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문화와 동떨어지고 상당히 다른 가치관이 지배하는 현대 문화에서 성경을 읽을 때 오해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는 본인의 졸저 “신앙, 그 오해와 진실”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은혜다. 현대인이 이해하는 은혜의 개념은 조건 없는 선물이다. 이는 서구를 지배하는 칸트철학 이후 “올바른 윤리에 따른 동기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명제 때문이다. 베풂에 있어 우리가 수수하게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할 때도 “순수함”과 “조건 없음”은 거의 동일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는 관계 지향적 집단주의사회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가치이다. 사실 오늘날도 이런 순수한(?) 조건없는 행위란 존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선물”일 것이다. 고대 사회로 부터 선물은 여성의 마음을 사기위해 보호를 받기 위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바쳐저 왔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도 치밀하게 계산을 한다.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행동은 나쁜 것이 아니다. 효를 행할 때도, 이성간의 사랑에도, 친구간의 우정에도 무엇인가 얻으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얻고자 하는 것이 고차원적인 보상인가 아니면 저차원적인 보상인가가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결정한다.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도 그 위대성은 물리적인 보상이냐 자기 스스로 느끼는 고차원적인 정신적 보상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보상이 없다면 인간은 행동하지 않는다. 즉 이타심이란 조건 없이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가치에 근거한 행동이다. 사랑을 키워가는 길, 따뜻한 마음을 실현하는 삶이 훨씬 행복한 길임이 부정될 때 사랑을 키워나갈 이유가 없다.
성경에서 은혜는 고차원적인 가치의 투자다. 여기서 투자란 베푼 것에 대한 기대가 있고 반응이 의무적이란 뜻이다. 고차원적이란 말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기대가 중심에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영광을 받기 위함이기에 무조건적이지 않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신 이유도 우리가 그분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그 반응이 없을 때 그 사랑은 무효화 된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신하의 비유에서도 보라. 무조건적인 탕감은 없다. 큰 탕감의 목적은 다른 이를 탕감해 주라는 것이 동의되어 있다. 그렇지 못하면 왕의 탕감이 취소된다. 인간에게 기대없는 순수한 동기란 가능한 것이 아니다. 기대없다는 것이 순수한 동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적 발상일 뿐이다. 순수하신 하나님도 베푸실 때 기대가 많으시다. 성경의 문화에서 은혜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은혜란 자격없는 자와의 관계맺음을 위해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다. 이런 차원에서 은혜는 투자다. 고품격 가치투자!
하나님이 나를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셨다고? 성경에 그런 것은 없다. 그분의 사랑을 수용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물론 사랑과 은혜는 “계약”이 아니다. 상업적인 계약과 달리 동등 가치교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상호교환을 의무로 하고 있다. 어떤 가치와 차원에서든 상호교환의 기대가 없는 사랑, 은혜, 선물이란 없다 . 남자가 호감가는여자에게 선물을 줄 때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사귀자는 초대이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이와 같은 선물이다. 은혜는 관계맺음을 위한 초대다. 조건없는 사랑이나 은혜란 성경적이지 않다. 이유없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이란 없다. 은혜도 마찬가지다.
P.S. “남녀간의 가장 흔한 거짓말은 무조건 사랑한다는 말이다. 뭔가 얻는게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 보상이 고차원적일 수록 가치있는 것이다.^^”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