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장기영 박사의 펫북에서 건져왔습니다.^^)
— 믿음과 소망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설명과 칼빈의 설명 —
1. 루터
“믿음은 지성 안에 있고, 소망은 의지 안에 있다… 믿음은 지성을 명령하고 인도하는… 교훈이요 지식이다. 소망은 권면이다. 소망은 마음이 용기를 얻고 굳은 결심을 하도록 북돋아 악의 와중에서도 담대하고 참을성 있고 끊기 있도록 하고 더 나은 것을 바라보게 한다. 믿음은 오류와 이단에 항거하여 투쟁하고 영들과 교리들을 심판하는 신학자이자 심판자라면, 소망은 환난과 십자가, 조급함과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 모욕 당한 감정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지휘관으로서 기쁨과 용기로써 악과 투쟁한다… 믿음은 그 대상으로 진리 (truth) 를 가진다. 믿음은 확실하고 굳게 진리에 매달리라고 가르친다. 믿음은 그 대상에 대한 말씀 (the word of the object), 즉 약속을 바라본다. 소망은 선 (goodness) 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소망은 약속의 말씀이 가리키는 대상 (the object of the word) 을 바라본다. 약속된 대상, 믿음이 받으라고 명령하는 대상을 바라본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신중성과 불굴성은 다르다… 불굴성은 역경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용감하게 견디며 더 나은 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확고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불굴성이 신중성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경솔함이 되고 만다. 반대로 신중성에 불굴성을 더하지 않으면 신중성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정치 영역에서 신중성은 불굴성이 없으면 무익한 것과 같이, 신학에 있어서도 믿음은 악의 와중에서도 견디고 이끌며 정복하는 소망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불굴성은 신중성이 없이는 경솔함이 되는 것처럼, 소망 역시 믿음 없이는 성령에 관해 주제 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믿음이 가르치는 진리나 그리스도의 지식이 없는 소망은 눈 멀고 경솔한 불굴성이 되고 만다. 신자가 믿음의 인도를 받는 올바른 이해와 지성을 가질 때, 믿음이 명령하고 가르치는 최선의 것을 소망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믿어야 할 모든 내용을 가진 변증법과 같다. 소망은 시험을 당할 때 확고하게 말씀을 붙들도록 강권하고 설득하는 수사학과 같다. 연설자는 변증의 논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확실하게 가르칠 수 없고, 논리학자는 수사학이 없이는 그의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이처럼 변증학과 수사학은 서로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결합될 때에라야 비로소 설득력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소망은 서로 다르고 구별된 것이지만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변증법과 수사학이 서로를 위해 일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이 믿음과 소망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의 관계는 철학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의 관계와 같고, 정치 영역에서 신중성과 불굴성의 관계와 같고, 공중 연설에서 변증법과 수사학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지성이 진리로 깨우침을 받을 때 생겨난다. 소망은 권면으로 생겨난다. 권면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솟아올라 악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행동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믿음의 빛이 의지를 밝혀주지 않는다면, 소망만으로는 의지를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고 소망으로 보존한다… 믿음은 소망에 앞서간다. 믿음은 생명의 시작이며 고난을 받기 전에 시작된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며 그를 붙잡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즉시 분쟁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이런 고난 속에서 믿음은 신학적 지혜와 신중성이라면, 소망은 신학적인 불굴성으로서… 육신적이며 영적인 모든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출처: Luther’s Works 27: 20-27. 루터 저, 김선회 역, 말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535판) 하권 (용인: 루터대학교출판부, 2003), 43-54 (번역을 부분 수정).
2. 칼빈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내는 때를 기다린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항상 아버지가 되실 것이라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되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해주어 도중에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두신다. 이런 때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릴’(사8:17)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길 만큼(시9-: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 두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와 유사점으로 인해 성경은 간혹 믿음과 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가르칠 때(벧전1:5), 그는 소망에 해당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소망은 곧 믿음을 위한 자양분과 힘이라고 우리는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같은 편지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1)고 한 것 같이, 믿음과 소망은 간혹 결합된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나타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원을 보류한다고 하여(빌1:20) 소망에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이 모든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귀절에서도 바울은 … 같은 뜻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즉,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밑에 숨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소망의 목표와 믿음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이 자비이다 … 주의 자비에서 모든 것을 대망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다…”
출처: 기독교강요, III. 2. 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