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8. QT큐티체조. 룻기 1:19-22.

간단설명. 나오미는 룻과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을 마라로 부르라고 요청한다.

성경본문. 룻기 1:19-22
한글본문.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영어본문.
19.So the two women went on until they came to Bethlehem. When they arrived in Bethlehem, the whole town was stirred because of them, and the women exclaimed, “Can this be Naomi?” 20.”Don’t call me Naomi, ” she told them. “Call me Mara, because the Almighty has made my life very bitter. 21.I went away full, but the LORD has brought me back empty. Why call me Naomi? The LORD has afflicted me; the Almighty has brought misfortune upon me.” 22.So Naomi returned from Moab accompanied by Ruth the Moabitess, her daughter-in-law, arriving in Bethlehem as the barley harvest was beginning.

도움말.
나오미(19절).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마라(20절). ‘괴로움’이란 뜻이다.
보리 추수 시작할 때(22절). 보리 수확은 4-5월에 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나오미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가(21절)?
⬇ 아래로 인간.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20절)?
? 물어봐.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왔을 때는 언제였는가(22절)?
! 느껴봐. 나는 믿음에서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흉년이 와도 믿음의 자리를 잘 지켜내려면 지금부터 어떤 자세와 훈련이 필요하겠는가?

Meditation. 열린 공동체, 겸손한 마음
나오미가 룻을 데리고 7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주민들은 놀라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공동체를 지켰던 이들에게는 자부심이 있는데, 자칫 타인을 배척하는 교만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들은 기회주의자로 비친 나오미를 따뜻하게 환대하기보다 놀람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남편과 자식까지 다 잃고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주변의 놀란 시선에 나오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으며, 나오미(나의 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약속의 땅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징계의 손길을 경험했기 때문이다(21절). 이런 나오미의 겸손한 귀향 가운데 긍휼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준비되고 있었다. ‘보리 추수 시작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암시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공동체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이들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가? 나는 얼마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들을 환대하며 받아주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7-12-07. QT큐티체조. 룻기 1:8-18.

간단설명.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며 며느리들을 돌려보내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간다.

성경본문. 룻기 1:8-18
한글본문.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영어본문.
8.Then Naomi said to her two daughters-in-law, “Go back, each of you, to your mother’s home. May the LORD show kindness to you, as you have shown to your dead and to me. 9.May the LORD grant that each of you will find rest in the home of another husband.” Then she kissed them and they wept aloud 10.and said to her, “We will go back with you to your people.” 11.But Naomi said, “Return home, my daughters. Why would you come with me? Am I going to have any more sons, who could become your husbands? 12.Return home, my daughters; I am too old to have another husband. Even if I thought there was still hope for me–even if I had a husband tonight and then gave birth to sons- 13.would you wait until they grew up? Would you remain unmarried for them? No, my daughters. It is more bitter for me than for you, because the LORD’s hand has gone out against me!” 14.At this they wept again. Then Orpah kissed her mother-in-law good-by, but Ruth clung to her.
15.”Look,” said Naomi, “your sister-in-law is going back to her people and her gods. Go back with her.” 16.But Ruth replied, “Don’t urge me to leave you or to turn back from you.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and your God my God. 17.Where you die I will die, and there I will be buried. May the LORD deal with me, be it ever so severely, if anything but death separates you and me.” 18.When Naomi realized that Ruth was determined to go with her, she stopped urging her.

도움말.
돌아가다(6, 7, 8, 10, 15절). 히브리어 ‘슈브’는 단순히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과 삶의 방식까지도 완전히 돌이키는 ‘회개’를 의미한다.
붙좇았더라(14절). 섬기어 가까이 따른다는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룻에게 어떤 마음을 부어주시는가(16-17절)?
⬇ 아래로 인간.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어떻게 할 것을 권고하는가(8-9절)?
? 물어봐.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12-13절)?
! 느껴봐.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내 주변에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 주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려면 어떤 마음 자세와 행동의 변화가 필요하겠는가?

Meditation.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며느리들을 돌려보낸다. 형사취수제가 일반적이었던 시대에 과부가 된 며느리들에게 신랑을 구해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결국 각자 살 길을 찾게 한 것이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의 제안을 거부한다. 함께 여호와께 돌아가자며, 자신의 가능성을 제쳐두고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선택한다. 이제부터는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자신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선언한다. 끝까지 사랑하고 충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시내산 언약의 핵심을 이방여인의 입으로는 최초로 고백한 놀라운 선언이다. 이 고백의 바탕 위에 룻은 결국 다윗과 메시아의 가문을 이어가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다(마 1:1-17 참조).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끝까지 사랑하고 충성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용기와 변화는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예언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오늘날 “예언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정경화 맥락의 성경의 예언과 신약에서 “예언의 은사”는 다르다. 정경화 과정을 걸친 성경의 계시는 대부분의 교단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나 개인적인 감동 차원의 계시는 정경 아래의 권위이며 반드시 받아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상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

1) 예언의 은사자가 받는 계시는 주로 마음에 떠오르는 인상, 꿈이나 환상, 말씀(단어나 구절),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느낌으로 떠오르는 성경 구절, 다른 이의 신체적 통증이나 마음의 감정상태가 자신에게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스러운 내용을 알게됨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가 받은 예언은 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은사자도 그 의미를 잘 모를 때가 있다.

2) 예언자의 심리상태는 정상에서 가벼운 헤리상태까지 다양하다.

3) 예언의 주로 교리적인 내용이 아니다. 내용은 주로 개인적이지만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다르다. 예언 은사는 성경의 교훈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특별한 지식이나 인도함이 필요한 영역에서 활용된다.

4) 특히 회중 예언은 주로 고린도 전서 14:3에서 말하는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역할을 성취하는 모습이다.

5) 고린도 전서 14장과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처럼 오늘날 예언은 복합적이고 신비한 권위를 보여준다. 낮은 차원의 예언은 일반적인 권면으로(보편적인 메시지로), 높은 차원의 예언은 구체적인 지도로 나타난다. 예언의 은사는 절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예언사역자들도 자신의 예언을 성경과 동등하다거나 위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권위를 내세우는 예언사역도 성경과 비교해 상대적일 뿐이다.

6) 은사자의 예언은 조언이고 성경은 주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은사자의 예언을 반드시 따를 필요도 없다. 사도 바울도 아가보의 선지자와 빌립의 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내용을 따르지 않았다. 그에겐 복음전파사명이 우선이었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7) 은사자의 예언이 다 맞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언은 늘 회중과 다양한 은사자에 의해 검증이 필요하다.

8)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야 가능하다. 성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고전 2:16 참조). 오늘날 진지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여 주님의 뜻을 전달하지만, 때론 성령께서 문득 깨닫게 하시는 은사적 지혜, 명령, 직관적 깨달음과 적용도 체험한다.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의 인도하심도 있지만 주권적인 응답이나 인도하심도 체험한다. 이런 차원에서 예언의 체험이란 생각보다 더 대중적이다. 다만 은사자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막스 터너, 성령과 은사, 553-57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