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의 회복은?

오해 풀기: 첫 사랑의 회복은 하나님에 대한 뜨거웠던 첫 사랑 회복? NO!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4).

첫 사랑의 회복, 우리가 모두 얼마나 갈망하고 몸부림치는 것인가? 처음 믿을 때, 혹은 성령 체험(?)을 통해 뜨거웠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새벽예배, 철야예배, 부흥집회를 쫓아다니며 부르짓고 결심하고 또 결심해도, 가슴을 뜨겁게 할 신앙 서적을 뒤적여도 처음 사랑은 회복이 잘 안 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받는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과연 하나님에 대한 뜨거움일까? 많은 기독교인이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가슴 설레던 뜨거웠던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항상 뜨거운 사랑이란 허구다. 누구나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못 견딜 정도로 불타오르던 사랑이라도 서서히 식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안다. 뜨거운 사랑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뿐 영원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갈망해도 예외는 없어 보인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풋풋한 가슴 설렘과 뜨거움이 식는 것을 막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엔 없다. 현실적으로 안 보면 죽을 것 같은 모든 것을 다 불태울 것 같던 뜨거움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랑은 아무리 붙잡고 싶은 행복이라도 일시적인 현상이다(이런 사랑 안 해본 사람에겐 미안하다! ^^).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인들이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다른 성경 구절들처럼 서로에 대한 사랑, 즉, 형제자매에 대한 처음 사랑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참조 엡 1:15; 골 1:4; 살후 1:3). 일일이 찾기 귀찮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성경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니 천천히 읽어 보길 바란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엡 1:1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골 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물론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성도 모두를 포함하는 때도 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러나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첫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한 대조 대상이 이단인 니골라 당에 속한 이들의 행위에 대한 “미움”(계 2:6)인 것을 볼 때 에베소 교인들이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성도를 향한 사랑일 가능성이 높다. 이단적인 무리를 미워하므로 올바른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 사랑을 하지 않을 때 바른 교리를 지켜도 문제가 된다. 오늘날 구원파나 신천지를 반대하는 것으로 교회의 순수성이 지켜지고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생각하면 큰 일이다. 무엇보다 성도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받을 때 이는 성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감성적인 설렘이나 뜨거움이 아니라 오래 참아주고 온유하고 친절하며 무례하게 행치 않고 진실함 같은 가치에 기반을 둔 인격적인 사랑일 것이다.

“제발 설교와 기도 시간에 계시록 2장 4절을 들어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말 그만하자. 성경 제대로 알고 전하자!”

“신앙 오해와 진실” 속편 내용 중에서….
계속하여 .

2014-06-30.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이스라엘과 열방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선포(3:9-13)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의 기쁨이 노래되고 있다.

성경본문. 스바냐 3:14-20
한글본문.
14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어본문.
14 Sing, O Daughter of Zion; shout aloud, O Israel! Be glad and rejoice with all your heart, O Daughter of Jerusalem! 15 The LORD has taken away your punishment, he has turned back your enemy. The LORD, the King of Israel, is with you; never again will you fear any harm. 16 On that day they will say to Jerusalem, “Do not fear, O Zion; do not let your hands hang limp. 17 The LORD your God is with you, he is mighty to save.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18 “The sorrows for the appointed feasts I will remove from you; they are a burden and a reproach to you. 19 At that time I will deal with all who oppressed you; I will rescue the lame and gather those who have been scattered. I will give them praise and honor in every land where they were put to shame. 20 At that time I will gather you; at that time I will bring you home. I will give you honor and praise among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hen I restore your fortunes before your very eyes,” says the LORD.

도움말.
시온의 딸(14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3:13), 곧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한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16절). ‘손을 늘어뜨리다’는 두려움과 근심 혹은 낙심으로 인해 손이 아래로 축 처진 상태를 가리킨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이 참된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17절)?
⬇ 아래로 인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14절)?
? 물어봐. 참된 백성들의 과거와 미래는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가(19-20절)?
! 느껴봐. 나는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선지자는 장차 임할 회복과 구원의 날을 바라보며, 그의 백성들에게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을 선포한다(14절). 하나님이 왕으로 그들 가운데 함께하셔서 모든 원수를 쫓아내주실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 사랑하실 것이다.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1:2)는 무서운 심판 선언으로 시작된 스바냐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한다”(17절)는 다정한 사랑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죄를 이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참 이스라엘인 교회는 하나님의 그 고백을 늘 듣는다. 그들은 치욕과 수욕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도, 영원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실 그분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18-20절).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찬양의 고백을 드려보자.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6-29.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다섯 개의 ID카드 5.

간단설명. 주님이 이 세대를 향해 친히 적어 보내신 편지는 바로 당신이다.

한글본문. 고린도후서 3:2-3
2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영어본문.
2 You yourselves are our letter, written o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everybody. 3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Meditation.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세상에 보내신 편지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 세상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당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생은 결국 한 통의 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당신의 삶을 살아 있는 편지지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날마다 펼쳐 드리십시오. 주님이 친히 당신의 삶을 영광스러운 편지로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내용이 많다고 좋은 편지는 아닙니다. 꾸밈이 화려하다고 해서 좋은 편지는 아닙니다. 짧아도, 투박해도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메시지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삶의 편지에 선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직업을 감당하는 이유도, 가정을 섬기는 이유도 바로 그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좋은 메시지가 담긴 삶의 편지가 되기를 주님께 구하십시오. 강력한 메시지가 되도록 주님은 당신의 삶을 풍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들로 담아주실 것입니다.

