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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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7가지의 기적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도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쓰인 책입니다. 요한복음 4:46~54절에는 아들의 위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온 한 사람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신하는 사두개인이자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로 여겨진다. 그가 사두개인이라면, 이성의 논리로 자신을 가둔 자였을 것이며, 초자연적인 역사를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에 간절하면서도 절박한 마음으로 아들이 있던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의 30여 킬로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다. 아들이 죽게 된 절박한 위기상황 가운데 있었던 그에게는 체면도, 상황도, 대상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삶에 불쑥 찾아온 위기가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했고, 예수님은 당신 앞으로 나온 그 신하의 아들을 결국 살려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드러난 이러한 표적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를 향하여, 무엇을 신뢰하며,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

첫째, 우리의 믿음은 기적이 아닌 그것을 행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사람마다 주님 앞으로, 혹은 교회에 나오게 되었던 이유와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인생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문제와 어려움 등, 대부분 자신이 직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생고구마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왔음에도 하나님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방법과 과정 등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아들이 죽게 된 위급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오고 은혜를 경험하게 된 신하처럼 말이다. 이렇듯 믿음의 시작은 다양한 동기와 그에 따른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역사 때문에 시작이 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나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점일 뿐입니다. 문제 때문에, 아픔 때문에, 위기 때문에 주님께 나와 그것이 해결되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해결, 표적과 기적들을 찾고 메달리기 보다는 그러한 일을 하실 있는 주님, 오직 한 분 되시는 주님께 시선과 마음을 옮겨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표적과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물을 구하러 온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한 생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죽음에 직면한 아들 때문에 예수님께 나온 왕의 신하가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에드리언 로저스는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믿음을 사용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해 믿음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내가 원하는 것, 표적을 향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주시고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을 향하여 믿음이 성장해 가야 한다.

둘째, 우리의 이성으로 주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예수님 앞에 나온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있었다. 먼저는 장소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려오셔서(v.47)” 라고 요청하는데,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죽게 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장소에 있어야지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는 능력에 대한 선입견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v.49). 아들이 죽고 나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선입견을 품을 때가 잦다. 그래서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는 지금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재촉하면서 우리의 때와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이성으로 주님의 능력의 한계를 정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대해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방법과 시기를 지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제한해야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결국에는 그분의 능력과 방법으로 그분의 때에 주님이 직접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말미암는 선입견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행동)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나아와 “청하였다”(v.47). ‘청하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로타오’ 로서 ‘간청하다’는 의미인데, 이 표현은 진행 중이거나,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모든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아들을 살리기 위해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이 최고의 우선순위가 되어 주님께 매달리는 그를 향해 예수님은 “가라” (v.50)고 말씀하셨다. 그의 믿음이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도록 기회를 주셨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 주님이 제시하시는 명령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으로 행동했다. 순종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결국에는 목격한다. 왕의 신하의 순종, 행동하는 믿음이 아들을 살렸다기 보다는,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하의 믿음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하면 ~해 주겠다”는 순종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역사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행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발걸음을 옮길 것에 대한 요청이었고, 행동을 통한 순종을 통해 주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레와 같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아들이 살아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자신이 예수님을 경험함은 물론 그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의 믿음이 온 집이 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어려운 문제와 장애물을 우리 삶에 끼워 넣으시고, 그 문제 때문에 급하게 주님께 나오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게끔 하신다. 우리의 믿음이 표적이 아닌 그것을 행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성장한다. 우리의 이성으로 주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행동을 통해 순종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디모데성경연구원: 사람을 세우는 사람 3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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