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 짤막한 글들을 순서없이 옮겨봅니다.

[기도란?]
기도는 대화

기도는 대화라고 합니다. 누구나 대화를 하고 삽니다. 대화란 소통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대화를 하죠?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시나요? 기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말이 없는 벽과 대화하는 것이나 혼자 말을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어렸을 때 누구나 인형과 대화를 해 보았을 것입니다. 커서도 상상 속의 어떤 존재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자연과 대화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어떤 피조물이나 상상의 대상이 아닌 사람의 의식과 존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근본적으로 동양의 전통적인 명상과는 다릅니다.

동양의 명상은 주로 몸과 마음을 이완한 상태에서 마음을 철저하게 비우고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어떤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로 알려진 것으로는 집중명상(Concentrative Meditation)과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이 있습니다. 집중명상은 오로지 보고, 듣고, 감각을 느끼고, 냄새 맡고,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여 몰임함으로 맑고 고요한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마음챙김 명상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방식입니다. 상좌부 불교(테라바나,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수행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동양종교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인격신의 개념은 딱히 없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과 자연법칙을 신이라 하지요. 즉 자연과 신은 하나라는 범신론의 우주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명상은 자신의 내면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체험하고 인격수양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즉, 인간 내면의 능력에 근거한 개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이런 내면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정신활동이나 인격수양과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의 내면탐구가 아니라 초월자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럼 어떻게 피조물이 초월자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요? 원래 죄인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도 만날 길도 없습니다. 어항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면 죽는 것처럼 구약에서는 죄인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죽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려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보호하시는 은혜를 베푸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수여자였던 모세조차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대화를 했습니다(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그와 친구처럼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를 보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친밀한 교제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이 열렸습니다.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 친밀한 사귐을 가지기 위해 역사 속으로 오셨기 때문에 열린 대화의 장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상에서 초월자 하나님과 사귈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신 최고봉은 성육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를 통한 소통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다른 자연종교처럼 인간이 마음의 눈을 열어 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선물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인간도 그의 형상대로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선물을 주시는 방식도 상호인격적으로 진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인격적인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그의 자녀와 함께 동참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 초대에 응할 수 있습니다. 이 초대는 기도로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독특한 체험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 아니고서는 들어올 수 없는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교제가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근본적으로 “주어지는 체험”이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받는 선물입니다. 결국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니까요.

그래서 기도는 자기수행을 넘어서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 성찰로 충분히 파악될 수 없는 실체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 너머에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는 기도하는 사람조차 파악할 수 없는, 즉 의식적인 사유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내가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 구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차원에서 경이롭게 아름답게 대화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이 비밀스러움에 때론 한 치 앞도 모르는 유한한 인간이 답답함도 경험하지만 사실 기도응답이란 우리에게 미리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선물로 주어집니다. 결국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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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인간이 동참하지만, 기도의 주체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중 성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기도모델의 정점이자 기도의 원인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스스로 기도의 모범이시며 스승이시지만 동시에 그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기도가 시작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 15:5).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하지만 예수님의 중재 없이는 기도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하고 많은 기도가 있지만 모든 기도의 주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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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구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늘 그렇게 하다보니 때론 그저 형식적으로 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다는 말은 예수님의 뜻을 구하며 주의 깊게 순종하는 자세로 경청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뜻과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며 살겠다는 서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의지와 일치함에 머무르는 상태가 기도의 최고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하나 된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 되어 드려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 가운데 속상한 일, 하나님께 섭섭한 일, 원하는 일 다 아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 결론으로는 힝싱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구하셨을까?”를 묵상하며 우리의 기도내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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