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를 먼저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사실 missiona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해왔다. 근래에 와서 missional이란 표현을 구별하여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missioanary”란 단어가 기능적 측면에서 선교를 교회의 행위로 규정하는데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missional’이라는 단어는 좀 더 존재론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이상훈 2011:9).
즉,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며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선교를 수행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사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앨런 락스버그(Alan J. Roxburgh)는 자신이 ‘미셔널’이라는 아이디어를 1998년 자신이 저술한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에서 처음으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 밝힌다. 그는 (말하기를 앞에서 말한 뉴비긴(Newbigin)의 문제 제기에 대한) 핵심적 질문은 “과연 서구 세계가 회심할 수 있을까?” 였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복음이 직면한 최대의 도전은 더 이상 전 세계의 미전도 종족들이 아니라 기독교 정체성을 급속도로 상실해 버린 유럽과 북미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미셔널’ 탐구의 근본적인 쟁점 중 하나로 제기된 것이었다. ‘미셔널’이 되기 위한 새로운 교회관은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고 이 용어는 급속히 사용되게 되었다(2009:14-15). 미셔널에 대한 락스버그(Roxburgh)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미셔널”missional이라는 말은 북미와 유럽이 일차적인 “선교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미셔널”은 하나님의 선교God’s mission, 혹은 우리가 나중에 탐구하겠지만, 미시오 데이 missio dei가 바로 교회와 교회의 활동을 모두 형성하고 규정해 준다는 뜻이다. 그것은 교회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궁극적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그룹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만일 서구가 복음중심적인 말씀을 상실했거나 다른 가치관들과 타협하고 있는 선교 현장이 되었다면, 이 선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셨던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그 삶에 의미를 주는 신앙 공동체의 중심으로 다시 모셔 들이는데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확실한 증거지만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2009:15-16)
그의 정리를 살펴볼 때,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축소된 복음과 구원관으로 자기 중심적이 되어버린 교회가 처한 현실은 선교현장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는 소비자적 태도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계 안에서, 세계를 통해서, 세계를 위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헌신하며(2009:16), 그것을 소명으로 알고 , 이 일의 성취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이 이 일을 성취하시도록 도우심을 구하며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선교적 삶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을 missional 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보목사의 논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