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피조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분을 닮아 선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악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인가?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지만 우리의 실제 생활과 전혀 무관한 질문은 아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질문이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편 10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1)
비단 성서뿐이겠는가. 지난 수난주간에 모든 사람을 침울하게 하며 안타깝게 했던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나는 한없는 무기력과 부끄러움, 또 한편으로는 분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왠지 모를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보였다. 교내 채플 기도시간마다 흐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고,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야만 했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셨는가?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일반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면서 이런 투의 질문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슴을 치며 이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왜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신학사에선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 다양한 답변을 제시해 왔다. 후에 이런 답변을 신정론(神正論)이라 명명했는데, 여기서 몇 가지만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는 미학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에도 어두운 색깔이 사용되듯이, 아름다운 음악에도 불협화음이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나타나는 악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다. 미학적 신정론에 따르면 지옥조차 아름답다.
둘째는 교육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신다.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듯이 하나님은 불 같은 시험으로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신다. 여기서 고난은 축복의 통로이다.
셋째는 역사-종말론적 신정론이다. 지금 일어나는 악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의 심판을 통해, 그리고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극복하고 제거하실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마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는 과거보다는 현재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아름답고,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통해 억울한 악의 희생자들은 위로를 받고 지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위로와 희망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이름은 낯설더라도 익히 설교를 통해 많은 들었던 내용이리라. 신정론의 여러 가지 답변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변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악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고난당하는 자)의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질문 앞에서 이제 인간(신학자)이 하나님을 변호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어쨌든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은 고난에는 ‘나름 이유’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난당하는 당사자 자신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인용한 시편을 묵상해 보자. 시편의 질문은 철저히 고난당하는 당사자의 절규를 드러내고 있다. 신앙의 질문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숨김이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도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던가.
우리는 고난과 악에 대해 재빨리 하나님을 변호하고 신앙의 답변을 주려 하지만, 성서는 오히려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아들 예수의 아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며, 죽어가는 아들 안에서 더 철저히 죽음을 감내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분만이 고통당하는 자를 진정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분도 아파하며 죽음을 경험하신다. 그리고 절규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자들의 세상을 심판하시며 고통당하는 자들의 영원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