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이 역사적 사실은 아닐까?]

“주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요 1:17).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필자에게 든 생각은 우리가 지나치게 현대 과학적인 역사관과 관심으로 성경을 읽어나간다는 점이었다. 합리주의적인 방식의 해석은 성경의 기적을 자연주의적인 입장이나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입장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는 인간이 특정한 종류의 고래 뱃속에서 살 수 있는 경우를 들어 현대인을 설득하려 한다.

그리고 상징적 은유적 해석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역사처럼 들리는 것은 문자적이 아닌 신화적인 언어로 본다. 따라서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것을 요나가 죽음의 세계인 스올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것의 신화적 언어다. 삼일이란 것은 고대 근동에서 생명체가 스올에 이르는 여행길에 필요한 기간이다. 흥미롭게도 상당수의 문화에서 실제로 사흘장을 치른다. 이러한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성이 아니라 신학이다.

그러나 요나서의 원 청중인 고대 유대인들이나 1세기 유대인들이 요나의 물고기를 기적이 아닌 신화적인 언어로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본인이 궁금해서 찾아본 고대 랍비 문헌 그 어디에서도 요나의 물고기를 신화로 본 곳은 없었다(Zohar, Wayaḳhel; Pirḳe R. El. x.; see also Gen. R. v. 5). 오히려 물고기의 입과 목이 얼마나 컸던지 요나가 쉽게 마치 회당의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과 같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모든 랍비문헌에서 물고기는 요나를 위한 고마운 존재로 묘사된다. 여러 동화 같은 이야기 중에는 수컷 물고기의 뱃속이 너무 편해서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요나를 더 불편한 배를 가진 암컷 물고기에게로 옮겨 타게 하여 결국 요나가 회개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비좁은 공간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시도가 헛된 것임을 깨닫는다(Ps. cxxxix.Yalḳ., l.c.; Tan., Wayiḳra, ed. Stettin, 1865, pp. 370 et seq.; see also Pirḳe R. El. x.).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은 역사적 사실일까? 첫째, 다른 성경의 기적이야기를 기록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요나서의 저자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보호받았던 사건의 의미는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기적으로는 보지 않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반대로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놀라움을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물고기 뱃속 기적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결코 역사적 진정성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거나 훼손한다고 볼 필요도 없다.기적의 의미를 성경의 다른 기적들에 비해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요나의 물고기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석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인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사실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더 쉽게 물고기 벳속기적을 더 사실적으로 믿었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기적을 믿게 하거나 설명하기가 훨씬 어렵다. 은자중지론, 기적중지론은 현대의 현상이지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이 사고는 아니다.

그 물고기가 미래나 외계에서 온 잠수함(?)이었던 신화적인 상징이었던 모두 현대적 해석이다. 당시 요나서의 원 청중들이 그 물고기를 신화적 요소로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신화적 요소로 보는 관점을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현대인들이다.

이 물고기가 실상 상어인지 아니면 물고기가 아닌 포유류인 고래인지 아닌지 본문에서 알아낼 길은 없다. 또한,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서 3일씩이나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는 오히려 우리의 관심일 뿐이다.

그 물고기는 요나를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보호해 주기 위해 삼킨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욘 1:17).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요나를 삼킨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키셨고 물고기를 통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요나를 기적적으로 구원하신 것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며 이런 일 정도는 유대인들의 신앙 안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성경의 기적을 비유나 신화적 상징으로 해석하길 좋아한다. 기적의 중요성보다는 상징적 의미의 중요성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물론 요나서의 물고기 뱃속 기적은 절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성경에는 기적 자체를 위한 기적은 없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기적을 요구하는 대적자들에게 예수님은 그것이 불신앙의 표시라고 한다. 요나의 표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사건을 위한 것이다.

필자의 관심은 이것이 기적인가 우화인가를 당시 시대적 관점으로 밝혀보고자 한 것이다. 요나가 진짜 물고기 뱃속에 3일간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왔는지 객관적인 법적 잣대로 확인할 길은 없다. 이것은 개인의 입장차이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요나서 전통이 물고기사건을 신화로 인식하고 썼을까? 그리고 그 청중들, 랍비 문헌들이 이 사건을 신화적 은유로 보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당시 사람들도 우화는 우화로, 은유는 은유로 보았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저자가 이를 신화나 우화로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이를 우화로 읽은 것 같지도 않다. 식자층이었던 고대 랍비들도 이를 우화라고 보기보다는 입과 목구멍이 사람이 들어가기에 회당 입구처럼 넉넉하고 내장이 엄청나게 컸다는 기적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추가로 설명한 것을 보아 이를 우화로 본 것 같지 않다. 이 사건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현대인들이 요나서의 물고기 이야기를 우화적 입장으로 읽는 것 역시 과학적 합리적 세계관에 따른 시대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원 의미와 현대적 읽기와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본문을 창문으로 여겨 그 이면의 역사에만 관심을 가져서 정작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과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현대인들이 요나서를 신화, 우화적 입장으로 읽는 것 역시 과학적 합리적 세계관에 따른 시대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원 의미와 현대적 읽기와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Lee, MinKyu교수의 펫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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