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사중복음 설교 3. 웨슬리의 “신유” 설교

— 활천, 성결교회 사중복음 설교 3. 웨슬리의 “신유” 설교 —

(신유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은 은사 중지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루터는 말년에 자신의 기도를 통해 후계자 멜랑히톤이 죽음을 벗어나는 신유의 은혜를 경험했으며, 죽기 전 해인 1545년에는 야고보서의 치유의식에 관해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행하는 데 익숙합니다 … 우리는 이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정신착란으로 고통 당하는 한 가구상을 치유했습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젊었을 때는, 성경의 기록이 완료된 후에는 “새롭고 특별한 계시나 기적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기적은 끝났고, 신유라고 말하는 기적들은 악마의 술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교황의 사도적 영감 주장이나 중세 교회가 꾸며낸 기적으로 혹세무민하는 것에 대항해 은사 중지론을 주장했으나, 오늘날에는 그 상황이 아닌 논증만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서 반복된다. 교리사적 측면에서 간헐적 주장이나 체험으로써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은사 중지론을 극복해낸 사람은 존 웨슬리이다. 이 설교는 웨슬리의 설교 “더 좋은 길”, 소책자 “메소디스트의 원리 추가 설명”, 일지(Journals)와 편지 등의 내용을 요약해 재구성한 것이다 –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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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기도로 병든 자를 구원하라” (약 5:15)

나는 메소디스트 집회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은사나 기적에 관해 계속 질문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요?” “모두가 조장해낸 속임수 아니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일은 대낮에 공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비밀스럽게 소수에게 일어나지요?” 또 많은 사람은 내게 편지로 “환상이나 꿈을 중시하지 마시오. 부르짖거나 눈물 흘리거나 외적인 고백을 한다 해서 그들이 죄를 용서받았다고 착각하지 마시오.”라며 셀 수 없이 경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거의 매일 이런 일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 때문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이 한 순간 두려움과 공포, 절망의 영에서 사랑과 기쁨, 평화의 영으로, 또 그들을 지배했던 죄의 욕망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순수한 열망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던 중 갑자기 쓰러져 힘을 잃고 격렬한 고통에 휩싸였습니다. 어떤 이는 칼이 자신을 관통하는 느낌, 다른 이는 엄청난 무게로 땅속으로 짓눌리는 느낌, 심장이 터지는 느낌이나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양하게 감동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찔러 자신의 외적인 죄 뿐 아니라 내적인 죄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옥의 불이 이미 저의 가슴에 붙었고, 온 몸은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있는 듯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다가옴을 보고 심판을 두려워했기에 비탄에 빠져 크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찔림을 받은 뒤 굳은 신앙을 갖게 된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변화가 참된 것인지 검토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 위에 흘러내리거나 가슴과 심장에 뜨겁게 퍼부어졌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평화와 기쁨과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또는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변화가, 평화와 기쁨과 사랑으로 역사하신 성령의 활동의 결과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판단의 척도가 되는 것은 거룩한 열매, 즉 그들의 삶의 변화입니다. 악한 죄인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바뀐 것입니다. 맹수에서 양으로, 술주정뱅이에서 단정한 사람으로, 호색가에서 육체의 죄를 혐오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증인들입니다. 나는 이런 현상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 은사들 중 특히 신유 사건은 많은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1739년 9월 28일, 질병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한 여성이 많은 사람의 기도로 즉시 치유된 일, 1742년 3월 31일, 열병으로 말할 수 없었던 안 캘컷이 기도로 즉시 말문이 열리고 속히 회복된 일, 1740년 11월 16일, 집회 후 병으로 죽게 된 여러 사람이 회복된 일, 1742년 12월 15일, 의사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 메이릭 씨가 많은 사람의 합심기도로 즉시 회복된 일, 1750년 4월 8일, 심한 열병으로 살 가망이 없었던 루넬 씨가 집회에서 나를 보자마자 엄청난 양의 땀을 흘린 후 바로 회복된 일, 1778년 10월 16일, 수개월 앓으며 거동하지 못한 여인이 합심기도로 즉시 치유된 일, 1785년 5월 31일, 4주 동안 심한 두통을 앓던 여인이 내 안수 기도로 즉시 고침 받은 일 등 내가 일지에 적은 신유 기록들에 대해서는 많은 산증인들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신유의 은혜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1741년 3월 21일, 기도로 심한 복통을 고침 받은 일, 1741년 5월 8일, 두통과 허리 통증, 고열로 며칠을 앓고 주일에 드러누워 종일 기침한 후 말조차 할 수 없었을 때 간절한 간구로 많은 사람 앞에서 즉시 치유 받은 일, 1746년 11월 12일, 의사가 고칠 수 없다던 탈장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스피어 씨의 간증을 듣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치통을 즉시 고쳐주신 일, 1746년 3월 17일과 1781년 9월 2일, 1783년 5월 23일 등 여행 중 세 차례나 다리 부상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는 말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즉시 치유해주셔서 사역지로 무사히 이동한 일 등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인 신유, 예언, 방언, 통변 등을 설명하면서, 이런 은사들이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에게도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사들을 통해 신자나 불신자에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200-300년이 지나자 교회에는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당시 인구 중 그리스도인은 채 이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은사가 멈추어버린 진정한 이유는 많은 사람,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보셨을 때 세상에서 믿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들이 기독교 교회 내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같이 되어 죽은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신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적인 은사들이 멈춘 후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신유의 은혜마저 소실된 것은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가톨릭교회가 꾸며낸 도유식은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예식으로서, 신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은사가 참으로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인 장로들에게 신유의 은사를 활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 중 두 가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칠 것이다”(고전 13:8)라고 말씀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들을 폐할 시점은 온전한 것이 와서 부분적인 것들을 폐할 그 때, 즉 온전한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입니다(고전 13:9-13). 성경은 그 때가 오기도 전에 미리 초자연적 은사와 기적이 폐할 것이라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 끝 날까지 어느 시대, 어느 순간, 어떤 정도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적 행하시기를 멈추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사도 시대나 특정 시기에 한정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험한 태도는 고함이나 경련, 환상, 입신 같은 특이한 현상을 지나치게 중시해 그것들이 내적인 역사에 필수적이라고 여겨, 그런 것들이 없으면 내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위험한 태도는 그런 현상을 지나치게 경계해 그 모두를 정죄하고, 그것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된다고 억측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흉내 내 영적 은사에 대해 불신을 심어줍니다. 그렇다고 은사를 단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 전부를 포기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처음에 이런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아직도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와 마귀 역사를 분별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위선에 빠져 하나님의 은사를 흉내 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서 그것이 성령의 참된 역사를 부인하거나 평가절하 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실체에 해를 끼칠 수 없고, 위조 다이아몬드가 있다 해서 진짜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까? 교만을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은사와 기적이라면 무조건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적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아직 폐하지 않은 한 종류의 기적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역사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자연적 원인을 초월하는 것으로 악한 영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여러분 중 이 기적이 그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진리의 하나님께서 마귀보다 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 탁월한 지혜와 위대하심을 따라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구원은 단지 죽은 후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현재적 구원이자, 우리 영혼이 최초의 건강한 상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정의와 자비, 진리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혼과 함께 육체까지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이중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신자에게 신유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믿음으로 간구하는 여러분들께 주님께서 내적이고 외적인 건강 모두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신대에서 강의하시는 장기영 박사님의 글입니다. 그의 펫북에서 퍼왔습니다>

