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천국은 사후 가야할 저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이다.

아래의 글은 Lee MinKyu교수의 글입니다. [아직과 이미의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글에 이어 있는 글입니다.

필자가 처움 신학을 전공하면서 깜짝 놀란 일 중의 하나는 성경의 천국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때 배운 성경구절들 때문에 죽어서 가는 저 천국에 대한 필자의 믿음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당시 구약학 교수가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내용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이 사상은 모세 율법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게서도 계속 나타난다. 바벨론 유수를 거쳐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 그것이 구원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나안 땅에 언약백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이해하여 죽어서 가는 저 하늘 어딘가의 “천국”에 대한 은유로 이해하지 말라고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사는 곳이 천국이다. 물론 구약에는 천국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안나오지만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나오는데 신약의 천국과 사실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그간 상징적으로 보아왔던 본문을 더 문자적으로 믿으라 하는 것에 혼란이 왔다. 구약의 천국은 몹시 현세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웃 국가인 이집트인나 바벨론 사람들이 살아서 온통 죽음 이후의 세계에 큰 관심을 두고 무지막지한 피라미드와 같은 무덤과 온갖 신화에 전 생애를 희생한 반면, 구약은 실제로 지금 여기서 잘살자에 중심을 두어 내세관이 무척 약하다(이방인들에게 이 때문에 무신론자라고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물론 사후 심판이나 운명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의 율법과 신앙은 온통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어떤 충만하고 복된 관계로 살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유대인의 관심은 주로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말씀대로 복되게 잘 사는 것이였다.

물론 점진적 계시를 통해 신약은 구약보다 훨씬 더 많이 사후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에 큰 관심을 둔다. 그러나 그 핵심은 구약과 연속성을 지닌다.그 계시의 내용이 신자들의 몸의 부활이며 세상의 새창조/갱신이기 때문이다. 다가올 세상은 절대 신플라톤적 초월적인 실체인 죽음 이후 이곳을 떠나서 가야 할 “저 천국”이 아닌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후 다가올 영적이고 물리적인 통합적인 세계, 새하늘 새땅이다.

실제로 성경은 영화 “사랑과 영혼” , 그리고 불교의 극락, 수 많은 대중소설에 나오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천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은 그냥 은혜로운 소설일 뿐이니 너무 믿지 말라.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처럼 하늘 환상을 본 것일 수는 있어도,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주님되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발견해야 한다.

P.S. 천국과 하늘에 대한 혼돈에 대하여.
물론 사후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낙원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누가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한 회개한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약속한다(낙원이란 용어는 신약에서 체계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것을 부활 이전까지 대기상태로 설명한다.

성경에 나오는 하늘에 대한 다양한 용어사용을 오해하면 안된다. 예를 들어 (마 6:20)”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에서 하늘은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기를 꺼려한 유대인들이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천국이 아닙니다. 보물을 하나님께 쌓아두라는 말이니다(물론 간접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 있지요.).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보화가 네게 주어지리라는 뜻입니다. 하늘은 주로 영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사후에 관한 질문은 성경에서 애매모호하지만 아마도 하나님 백성의 영혼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에서 몸의 부활 때까지 함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복음 14:2에서 예수님이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할 때 “처소”로 번역된 헬라어가 자주 “잠시 머무는 곳”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초대교회가 하늘을 부활 때까지 대기장소로 이해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지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 후 하나님의 최후심판(그리스도의 심판대)을 거쳐 계시록에서 새하늘 새땅으로 표현되는 완성된 상태의 천국에서 영원한 지복을 누리겠지요. 천사들도 부러워한다고 하네요.

페친 김도현전도사가 인용한 디트리히 본 회퍼의 글도 정말 정곡을 찌른 내용을 담고 있다.

“근동지방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신앙은 구원종교가 아니다(이분법적이고 플라톤적인 영혼구원종교! 필자설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늘 구원종교라고 불리어진다. 여기에 근본적인 오류, 즉 그것에 으하여 그리스도가 구약성서에서 분리되어 구원신화들로부터 해석되어지는 그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구약성서 안에도 (이집트로부터의, 그리고 후에는 바빌로니아로부터의 ;(제 2이사야 참고) 구원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그밖에는 어디에서나 구원 신화들은 바로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반면에, 여기에서는 ‘역사적’ 구원들이, 즉 죽음이라는 한계의 차안(diesseits)이 문제되고 있다고 반박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이다. 구원신화들은 비역사적으로 죽음 이후의 영원을 찾는다. ‘스올’, 즉 하데스는 형이상학이 만들어낸 것(Gebilde)이 아니라, 그림들(Bilder)로서, 그것들 아래에서는 현세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만 그림자같이 현재에 미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기독교에서는 부활의 소망이 선포된다는 것, 따라서 그것에 의하여 진정한 구원종교가 발생하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중점이 죽음이라는 한계의 피안에 있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오류와 위험성을 본다. 이 때 구원이란 보다 좋은 내세에서 걱정들, 곤경들, 불안들, 그리움들로부터의 구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으로 복음서 기자들과 바울이 행한 그리스도 선포의 본질적인 내용이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기독교적 부활의 소망은, 그 소망이 전혀 새롭고 구약성서에 비하여 더욱 예리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이 땅 위에 있는 그의 삶으로 향하도록 지시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부활의 소망과 구별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신화들을 믿는 자들처럼 현세적 과저들 및 어려움들로부터 영원으로 도피할 마지막 탈출로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같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현세의 삶을 남김없이 완전히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십자가에 달렸던 분, 그리고 부활한 분이 그와 함께하며,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또 부활하는 것이다. 차안은 너무 이르게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는 굳게 결합되어 있다. 구원신화들은 인간의 한계 경험들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을 그의 삶의 한 가운데서 붙잡는다.

–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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