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2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자유의지에 대하여.

지난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노예의지론을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마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죄를 벗어나거나 선을 택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귀를 내쫓고 그 의지를 다스리시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피동적으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믿음이나 선행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에라야, 인간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따라“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이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주장처럼 공로사상이나 율법주의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즉 모든 것을 아시고, 한 마리 새의 움직임까지, 즉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인데(마 10:29-30),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완벽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는 것 아닐까요? 웨슬리는 이런 위험성을 몰랐을까요?

이런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 먼저 성결가족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말[馬]이라면 하나님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라는 설명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느껴지시는지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교도소의 교도관과 죄수, 유격장의 조교와 훈련병, 혹은 스파르타식 입시학원의 강사와 학생의 관계같이 통제와 순응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만약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를 이렇게 전적인 통제와 순응으로 설정을 한다면, 저로서는 그 엄격함과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가출이라도 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부모다움, 교사다움, 심지어 하나님다움에 자녀, 학생, 인간에 대한 통제와 권위의 행사가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그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표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높이거나,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로서 영원히 예배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찬양하면서도, 다만 하나님께서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시는‘방법’에 웨슬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을 축복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능력에 따라 점점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책임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에 부합하도록 하나님의 통치 영역 일부를 맡기셔서 자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 1:26-28).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물의 이름 짓는 일을 아담이 담당한 것은, 아담이 허락받은 영역 속에서 행사할 자유와 권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존중하시고 인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창 2:19). 즉,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신 영역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직접적 권세를 사용하시기보다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그저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이 훼손될까요?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지침 – 가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 – 그리고 그 지침을 어길 시에 내려질 형벌을 통해 여전히 행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역을 당하고, 주권이 무시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이키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거나 압도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여전히 존중하는 가운데 그의 사랑과 공의, 선하심과 지혜 등을 모두 동원하여 아주 인격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설득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 의지가 꺾여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 끈질긴 설득에 항복하여, 하나님께서 강제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찾아 안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어린 자녀가 어머니의 수고를 다 알지 못해도 어머니는 아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차곡차곡 쌓여진 사랑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어머니께 대한 성숙한 감사로, 또 언젠가는 연약해진 어머니를 위한 수고와 섬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 같고 주권이 훼손당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같이”강한 힘으로(아 8:6)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기중심적이고 반역적인 교만을 감사와 순종과 겸손으로 바꿉니다(고전 13:4-7). 결국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자처할 정도가 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렇듯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두면서도 그 마음을 감동시켜 변화시키는 사랑의 전능하심이지, 강제를 통한 전능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임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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