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즐거운 훈련으로 지속될 수 있습니다. 3]

<아래의 글은 Lee, Min Kyu 교수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도 예배 마치고 기도실에 들어가 잠깐의 기도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세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평화와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세 시간씩이나? 그 시간이 짧다고? 자기 경험에 따라 긴 시간일 수도 제가 상대적으로 의지가 대단하거나 침을성이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는 정말 짧은 시간이었고 저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은 결단코 아닙니다. 힘들지 않았냐고요? 언제부터 이렇게 기도하느냐고요?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삶의 허무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점차 그 환희를 누리기 위해 하다 보니 기도란 제게 가장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저희 형님은 골프 마니아입니다. 마니아(maniac)란 영어표현은 “광적인 열중이”란 뜻이지요. 한마디로 미친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 필드에 나가고 온통 골프 생각입니다. 한국에 잠시 방문해 TV를 봐도 골프채널만 봅니다. 그 바쁜 중에도 시간을 억지로라도 내서 남들이 다 자는 그 이른 새벽부터 종일 필드를 돌아다니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형에게 골프는 고된 일일까요? 아닙니다. 골프를 잘 칠까요? 네, 당연히 준프로급입니다. 과정을 즐기니 결과도 좋은 것이죠.

저도 이 느낌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등산과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몇 년 전에는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공릉 능선을 거치는 설악산 종주를 했습니다. 새벽 두 시에 한계령에 도착하기 위해 저녁 8시에 집에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앉은 채로 잠을 자야 하니까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벽 두 시에 출발, 대청봉에서 잠깐 “야호”를 한두 번 부른 후 하산하기 시작합니다. 다음날 오후 5시나 돼서야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힘들었을까요? 14시간 이상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험산준령을 다녀와 보세요. 잠 못 자서 피곤하고 나중엔 무릎관절에 열이 나서 찬물로 식혀가면서 걸었습니다. 힘드니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힘든 것 역시 저에겐 즐거움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력이 약하고 꾸준한 산행훈련이 되지 않은 초보자에겐 이러한 일은 피곤울 넘어 살인적인 고통일 것입니다. 다녀오면 천만 원을 준다 해도 도저히 못 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들 추워서 밖에 나가기를 꺼리는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북한산 인수봉을 가볍게 산책 삼아 다녀오는 저 같은 사람은 돈을 내고 다녀오는데 말입니다. 올라가면 배낭 안의 물이 꽁꽁 얼어 마시지도 못합니다. 칼바람 부는 산꼭대기의 체감온도는 영하 25도 정도 됩니다. 이 고행 같은 미친 산행을 왜 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미쳐야 합니다. 이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산 정상만 바라보는 사람에겐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도에서 오는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산행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기쁨과 같은 것일까요? 다릅니다. 사실 이것은 감정적인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기도의 기쁨은 관점의 변화에서 오는 평화로움과 환희입니다. 그냥 심리적인 긍정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안이 열러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의 체험이죠.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의 가슴은 내가 주인 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분을 만날 때 누구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화와 기쁨, 안전의 포구인 주님을 만나 그저 불안 초조하고 걱정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이것은 노력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입니다. 그리고 불만 가득했던 내 현실도 온전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니 감사가 넘칩니다.

십여 년 전 아직 한창이실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가 기억납니다. 저는 당시 하나님을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저는 십 대 때부터 오랜 외국생활을 하였기에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귀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어머니를 데려가신 것이었습니다. 제 설교를 처음 라이브로 들으시고 으쓱으쓱 자랑스러워 하시던 모습, 학교에 교수로 청빙 되어 기뻐하시던 모습도 잠시 저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더한 일도 많습니다.

저는 불행한 관점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불행과 행복은 관점 차이입니다. 좋은 환경도 옛사람의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불행이고 힘든 환경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행복입니다. 지금 저는 일찍 돌아가셨어도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직 젊은 나이에 백내장 수술을 하여도 지금까지 잘 보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원칙적으로 힘들어도 불행할 필요는 없고요, 그 무엇도 우리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빼앗긴다면 그것은 사탄 마귀 때문인 미혹된 마음 때문입니다. 그냥 숨을 쉬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고 죽는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본질에서 환경의 변화보다는 모두 관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제 인생에 가장 큰 관심은 기도입니다. 요즘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사역하시려고 제게 주신 소명이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러나 제가 기도에 관해 읽은 책은 열 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기억나는 책도 사실은 없습니다. 누가 좋은 책이라고 읽으라고 가져도 줘도 몇장 읽다 맙니다. 그런데 제 가장 큰 관심은 기도입니다. 저는 기도가 책을 읽어서 이해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학자입니다. 물론 적당한 이론이 필요하지만 저는 기도의 영성이 “기도학”과 같은 신학적 탐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안을 여는 길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말씀”은 그냥 우리의 육안이 아닌 영안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라보면 관점이 달라집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관점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입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든 노동도 아닙니다. 가장 쉬운 길입니다. 때론 힘들지 않냐고요? 저는 아직 아니지만 기도의 고수들은 이런 질문에 힘든데 쉬는 것이 힘드냐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육을 가진 우리가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때대로 힘들지 않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의 의미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에겐 기도는 힘든 것 그 이상입니다.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훈련이 되고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나 기도의 놀라운 보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도에 관해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성경에 관심이 덜하거나 왜곡된 문자적 해석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기쁨은 어느 정도 알지만 삶과 사역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도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기도와 같은 주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기도학”과 같은 주제는 엉뚱한 신령스러운(?) 신비주의 목회자들이나 다루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학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성경해석을 제대로 할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죠.

올바른 기도에 관한 성경의 지침은 사실 성서학에서 연구되어야 할 분야입니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은 기도의 영성 같은 내용을 머리로 알지 실제로 기도생활의 깊이를 체험한 분들은 드뭅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글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이론에 불과한 내용이 많습니다. 정작 본인의 체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영성을 배우려면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한 쉬운 환경으로 고독은 필수입니다. 혼자 있어서 괴로운 외로움과 다른 방해받지 않는 홀로있기입니다.

연약해서 기도하기 힘들다고요? 저는 너무나 연약해서 안식을 누리지 않으면 삶이 피곤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피곤한 사람이 많이 쉬는 것을 괴로와 할 필요가 없듯이 연약에는 기도가 보약이고 해답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약할 때 기도를 통해 강함을 더 체험하기 때문이죠. 늘 기도하던 바울이 약함을 자랑질(?)한 이유입니다.

계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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