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오늘 오랜만에 은준관 박사님 강연을 듣고 왔다. 여전히 어린이 청소년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나이를 무색케 한다. 박사님께 수차례 들어왔던 내용이지만 오늘 따라 새삼 정신이 바짝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눈에 띄게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딸래미를 두고 항상 고민하는 문제,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은 박사님 강연은 교회학교 역사로부터 시작했다.
1880년 경 영국에서 시작한 주일학교가 정확히 2백년이 지나 1980년도에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로 전 세계적으로 먹고 살만한 나라의 교회 안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교육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2030년이 되면 한국교회에서 교회학교가 거의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하신다.
실제로 박사님 제자 중 한 분이 다니는 교회 예를 들었다. 교인 수 7백 명의 교회에 어린이 20명….. 이 경우 뿐만 아니라 요즘 몇 교회를 제외하곤 교회 안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우는 소리가 점점 사라지는게 현실이다. 사람 소리로 그득해야할 교회가 절간처럼 경건한 어른들의 목탁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은준관 교수님이 항상 외치는 인용문,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듀크 대학교 시절 친구이자 교수인 Westerhoff의 주장이다. 그는 이 주장과 더불어 미국의 주일학교가 급속히 비어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주장이 나온 시기는 미국의 주일학교가 최절정이던 1980년도에 나왔다는 점이 특이하다.
당시 미국에선 Westerhoff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론가들이 그럴싸한 논리로 무장하여 속속 출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대를 미리 간파한 ‘예언’이 되어버렸다. 교회학교 부흥의 절정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웨스터호프의 명제는 교회 안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 안에 교사, 돈, 프로그램, 교재는 넘쳐난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런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며 형성된다.’
물론 웨스터호프는 이 명제를 통해 교회학교 무용론을 주장했지만, 은준관 박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학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늘 강연의 신학적 근거와 논리를 내 나름대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 정도 될 것 같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주체적 자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어린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어린이도 하나님 앞에 주체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은 주체자는 고사하고 단순히 ‘피’교육대상이고, 가르침 받아 교정되어야 할 선도대상일 뿐이다.
주일에 교회와서 고작하는 게, 아이들의 삶의 자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설교와 공과교육을 받고, 어린이 예배 때 멍하니 졸거나 울거나 딴짓하면 혼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사정이 이런데 어떤 아이가 교회오길 즐겨할까?
은 박사님은 항상 성서의 주제를 “부르심-세움-보냄”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한다. 이를 교회 교육 ‘생태계’라고 부르는데, 첫째 단계인 ‘부름’의 핵심은 온 세대가 예배에 주체자로 참여하는데 있다. 심지어 정해진 주일에 어린이들도 대예배 인도와 기도 뿐만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를 셋팅하는 예배디자인까지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을 것을 ‘부르심’의 단계로 본다. (이 단계에선 목회자의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
다음 단계인 ‘세움’에선 예배 공동체 뿐만 아니라 지성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은 박사님 표현대로 하자면. ‘교실’이다. 교실이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어린이 성경 교육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실에선 아이들에게 구원사 지식을 필히 가르칠 것을 강조한다. 다만 기존의 주입식 방법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질문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사실 나도 이건 어렵다^^ 이 교육은 가장 보편적인 교육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전문적인 훈련과 지식이 필요한 과정이다.)
세움의 단계가 머리를 데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음 단계인 ‘보냄’은 좀 유별나다. 왜냐하면 은 박사님이 강조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론이 여기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명 “지역배우기”.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발로 뛰며 공부하는 단계다. 자기 교회 주변의 역사, 인구 비율, 직업 종류, 지역적 특징등을 도서관과 동사무소, 또는 지역 어른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일종의 보고서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은 박사님은 실제로 이 작업실험을 십수년간 수백개의 교회에서 이미 해오셨고 그 결과치를 들고 이 작업이 얼마나 유용한지 강조하신다.
보냄의 단계에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교회 안의 신자로만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이들이 세상 한 가운데 주체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한다. 그곳에서 악이 무엇이고, 빈곤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나름의 해법을 함께 찾아가게 된다. 일종의 어린이 청소년 지역 소그룹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암시되었다시피, 이 실험 교육이 끝난 여러 교회들에게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자연스레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난한 자와 불의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는 전교회 성도들의 힘을 하나로 규합하여 선한 방향으로 선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특별히 강연 말미에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일주일 중 한 번,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하되, 15분을 넘기지 말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돌아가며 예배를 준비하라고 하신다. 엄마 아빠 주도가 아니라 아이의 순서가 되면, 예배 순서부터 설교까지 모두 맡겨보라고….
내 결론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한 가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니 그 선물을 교정하기 위해 가르칠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정, 교회, 학교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그 첫 출발점은 교회 예배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온가족 공동예배 강조에 있고(자모실은 절대 안 만든다^^), 가정적으로 보자면 온 교우들의 가정예배 실현이다. 이 부르심이 정착되면, 교육적 세움(교실에서 지성적 교육), 보냄의 단계로 구체화할 것이다. 아이들은 교회의 미래다. 그리고 나라의 미래다. 미래를 만드는 일은 로또 맞듯 그리되는 게 아니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은 기도와 헌신이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할 때 가능하다.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디 어린이 청소년 뿐이랴! 이 명제는 어른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게 아닌가?
아, 그나저나 슬기 진짜 보고 싶다…..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 05-24-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