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한 구원일까요?]
1.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에 ‘예스’ 아니면 ‘노’로 답을 원합니다. 즉, 정확한 교리를 원하지요. 하지만 유대교가 교리주의에 관심이 없듯이, 신약의 저자들도 교리주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의 질문의 답은 ‘예스냐 노냐’가 아닙니다.
2. 성서의 저자들은 현대 서구인들이 아닙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성서를 읽고 해석할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자유의지’와 같은 몇 가지 가르침을 제외하면 체계적인 교리적 정립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고요.
신약의 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성삼위일체 교리, 구원론, 신론, 교회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매우 후대입니다. 이방신자들이 늘어나면서 헬라철학을 사용하여 이를 설명하기 시작하지요. 신약저자들은 이런 교리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치밀하고 모순 없는 가르침으로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유대인들이 교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세시대에 마이모니데스가 정리한 13개 교리 이후입니다. 이 역시 중세 기독교의 영향력 때문이었지요. 이 13개 교리에 대하여도 치밀한 설명을 하려들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에 관해 오토독시(정확한 교리)보다는 오토프락시스(정확한 실천)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치밀한 교리가 아니라 치밀한 실천에 관심을 더 보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예수님과 논쟁할 때도 교리보다는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가’에 대한 행위들에 대한 이견이 많았지요. 그들은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4. 신약성경의 내용 역시 이런 영향으로 치밀하고 정확한 교리를 정립하고 체계화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적 의미, 절대적 잣대, 빈틈없는 교리보다는 관계성을 절대화합니다. 의, 구원, 칭의, 죄, 은혜 등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수치화, 규격화, 범주화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5. 하나님은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올바른 관계를 원하시지, 가르침을 규격화, 범주화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냄새 나시는 하나님이시죠. 자비롭고, 봐주시고, 따뜻하시죠.
6. 히브리 방식은 이원론과 획일화를 싫어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서구인들이 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화하려 든다고 비웃을 거여요. 하나님까지 규격화하려 들고 구원방식도 규범화한다고요. 사복음서가 있는 것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를 함께 선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때론 헬라인들이 볼 때는 완전히 모순되는 내용을, 히브리인들은 동시에 맞는다고 수용합니다.
7. ‘100% 은혜냐 100% 믿음이냐?’ 이런 질문을 들으면 바울이 ‘껄껄’ 웃을 것 같아요. 그런 질문들 앞에 ‘참, 할 일도 없다’고 비웃을 것 같아요. 유대식 세계관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왕이면 1000%라고 하지 왜 하필 고작 100%냐고 비아냥거릴 거여요.
관계를 어찌 수치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구원, 언약, 사랑, 은혜를 교리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이는 우리의 관심일 뿐입니다. ‘천만 배 사랑해’란 표현이 수치일까요?
8.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냐?’ 이런 질문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신약은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교리적 접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자가 없고 끝까지 지켜주신다’와 ‘인침을 받은 자는 마지막 때까지 다 보호함을 받는다’고도 말씀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을 지켜내라’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라’라고도 합니다. 문자적인 교리로 만들기엔 모순이 생기지요.
9. 신약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그리 강조해도 믿음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은 태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어머니 뱃속에서 뛰노는 모습으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의지와 정반대로 구원과 소명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려는 의지가 꺾인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인간의 믿음보다 앞서는 예정설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이런 방식으로 구원과 소명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우리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관계는 규범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지요.
신약의 저자: 그럼요 당연하죠.
# 예외는 없나요?
신약의 저자: 왜 없겠어요. 그야 하나님 맘이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죠.
10. 사람들은 성경을 참으로 문자적으로 읽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을 무슨 정확하고 치밀하게 길을 알려주는 매뉴얼처럼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묘사들 중 다수는 뭉뚱그림으로 쓰였고 매뉴얼로 사용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치밀성이 없습니다. 저는 문자적으로 믿고 성경대로 해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명령 그대로 목숨을 걸고 좁은 길을 가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식구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문자적인 가르침일까요? 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기독교인 중에도 얼마나 있겠습니까?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지혜로운 행동원리들이지, 규정과 교리 혹은 치밀하게 법으로 정할 수 있는 가르침들이 아닙니다.
11. 아버지가 불효하는 아들에게 ‘호적에서 파버리겠다. 나가 죽어라.’ 하고 야단치며 과장된 호통을 칠 때 이는 문자적으로 알아들을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도 이런 과장법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12. ‘구원을 잃을 수 있나요?’ 관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인간의 입장에서도 누구나 끊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맘이죠. 신약은 수많은 구절에서 구원의 상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누구나 돌아오면 다 받아주시고 구원의 길에 동행해 주십니다.
13. 구원의 길은 히브리 방식에 따라, 규격화되어 있지도 빈틈없이 교리화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살아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냐?’ 이런 질문이 교리에 관한 것이라면 성경은 답할 가치를 못 느낍니다. 초대교회는 주로 이스라엘의 운명이나 이방인 공동체에 관한 질문은 합니다만, 개인의 구원의 확신과 상실에 대하여는 교리적 질문을 던지지도 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불순종의 대가를 당연히 전제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는 성도라면 구원의 상실에 대한 위험을 알아야 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성도라면 주님이 구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 결론:
– 하나님의 인자는 끝이 없지요?
– 신약의 저자들: 그럼요!
– 저는 의지도 연약하고 구원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 신약의 저자들: 염려마세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니 반드시 지켜주실 거여요.
–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까? 배교하고 아무렇게나 살아도요.
– 신약의 저자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하나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그런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신약에서 영원한 구원은 교리가 아니라 관계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P.S. 교리화를 반대하거나 버리자는 뜻이 아니라 택견을 발레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교리화하기엔 너무나 히브리적인 책입니다. 다만 현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리의 유익이 많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만 한계를 알아야지요.
굳이 교리화한다면 신약의 저자들은 칼메니언주의자들일 것입니다(칼빈주의 + 알메니언)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