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세기 유대전통도 기독교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율법준수를 통해?
이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세기 유대교에서 구원이나 믿음의 개념이 지금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교는 율법준수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1) 기독교 개념의 구원은 유대교에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유대인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는 질문을 유대인이 본질적으로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선민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이방인의 경우에야 고민이 필요하겠죠. 할례받고 계명준수를 약속하면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2) 구약과 유대교에서 구원이란 용어 자체가 기독교에서처럼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려움, 질병, 환란, 원수, 죄악 등에서 구출을 받는 개념입니다. 굳이 기독교적인 구원을 말하자면 유대교의 구원은 이방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복을 받고 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내용이 달라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질문은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들에게 민족적 구원상실이란 노예상태, 이방통치를 받는 상태지요. 기독교의 구원상실이 아닙니다. 많은 유대인이 그래서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기대했지요.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지만 유대인 중 다수가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하자 예수님이 오신 혜택은 구약의 약속에 따라 이방인에게로 넘어갑니다.
3) 구약과 유대교에서 믿음이란 개념도 기독교에서처럼 구원과 관련된 신학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로 신실함을 뜻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위와 불가불의 관계지요.
4) 그럼 왜 율법을 준수하느냐고요? 구약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 율법준수란 구원 받기 위하거나 공로를 쌓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백성답게 살기 위한 지침들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도 거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인이 대한민국법을 지키는 것이 한국인이 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대한민국 법을 지키는 것 아닌가요?
<이민규 교수님 펫북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