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독교인들 다수에겐 기도가 마치 입시생의 공부와 같습니다. 유익도 알고 해야 하는 것은 다들 압니다. 그러나 기도란 재미없고 힘든 공부입니다. 해야 하니까, 안 하면 안 되니까,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많은 이가 기도의 응답만 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입시생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성적을 얻기위해 공부하듯 기도란 기도응답을 결과를 얻기 위해 참고 견디며 무조건 해야만 하는 노동과 같은 것이지요. “열심히 기도해라, 죽기 살기로 기도해라, 무조건 기도해라, 기도가 생명이다.” 다 맞는 말 같지만 뭔가 숨이 막힙니다. 기도를 율법주의자처럼 하다간 잘못하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기도생활이 “해야 하는데”라는 중압감 때문에 오히려 죄책감만 더 만듭니다.
사도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성경에 남긴 본인도 늘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그가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했다면 아마도 지쳐서 어느 순간 탈진되었을 것입니다. 기도생활의 굴곡이 심했겠지요. 기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잘하는 길은 신명 나게 즐기는 것입니다. 클럽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돈을 내가며 밤새 춤을 추고 노는 것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들은 무슨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 분위기와 사람들과 어울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자체를 즐깁니다. 즐거움을 누리는 과정이 목적입니다. 그런 곳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에겐 그런 상황이 정말 참고 견디기가 고통스러운 일이겠지요.
기도는 위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위해 목표와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엔 새벽기도를 일 주일간 해야지,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해야지.” 그런 것 세우지도 생각하지 마세요. 무엇을 이루기 위한 기도의 목표를 세우면 세울수록 삶은 고달파 집니다. 그냥 하세요.
기도는 무슨 목적을 세우고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그런 노동이 아닙니다. 즐겁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기도응답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로 이미 응답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즐기게 되면 기도 시간에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렇게 기도하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빨리 가장 크게 응답받게 됩니다. 정말 이 세상 안에서 신비한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닌 경지, 천국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주가까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되죠. 정말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작은 양의 음식을 맛을 보고 좋다고 하면서도 막상 대부분 물건을 사지 않는 것과 같이 기도의 복을 조금 경험하고 좋다고 하지만 기도의 깊고 놀라운 신비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즐기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즐거우면 결과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빨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신이 변하고 기도응답의 좋은 결과를 맺는 방법은 기도 자체의 즐거움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노동이 아닙니다. 기도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기도를 의무로 강요하는 율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기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바르게 훈육하기 위해 목회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올바른 기도생활을 위해 목회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좋은 코치가 없이 좋은 선수가 나오지 않는 법이지요. 그래서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교인들에게 로또 당첨보다 더 큰 복입니다.
목회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먼저 목회자 자신이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기도가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며 자신이 변하고 좋은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열매들을 교인들이 보면 다들 따라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둘째, 기도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기도를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하는 사람들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목회자가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신학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계속하여…
<Min Kyu, Lee 교수님의 펫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