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스, 단 한 사람을 위한 복음서> / 김명섭 지음 / 샘솟는기쁨 펴냄
성경 읽기의 혁명성
“성경을 읽고 혁명을 꿈꾸지 않는 자는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성경 읽기의 혁명성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성경 읽기를 이처럼 명확하게 정의한 문장은 읽어 본 적이 없다. 성경은 위험한 책이다. 치명적인 예리함과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약 이후 세계사는 곧 기독교회사다. 성경의 재발견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기가 되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는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모든 성경을 불태우려 했다. 성경을 없애면 기독교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과 성경을 바꾸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성경에 있었다. 불멸의 로마제국을 뒤흔들었던 초대교회의 힘은 성경 읽기에 있었다.
중세는 어떤가? 교회사가들은 중세를 암흑기로 정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중세는 왜 암흑기가 되었는가. 여러 측면을 고려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는 교인들에게서 성경 읽기를 금지시켰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금했다. 종교개혁 시기는 혁명의 시기다. 어둠의 시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이유는 성경 읽기에 있었다.(122쪽) 루터는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으며,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관점을 깨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되돌려 주었다. 블로흐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명징(明澄)하게 드러났다.
미련하리만치 성경 읽기에 몰두하고, 진정성 있는 성경 읽기가 신자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믿는 한 사람이 있다. 2003년 외진 소도시 강릉에 교회를 개척하여 성경 중심의 목회를 이끌어 가는 김명섭 목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어느 독자는 ‘이 책은 오늘날 타락한 교회 지도자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던진 돌직구와 같다’고 한다. 교인들에게 길들여진 변형된 메시지가 아니다. 거친 들에서 쏟아 내는 케리그마다. 현대 교회의 침몰은 “교회 안에서 성경이 읽혀지지 않기”(17쪽) 때문임을 간파했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 본질은, 성경을 읽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들을 뿐 적용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말씀을 읽지 않는다. 실로성경이 교회에서 침묵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교회는 ‘말씀 읽기’를 잃어버렸다.”(158쪽)
세상의 포로 된 그리스도인
더 이상 종은 없다. 현대인들은 원하는 대로 욕망하고 즐기며 살아간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산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자유라 하지 못한다. 자유와 탐욕은 엄연히 다르다. 자유와 종속은 결코 같지 않다. 고대적 의미의 종은 타자가 또 다른 타자를 종속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종은 탐욕과 방탕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옥죄고, 눈치챌 수 없는 강압이 짓누른다. 방탕의 종, 탐욕의 종, 돈의 종, 쾌락의 종이 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제자반 졸업, 큐티 학교 수료, 교사 대학 수료증. 수많은 공부를 하고 갖가지 프로그램을 수료했지만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한 무능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새벽 기도와 금요 철야, 산상 기도회 등 셀 수 없는 기도회를 참석해도 남편과는 여전히 별거 중이다. 금식과 침묵을 단행해도 회사의 이중장부는 아직도 그대로다. 세상은커녕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장애 신자가 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 세기만에 천만의 성도를 자랑하던 한국교회가 불과 십여 년 만에 몰락의 조짐을 보이고, 급속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을 잘못 읽은 탓이다. 초대교회는 위기와 핍박 속에서 풀처럼 자라 갔다. 밟히고 잘려도 뿌리에서 다시 새순을 내어 자신의 후손을 퍼뜨렸다. 그들의 생명력은 바로 성경에 있었다. 성경은 위험한 책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때론 모욕을 당하고, 때론 비판을 받아야했고, 때론 오명을 써야 하고, 때론 전 재산을 반납해야 했고, 때론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해야 했다. 성경은 그것을 요구했다.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벌벌 떨면서도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모든 신분과 계급, 성과 종족을 뛰어넘어 예수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불렀다. 성경이 그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그 요구를 기꺼이 수용하고 삶으로 증명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유혹 앞에서도 초연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불신자들이 감명을 받았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나도 저들(그리스도인)처럼 살겠다”고 서약했다.
김명섭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성경 읽기에 실패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다. 성경 읽기의 회복이야 말로 초대교회의 야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강릉에 예향교회를 개척하여 독한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성경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도전받지 못한 성경 읽기는 우상숭배와 일반이다. 성경은 우리가 가진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진리를 향해 일어서라고 끊임없이 도전한다. 숨겨진 죄악을 드러내고, 은밀한 탐욕을 발가벗겨 버린다. 누가는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온 세상에 군림하던 승자 독식과 약육강식으로 무장한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24쪽)임을 간파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닌가.
“누가복음은 이와 같은 이단과 박해 속에서 ‘기독교는 과연 믿을 만한가?’라는 의문을 품고 씨름하던 데오빌로들을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누가복음은 거대한 물줄기와도 같은 성공과 번영이라는 우상숭배,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힘과 권력이 다스리는 세속적인 흐름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내부적인 이단에 의해서 타락한 복음의 본질을 회복시키라는 진지한 응답이자, 외부적인 박해로 인해 배교하는 데오빌로들을 향한 변증이었다.”(25쪽)
그렇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수신인인 데오빌로다. 핍박과 유혹 앞에서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누가는 그러한 이들을 위하여 누가복음을 기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징(明徵)하게 드러내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규명(糾明)한다. 두려움과 의혹으로 인해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과 담대함을 주고, 안일하고 무책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라고 촉구한다. 그렇다. 먼저 믿음을 굳게 하고,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돈시돈 불시불이라 했다. 어떻게 읽느냐는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한다. 진부하게 읽지 마라. 수동적으로 읽지 마라. 창조적으로 읽고, 능동적으로 읽어라. 성경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도전도, 위로도, 기쁨도 없다면 당신은 영적 나병에 걸린 것이다. 말씀은 예리하고 날카롭다. 조심해 다루지 않으면 심한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깨어 있다는 증거요, 아직 감각이 살아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이다.
다시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감리교 소속 목사다. 용감하게 글을 썼다. 감리교 안에 있던 금권 선거를 꾸미지 않고 고발한다. 성경을 읽으라 한다. 읽고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아가라 한다. 모양만 비슷한 짝퉁이 되지 말고 진정한 명품이 되라 한다. 경기를 즐기는 관중이 되지 말고, 피땀 흘려 대가를 지불하는 선수가 되라 한다. 결정적 순간에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 목자가 되지 말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가 되라 한다.(236쪽)
세상이 당신을 변화시키게 할 것인가. 당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답은 ‘성경 읽기’에 있다. 부디 혁명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자, 이제 선택하라!
<정현욱 / 로고스서원 연구원, 반석교회 부목사, 부산극동방송 ‘책과 음악의 행복한 만남’ 진행>
<뉴스 엔조이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