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의 역사도, 일제식민통치나 6·25전쟁 등에서의 처참한 살인과 폭력과 억압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은 수학처럼 상황과 관계없는 불변하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는 실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분이심을, 그분이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20세기의 지옥인 처참한 아우슈비츠의 역사도, 부조리한 우리 삶의 역사도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묵인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말일까? 이렇게 참혹한 악의 역사가 예정된 것이라면 과연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이르러 신학은 모든 세상사가 결정론적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사를 결정론적인 인과율의 그물 안에 묶어두는 그런 신은 더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기도 어렵다.

그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이해된 예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조차 파괴해 버린다. 더구나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세상사를 예정해 두셨다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우리도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원 전에 세상사가 다 결정되어져 있다면 이제 하나님은 하실 일이 없지 않은가. 그분은 영원 전에 프로그램화된 세상사가 그대로 일어남을 그저 관망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더구나 오늘날의 신학은 하나님은 억압자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의 편이시며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편이심을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생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이 뒤틀린 역사를, 지옥으로 치닫는 역사를 해방의 역사, 화해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돌려 놓으신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절망과 좌절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희망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부터 신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창조세계 돌보심을 표현하는 용어로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했다.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따르면 창조는 태초의 창조, 계속되는 창조, 마지막 창조로 구분된다. 섭리는 계속되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보존하시며 이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우리는 동참한다. 이를 협동(concursus)이라 표현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섭리는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는 피조물의 기도와 실천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정론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예정이나 예지하심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하는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도 결정론적이거나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새로움의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창조적 의지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은 생명의 충만과 해방을 뜻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명령의 성취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된 피조물이 그분을 닮아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살리며, 충만한 생명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피조세계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반목하고 서로를 지배하고 억압하며 반생명적인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이 우리 민족에겐 일제식민통치와 6·25전쟁으로 숱한 역사의 질곡으로 경험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이러한 지옥의 현실 가운데서도 신앙은 굴하지 않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섭리, 그분의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붙잡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과거적 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붙잡아야 할 미래이며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뜻 없이 무릎 꿇거나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다. 도리어 생명과 창조의 역사를 향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