편지는 마땅히 세상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각 영역으로 배달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친히 적어 두신 수신지가 어디인지 체크하십시오. 당신의 삶의 편지는 과연 어디로 부쳐진 것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정치, 경제, 교육, 예술, 가정, 매스컴, 과학 등 어느 영역에 당신을 보내고 계십니까? 또한 열방 중 어떠한 곳으로 당신을 발송하고 계십니까? 등기우편처럼 그 곳으로 정확히 삶의 편지를 가져가 읽게 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이 이 땅에 보내신 한 통의 편지입니다. 가족과 친지와 모든 세상이 당신의 삶의 편지를 읽고 하늘을 보게 하십시오. 사람과 세상이 하늘의 이치와 법도에 눈을 뜨게 하십시오.

기도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 되어 발송되는 삶의 자리마다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감당케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리진Origns-창조, 진화, 지적설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

or

추천사: 오리진 – 창조, 진화, 지적설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 (IVP)
우종학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과학이 보여 주는 자연 세계는 황홀하다. 100억 년 이상의 시공간에 담긴 우주의 역사나 지구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생물의 세계는 끝없는 감탄을 자아낸다. 자연과 초자연을 혼동한 고대인들이 우상으로 숭배했던 자연 세계의 구성원들은 선명한 인과관계를 통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자연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자연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없다. 신비로운 자연 세계의 존재 그 자체가 어떤 초월자를 어렴풋이 가리키는 셈이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의 시각을 자연 세계 안에 가두어 놓기도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자연주의 세계관은 일상적 경험에 잘 들어맞는 것 같다. 모든 것은 빈틈없이 자연법칙을 따르고, 초월자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과학은 그저 자연 세계의 인과관계를 다룰 뿐인데 초자연적 세계를 부정하는 범인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은 종종 신앙의 적으로 간주된다.
주일학교에 잘 다니던 아이가 더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며 고민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더니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내용은 다 거짓말이었다며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단다.
얼마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분의 남편 이야기도 비슷했다. 미국 남부에서 근본주의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지구의 나이는 1만 년이고 진화론은 거짓이라고 배웠기에 과학을 전공하면서 큰 갈등을 느꼈다. 몇 년 동안 고민하면서 지구가 45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지질학의 주장이 기독교와 모순되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생물진화론은 결국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과학자가 된 그에게 진화는 분명한 사실이었고, 자신이 배운 기독교 신앙과 모순되었다. 결국, 그는 과학을 택하고 신앙을 버렸다. 이런 안타까운 일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걸까?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주일학교가 위축되고 기독교인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 캠퍼스에서는 학생 선교 단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과학을 무기로 종교를 공격하고, 복음의 능력을 보여야 할 교회는 교회 사유화와 세습을 비롯한 도덕적 타락으로 한국 사회에 퍼져가는 반(反)기독교 정서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미국 유학생 수련회에서 만난 어느 젊은 교수는 우주와 생물의 역사를 다룬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창조주의 존재를 깊이 느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과학이 커다란 유익을 주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광대한 우주의 시공간과 다양한 생물의 세계를 보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어지럽다. 과학은 위대한 창조주의 창조 역사를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아이들과 청년들 그리고 지성인들을 신앙의 길에서 밀어내기도 한다. 창조-진화 논쟁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독교의 불편한 관계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거부하고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 어그러진 상황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분명 균형 잡힌 창조 신학 교육이 시급하다.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해서 과학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어리석은 대응은 이제 멈춰야 한다.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석하는 무신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여 준다고 가르쳐야 한다. 창조주는 그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통해 창조를 계획했고 자연법칙을 통해 하나하나 창조 세계를 구현해 왔다.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 다양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문제는 균형 잡힌 교육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과 관련된 주일학교 교육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 과학(젊은 지구론)을 가르치는 일 정도가 고작이다. 목회자나 교사도 사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른다. 과학을 균형 있게 다루는 창조 신학을 신학교에서도 별로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스스로 공부하려 해도 성경적 과학적으로 균형 잡힌 책이나 커리큘럼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오리진>은 균형 잡힌 창조 신학을 가르쳐 주는 저서들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교회에 단비와 같은 책이다. 이 책은 과학과 기독교의 핵심 이슈들에 대해 다양한 과학적 견해와 신학적 견해들을 하나씩 살펴 가면서 창조-진화 논쟁의 지형도를 그려준다. 또한 지구 연대나 생물 진화, 아담과 하와의 기원을 비롯한 혼란스런 주제들에 관해 복음주의 신학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어느 선까지 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준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성경 해석을 자꾸 바꾸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학이 성경보다 우월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염려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다. 분명한 한계를 갖는 과학을 맹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경직되게 읽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이 책의 독자들이 누릴 한 가지 유익은 성경 해석과 과학에 관한 폭넓은 조망이다. 성경 본문과 과학이 일치해야 한다고 보는 일치론적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비일치론적 입장의 다양한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은 창조주와 창조 역사를 바라보는 풍성한 시각을 배울 수 있다.
물론 과학과 신학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이 정도 분량에 담았기에 책의 깊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학적 증거와 신학적 입장을 모두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오히려 혼란스러워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이 바로 독자들을 더 깊은 공부로 이끌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창조의 역사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건전한 창조 신학을 가르쳐 줄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책은 21세기 과학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필독서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나 주일학교 교사는 물론이고, 과학을 가르치는 기독 교사들과 대안학교 교사들도 반드시 탐구해야 할 책이다. 과학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시각과 돌파구를 열어 줄 것이며, 과학적 사고와 과학의 권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자들에게는 변증의 방법과 전략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 과학을 무기로 삼은 무신론자들의 공격이 거세지는 시대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