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왜 형통하는가?

종종 사극드라마를 보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 권좌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 배만 채우는 자가 등장한다. 온갖 모략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한평생 편안한 삶을 살아가다가 말년에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뒤집힐 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소위 권선징악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그래,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도덕적 감정과 ‘조금 나쁜 짓을 해서라도 저런 부귀영화를 누려봤으면 좋겠다’라는 현실적 소원이 충돌한다. 여기에 이생의 삶이 전부라는 세속주의까지 가세하면현실론으로 생각은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 속 악인의 입에서도 이런 대사가 튀어나온다. ‘극락왕생은 무슨? 나는 이 땅에서 이미 극락 중의 극락을 맛보았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보고 듣고 부딪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왜 의롭게 사는 사람보다 악한 자들이 더 떵떵거리면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구약성서의 한 지혜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어쩌면 이제 막 직장생활에 뛰어든 현실감 없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부모의 말씀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왠지 몸을 사리면서 정의로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말고 얼버무리면서 살라는 다소 비겁한 말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악인이 형통하는 사회를 용인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정의롭고 선하게 살라고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선으로 악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

이제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왜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내버려두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고전적으로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리라 본다.

첫째,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그저 관망하지 않으신다는 대답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역사로 심판하신다. 비록 악인들이 흥왕한 듯 보이지만, 역사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불의와 부정을 넘어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막연한 발전사관은 인본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을 잉태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역사 안으로 돌입하여 들어옴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한없이 성장해 나가는 상향적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이 세상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악인을 심판하며 인류의 역사를 정화하며 승화시킨다.

둘째, 기독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신앙함으로써, 역사 내의 심판이 성취하지 못한 것의 완전한 실현을 희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선취(先取)되었고,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이라는 우주적 사건에 대한 희망을 뜻한다.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온전히 성취하신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역사를 등지는 탈속적인 성격과는 무관하다.

악인의 형통을 목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도 안 되지만(잠 24:1,19, 시 73), 정의롭고 선한 길을 무의미하게 여겨 포기해서도 안 된다(시1:1, 37 :27).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은 우리시대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 사이의 불일치와 갈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악인의 형통함 앞에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주의 나라 오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왜 악인을 내버려두시는가?

성서는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고 하면서도, 또한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마 5:45)고 말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무한한 긍휼을 통해 악인을 부끄럽게 함으로써 그를 심판하며 또한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악인의 진정한 악함은 그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습 3:5).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함을 그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악인에게도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심으로 오히려 그를 부끄럽게 하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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