2018-03-18. 주일에는 읽는 QT.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3.

간단설명. 하나님은 현실에 안주하는 종들보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진 아들 딸들을 원하신다. - 폴 스티븐스

성경본문. 창세기 25:29-34
한글본문.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Meditation. 야곱의 추진력, 하나님의 열심
창세기를 읽어가다 보면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야곱의 면모를 자주 보게 됩니다. 기다리기보다는 들이대는데 익숙하고 무언가를 추구하고 추진하면서 급기야 일을 만들고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단순히 기질이 그렇다기보다는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폴 스티븐스는 하나님의 복을 알고 받고자 하는 열망이 야곱의 삶을 움직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봤습니다.

“야곱의 추진력은 하나님의 복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다 … 누구나 인정하듯 그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다. 우리와 똑같다. 그러나 그는 복을 간절히 원했다 … 복을 추구하는 것은 야곱의 이야기에서 믿음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 복을 얻기 위해서 야곱은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하나님과 겨룬다 … 그는 하나님을 찾아 나서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닦달한다 … 내가 항상 주목하고자 노력하는 이야기의 심장부는 인류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다.”(20-23면)

놀라운 것은 야곱의 열심과 열정의 진원지가 기실 하나님의 열심과 통하는 면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이런 하나님의 열정을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Prodigal God)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도 허무에 사로잡혀 위축되고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오뚝이처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번역으로 창세기 25-35장을 통으로 읽어보십시오.

“우리에게 복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 우리도 주님의 복을 힘껏 추구하면서 즐거이 누리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