓴다고 할 수 있는일이 아닙니다. 어설프게 했단간 상처만 남고 문제만 더 커집니다.

프로이드가 주장한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려는 원리만을 따르는 인간 내면의 “이드”, 즉, 성경적으로 “옛 사람, 겉 사람, 육의 나”는 결국 나를 망칩니다. 이웃사랑은 성령의 개입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삶은 가진 자만의(?) 여유랍니다. 사랑의 실현은 현실에서도 길게보면 손해를 피하고 가장 큰 유익을 얻는 길입니다. 사소하게 손해를 보아도 환산할 수 없는 참 이득을 얻는 길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당신이 변하고 마음이 넓어져 미운 놈 떡하나 더 주는 마음으로 순수하고 넉넉하게 베푼다면 그 이상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를 지향하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를 지향하는 과정입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확실하게 초월적인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을 통해 내 의식으로 들어옵니다. 처음엔 내가 기도하다가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으로 중심이 바뀝니다(롬 8:26). 결국, 기도의 주체가 나에서 성령으로 신비스럽게 전환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으로까지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상태로 변하지요.

그러면 연약한 내 의식이 환하게 열립니다. 그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넓어집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괴롭던 감정들이 떠나가며 시편 기자의 “주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도 단지요? 내 입에는 꿀보다 더 답니다”(시 119:103)라는 표현이 실감 나게 바로 내 고백이 되지요.

만족이 오면 원망이 사라집니다. 원망이 사라지니까 평안해지고 평안해지니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은 가장 멋진 경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변하게 되면서 그분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체험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황소가 바늘 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습니다. 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백번을 죽었다 깨나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기도응답 확실하게 많이 받는 법 알려 드리겠습니다]
항상 구체적으로 간절하게 구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주변에 꽤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차고 넘치게 받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마세요. 자신의 일은 하나님께 아뢰되 결과는 다 하나님 뜻에 맡기기만 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을 내 인생의 진짜 주인으로 인정하는 길입니다. 들어 주셨다고 좋아 죽고 안 이루어졌다고 괴로워 죽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육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살만한 삶조차도 겨딜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듭니다.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안 이루어지면 더 감사하세요.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기도해도 자신이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보다는 안 이루어질 때가 사실 더 많습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밀러는 다 응답받았다고요? 거짓말입니다. 사실무근인 그에 대한 간증이 현재 한국 교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그의 일기를 직접 읽어보세요. 응답받지 못한 내용에 대한 그의 고백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실제로 나에게 더 큰 유익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나만 모를 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알고 나를 제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자신의 유익에 관한 것은 무조건 하나님 신뢰하고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괜히 걱정하고 설쳐대다가 상황만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마세요. “내 영혼아, 잠잠하라!” 묵직하게 물러서지 않는 강하고 가장 단순한 믿음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세요. 그럼 진짜로 가장 좋은 것을 다 얻게 됩니다.

<이민규 교수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12 WAYS TO PRAY FOR MISSIONARIES.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내용.

12 WAYS TO PRAY FOR MISSIONARIES
1. Pray for the needs in missionaries’ letters. Your Church should receive letters from each missionary it supports.
2. Pray for open doors. Many nations are closed to missionaries. Even in “open” countries, people’s hearts may be closed to the gospel.
3. Pray for missionaries’ spiritual needs. Missionaries need God’s presence, wisdom and anointing.
4. Pray for missionaries’ emotional and physical needs. Missionaries experience fear, danger, sickness, loneliness, and discouragement. Pray that they will have supportive friends, adequate rest and nutrition, and a sense of humor.
5. Pray for missionaries’ financial needs. In addition to personal expenses, missionaries need funds for building Churches, supporting Bible Schools, and many other projects.
6. Pray for missionaries’ cultural adjustment. Each nation has it’s own languages and customs. Missionaries must relate to the people they serve.
7. Pray for missionary families. Living in a new environment causes stress. Pray specifically for the relationships between each missionary couple and their children. Pray also for single missionaries.
8. Pray for missionaries’ working relationships. Pray that missionaries will keep a spirit of love and servanthood.
9. Pray for missionaries on deputation. Deputation is not vacation. Pray that God will give missionaries strength as they work to raise their budget.
10. Pray for missionaries in times of revival. In some countries people are coming to Christ in large numbers. Missionaries need prayer as they disciple new believers.
11. Pray for missionaries in the hard places. In some places missionaries count converts slowly or not at all. They need prayer to preserve in planting the gospel.
12. Pray in the Holy Spirit. Only God knows the needs of the hour. Allowing His Spirit to pray through you may help a missionary win a spiritual battle.

뻔한 스토리이지만, 부부로 사는 것에 대한 절대적 원칙.

[OSEN=오민희 기자] ‘미스코리아’ 이성민과 송선미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발을 내딛었다.

26일 오후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미스코리아'(극본 서숙향, 연출 권석장) 마지막 회에는 함께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는 정선생(이성민 분)과 고화정(송선미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화정의 집에 머물고 있는 정선생은 투박한 손으로 밥을 준비했다. 그는 화정에게 “일한다고 맨날 사먹기만 하면 그게 집이냐. 여관방이지”라고 툴툴거리면서도 “해 줄 게 밥 밖에 없네. 할 줄 아는 게 밥 밖에 없고”라는 애틋한 고백을 남겼다.

이에 화정은 부엌에 선 정선생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밥을 할 줄 알지?”라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고,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밥을 해주겠다는 정선생의 모습에 함박 미소를 지었다.

이후 화정은 동거 사실을 알고 반발하는 김홍삼(오정세 분)에게 “너 밥할 줄 모르잖아. 밥 같은거 해줄 생각 안하잖아. 못하잖아. 그게 중요하더라고”라며 “정 선생님.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 끝이 너무 뻔할 것 같아서 겁났어. 근데 어제 정쌤이 해주는 밥 먹으면서 다른 게 나쁜 게 아니고 달라서 참 좋구나 싶더라”고 자신의 속내를 고백해 여운을 남겼다.

결국 프랑스 유학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화정은 정선생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며 연인으로서 발을 내딛었다.

<뻔한 스토리이지요! 다름을 인정하는 인간관계가 쉽지는 않지만, 꼭 같이 살고싶다면, 다름을 통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깨우고 마음으로 느껴지도록 해야 다름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배려로 성숙한답니다. 오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