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다 예정된 것이라고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장로교의 영향이 막강하다. 장로교의 영향 때문인지 많은 교회에서 예정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곤 한다.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민감한 부분인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나 알베르 카뮈, 그리고 사르트르 같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즉 신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신학사에는 예지라는 단어도 등장하고 예정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엄밀하게 분석하면 두 개념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바꿔 사용해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예측은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예지하신 일은 예정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지는 곧 예정이다.

하나님의 전능을 고백함으로써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파열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지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지된 그 사건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어난다. 하나님은 예지하고, 예지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의 원인은 자유의지에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보자. 고수와 하수가 바둑을 둔다. 고수가 계획적으로 한 수를 둔다. 하지만 하수는 그 계획을 알 리가 없다. 고수는 자신이 이렇게 두면 하수가 저렇게 둘 것을 알고 있다. 예상대로, 틀림없이 하수는 그렇게 둔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보다 훨씬 수가 높으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예지하신 바대로 그렇게 한다. 그에 따르면 예지하시는 하나님은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예정과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두기보다는 자유의지를 행사한 인간에게 두고자 했던 것이다.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논쟁은 중세신학을 넘어 종교개혁자들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루터는 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중세신학의 골치 아픈 논의에 철퇴를 가하며 그의 ‘노예의지론’에서 죽음과 저주, 재앙도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다고 못 박았다. 칼뱅도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 살인자나 행악자, 범죄자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렇게 모든 일에 예정을 앞세울 경우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라 악한 존재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사람이 라이프니츠였다.

그는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라고 전제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앞으로 창조될 수 있는 세상들을 요즘 말로 하면 시뮬레이션을 해 본 후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바로 지금 이 세상은 가장 좋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설령 이 세상에서 이해 불가능한 악을 경험한다고 해도 이 악은 가장 좋은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에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나 리스본 시민의 3분의1 가량이 죽고 85%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예정을 앞세운 기계적인 낙관론은 현실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빗대어 ‘캉디드’라는 풍자소설을 발표해 예정론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칼뱅이 예정론을 처음 강조했을 때 그는 예정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쫓겨난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가톨릭교회는 너희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선택하셨다고 설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딱지를 무책임하게 붙인다면 귀중한 신앙적 고백은 또다시 비웃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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