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의 탄생을 묵상하며: 누가복음 중심으로]

아마 여물통에 누워 있는 것이 이 아이가 장차 살아갈 운명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가난, 고독, 배신, 그리고 젊은 나이의 죽음이 그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가난한 탄생,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 그럼에도 이 아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삶을 산 분이었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행했고, 자유로웠으며 진리로 충만해 있었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셨다.

그런데 제사장과 랍비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인류 구세주의 탄생을 예감하지 못했기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알아보고 찾아와 기뻐하며 경배해야 할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가? 성경지식이 부족해서,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정성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기도가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기엔 너무나 종교적 거짓 열심과 독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진리의 가면을 쓴 채 기득권을 지키며, 현실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이처럼 초라한 아기 예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구유에 누인 아기의 참 존재를 알아보고 경배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양치기들이었다. 양치기는 결코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당시 양치기는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경멸하던 부정하고 천박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났다. 제사장도 아닌 우리 같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느냐고 생각했던 그들의 고정관념이 모두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천군 천사들이 그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일러주고, 한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라는 내용이었다(2:14)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이 노래는 아우구스트 황제가 태어날 때 헌정된 찬양 시와 흡사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na)라는 제단 안에 있는 기원전 9년에 세워진 프리네(Priene) 비석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신은 우리의 삶을 위해 가장 완벽한 선을 창조하였다. 그(아우구스투스)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덕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와 우리 후에 올 사람들을 위해 전쟁을 끝내고 모든 것을 확립하실 구원자를 보내 주셨다…. 그리고 그 신(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은 그의 도래를 통해 복음(Good News, 유앙겔리온)이 이 세상에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해주는 날이었다.”(Orientis Graeci Inscriptiones Selectae, 2:458, N. Lewis & M.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II. New York: Harper & Row, 1955, 64에서 인용).

정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탄생이 복음이고 온 세상에는 참 평화가 도래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평화일 뿐 양치기들의 평화는 아니었다. 삶은 계속 고달프고 주위에는 지주의 횡포로 노예와 거지로 전락하는 소작농들과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웃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사실 아무리 보아도 그가 이룩했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폭력과 전쟁, 수많은 노예의 피로 얼룩진 가짜 평화일 뿐이었다.

그런데 천사의 노래는 양치기들에게 강한 전율로 다가왔을 것 같다. 정말 그 아기가 진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평화를 줄 존재일 것만 같았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비천하게 태어난 이 아기야말로 왕궁에 있는 황제보다 그들에게 진짜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이나 제사장이 아닌 양치기들이 메시아께 처음으로 경배한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 아이의 운명은 기구했다. 아마도 진리는 외롭고 험난한 길 속에만 있나 보다. 엘리사벳, 시므온, 그리고 안나와 같이 가난한 백성이지만 영성이 살아있던 이들만이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 아이는 온 인류의 빛이 될 것이라 말했다(눅 2).

뜻밖에 무지렁이로 천대받는 이들은 그의 가르침에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영적 엘리트라 주장하는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뿐만 아니라 회당예배 때에도 그의 가르침을 환영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 그가 세상의 정치나 제도화된 종교에는 존재할 수 없는 진리의 빛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그 역시 성전의 제사나 회당의 예배보다는 오히려 거리와 장터, 호숫가나 들과 산을 더 편안해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지도자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먹기를 탐하는 자요 술꾼”(눅 7:34)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지렁이(무리 oklos)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에게 진리를 강연하는 삶을 더 좋아했다(눅 15:2).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들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자와 죄인들이 더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신앙이란 교리적 고백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삶에 있다는 것이다. 정통적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강도 만난 이를 도운 비정통 출신의 사마리아 인이 오히려 영생의 길을 걷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말이다(눅 10:30-37).

떠돌이 방랑자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소유도 별로 없이 무보호의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헌신한 사람이 되면 참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누가 이해할까! (마 6:1 눅 6:24-25). 왕궁의 좋은 침대가 아니라 구유에 누인 불쌍한 아기, 참담한 운명을 맞아야 하는 이 아기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했던 사람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성탄절 날, 이 아기의 모습에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행복은 참된 진리 속에 거하는 삶에 있음을 배워야 하리라.

오늘날 우리는 신성을 숨기고 온 이 아기를 얼마나 경배하는가? 오늘날 돈이 전부가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와 안정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과연 이 아기를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경배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탄절을 앞두고 숙연해진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우리 인생이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하며 숙연해졌으면 좋겠다.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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