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이후 기독교에서 자유주의 및 진보 교회의 성장은 정체된 반면 복음주의 및 보수 교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성장의 열매를 소수 목사 및 대형 교회가 독식하고, 이들이 윤리의식 부재로 끊임없이 부패 스캔들을 낳으면서 한국 기독교에 큰 짐이 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 교회들이 오직 말뿐인 믿음만 강조하고 실천적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한 결과다.
고 옥한흠(1938~2010) 목사는 지난 2007년 암 투병 중 서울 상암동에 10만여명이 운집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집회’에서 “한국 교회는 미신화되고, 개인화되고, 탈역사화되었다. 가장 큰 정치집단이 되었지만, 기득권자들의 편에만 서 있는 가장 보수적이고 반성경적인 집단이 되었다”며 한국 교회에 사망을 선고했다. 제자도 훈련을 통해 목사와 신자 교육에 가장 앞장선 그 자신의 방식도 실패했음을 사실상 자인한 것이었다.
믿음과 행동 가운데 한쪽으로만 치우친 근본주의 신학에서 벗어나 1974년 로잔 언약 등을 통해 신앙과 삶을 동시에 추구한 중심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지난 4월 말 복음주의 진영의 양심적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모여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을 창립한 것도 이런 노력이다.
이런 한국 기독교에 큰 영감을 준 인물이 레네 파딜랴(82) 목사다. 그는 복음주의 진영의 지침으로 통하는 로잔 언약에 ‘사회적 책임’을 명기하도록 한 인물로,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창시자로 꼽히는 학자이기도 하다. ‘통전적 선교’는 선교를 ‘비기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전도하는 것’에서 ‘전체적인 사회 구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세 확장만 꾀할 뿐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방기한다는 마르크시즘과 해방신학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면서 이에 맞서 기존의 선교 개념에서 ‘사회적 복음’을 강화한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한적한 마을에서 수많은 사역자를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길러낸 카이로스 센터에서 그 대학자이자 노목사를 만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에콰도르였다.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종교 탄압을 피해 에콰도르로 이주한 부모를 따라간 그는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란 부모의 근본주의 신앙 속에서 자랐다. 그는 에콰도르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근처의 명문 사립대학인 휘턴칼리지에서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국제학생운동에 가담해 라틴아메리카 책임자로서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페루, 베네수엘라 등을 다니며 학생운동을 했다. 휘턴대학 동창으로 그와 결혼한 ‘카탈리나 파딜랴’(카티)는 라틴아메리카 사역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였다. 그 미국인 부인과 4년 전 사별한 파딜랴 목사 곁엔 얼마 전 콜롬비아에서 변호사를 하던 베아트리스가 함께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파딜랴 목사가 대학 시절 연애담을 들려주자 베아트리스는 노트북을 켜 파딜랴와 카티가 다정하게 찍은 옛 흑백사진을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침례교신학대학(IBBA) 교수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침례교회에서 목회한 파딜랴 목사는 1980년대 카이로스센터를 설립해 구체적으로 가정, 일터, 사회,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적 책임과 윤리를 다할 것인지 설파하는 130여권의 책을 출간하고 남미 곳곳에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내는 이들을 길러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원한다.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노목사는 자비스럽고 평화로운 영성이 넘치면서도 말엔 강단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은 소리만 요란하고, 허공에 떠도는 것 같은 공허한 소리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성서를 보라. 이사야서 58장, 미가서 5~6장 등 수백번씩이나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수백번이나 착취와 억압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믿음과 행위에 대해 더욱더 분명히 말했다. 그는 “행위로 인해 구원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선한 행실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설명했다.
“야고보는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진정한 믿음은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예수께서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은 이를 보여주라는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직설적인 명령이다. 디모데전서에 얘기한 것처럼 ‘너의 선한 행실로 빛을 발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의 행실로 너를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믿음의 결과는 선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실을 한다는 것은 선택적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그는 또 “성서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수천년 전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성서를 현장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서 지식을 축적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 가정, 일, 사회, 교회에 어떻게 성서의 정신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할 것인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그는 “신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현하게 하는 게 신학”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