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Chisel Remastered(https://skitguys.com/)

<div id=”fb-root”></div> <script>(function(d, s, id) { var js, fjs = d.getElementsByTagName(s)[0]; if (d.getElementById(id)) return; js = d.createElement(s); js.id = id; js.src = “//connect.facebook.net/ko_KR/all.js#xfbml=1″; fjs.parentNode.insertBefore(js, fjs); }(document, ‘script’, ‘facebook-jssdk’));</script>
<div class=”fb-post” data-href=”https://www.facebook.com/video.php?v=616745005033423″ data-width=”466″><div class=”fb-xfbml-parse-ignore”><a href=”https://www.facebook.com/raybaek”>백광현</a>님의 <a href=”https://www.facebook.com/video.php?v=616745005033423″>글</a></div></div>

2014-11-0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인간의 지혜와 쾌락 그리고 수고의 헛됨을 논한 전도자는 창조주의 신비로운 섭리에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는 것이 삶의 바른 자세라고 교훈한다.

성경본문. 전도서 3:1-15
한글본문.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2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14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15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영어본문.
1 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and a season for every activity under heaven: 2 a time to be born and a time to die, a time to plant and a time to uproot, 3 a time to kill and a time to heal, a time to tear down and a time to build, 4 a time to weep and a time to laugh, a time to mourn and a time to dance, 5 a time to scatter stones and a time to gather them, a time to embrace and a time to refrain, 6 a time to search and a time to give up, a time to keep and a time to throw away, 7 a time to tear and a time to mend, a time to be silent and a time to speak, 8 a time to love and a time to hate, a time for war and a time for peace. 9 What does the worker gain from his toil? 10 I have seen the burden God has laid on men. 11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its time.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s of men; yet they cannot fathom what God has done from beginning to end. 12 I know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men than to be happy and do good while they live. 13 That everyone may eat and drink, and find satisfaction in all his toil–this is the gift of God. 14 I know that everything God does will endure forever; nothing can be added to it and nothing taken from it. God does it so that men will revere him. 15 Whatever is has already been, and what will be has been before; and God will call the past to account.

도움말.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5절). 성을 허무는 것과 쌓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있는 것이…(15절).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새번역)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은 무엇인가(11, 14절)?
⬇ 아래로 인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12-13절)?
? 물어봐. 전도자는 하나님의 섭리의 적용 범위를 어디까지 보았는가(1절)?
! 느껴봐.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진행되어 감을 확신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오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삶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일과 부정적인 일이 교차한다. 전도자는 삶 전체를 포괄하는 14쌍의 대조적인 일들을 제시한다(1-8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만,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일어나게 할 수 없다(11, 14절).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일어난다. 하나님만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때에 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는 체념적인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을 믿고, 자신을 기꺼이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의 패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지나고 보면 버릴 패는 하나도 없었음을 깨달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주어진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선물로 누릴 수 있게 한다(12-13절). 당신이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신뢰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믿음과 소망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설명과 칼빈의 설명

(아래의 글은 장기영 박사의 펫북에서 건져왔습니다.^^)

— 믿음과 소망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설명과 칼빈의 설명 —

1. 루터

“믿음은 지성 안에 있고, 소망은 의지 안에 있다… 믿음은 지성을 명령하고 인도하는… 교훈이요 지식이다. 소망은 권면이다. 소망은 마음이 용기를 얻고 굳은 결심을 하도록 북돋아 악의 와중에서도 담대하고 참을성 있고 끊기 있도록 하고 더 나은 것을 바라보게 한다. 믿음은 오류와 이단에 항거하여 투쟁하고 영들과 교리들을 심판하는 신학자이자 심판자라면, 소망은 환난과 십자가, 조급함과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 모욕 당한 감정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지휘관으로서 기쁨과 용기로써 악과 투쟁한다… 믿음은 그 대상으로 진리 (truth) 를 가진다. 믿음은 확실하고 굳게 진리에 매달리라고 가르친다. 믿음은 그 대상에 대한 말씀 (the word of the object), 즉 약속을 바라본다. 소망은 선 (goodness) 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소망은 약속의 말씀이 가리키는 대상 (the object of the word) 을 바라본다. 약속된 대상, 믿음이 받으라고 명령하는 대상을 바라본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신중성과 불굴성은 다르다… 불굴성은 역경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용감하게 견디며 더 나은 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확고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불굴성이 신중성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경솔함이 되고 만다. 반대로 신중성에 불굴성을 더하지 않으면 신중성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정치 영역에서 신중성은 불굴성이 없으면 무익한 것과 같이, 신학에 있어서도 믿음은 악의 와중에서도 견디고 이끌며 정복하는 소망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불굴성은 신중성이 없이는 경솔함이 되는 것처럼, 소망 역시 믿음 없이는 성령에 관해 주제 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믿음이 가르치는 진리나 그리스도의 지식이 없는 소망은 눈 멀고 경솔한 불굴성이 되고 만다. 신자가 믿음의 인도를 받는 올바른 이해와 지성을 가질 때, 믿음이 명령하고 가르치는 최선의 것을 소망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믿어야 할 모든 내용을 가진 변증법과 같다. 소망은 시험을 당할 때 확고하게 말씀을 붙들도록 강권하고 설득하는 수사학과 같다. 연설자는 변증의 논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확실하게 가르칠 수 없고, 논리학자는 수사학이 없이는 그의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이처럼 변증학과 수사학은 서로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결합될 때에라야 비로소 설득력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소망은 서로 다르고 구별된 것이지만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변증법과 수사학이 서로를 위해 일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이 믿음과 소망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의 관계는 철학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의 관계와 같고, 정치 영역에서 신중성과 불굴성의 관계와 같고, 공중 연설에서 변증법과 수사학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지성이 진리로 깨우침을 받을 때 생겨난다. 소망은 권면으로 생겨난다. 권면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솟아올라 악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행동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믿음의 빛이 의지를 밝혀주지 않는다면, 소망만으로는 의지를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고 소망으로 보존한다… 믿음은 소망에 앞서간다. 믿음은 생명의 시작이며 고난을 받기 전에 시작된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며 그를 붙잡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즉시 분쟁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이런 고난 속에서 믿음은 신학적 지혜와 신중성이라면, 소망은 신학적인 불굴성으로서… 육신적이며 영적인 모든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출처: Luther’s Works 27: 20-27. 루터 저, 김선회 역, 말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535판) 하권 (용인: 루터대학교출판부, 2003), 43-54 (번역을 부분 수정).

2. 칼빈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내는 때를 기다린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항상 아버지가 되실 것이라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되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해주어 도중에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두신다. 이런 때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릴’(사8:17)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길 만큼(시9-: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 두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와 유사점으로 인해 성경은 간혹 믿음과 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가르칠 때(벧전1:5), 그는 소망에 해당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소망은 곧 믿음을 위한 자양분과 힘이라고 우리는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같은 편지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1)고 한 것 같이, 믿음과 소망은 간혹 결합된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나타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원을 보류한다고 하여(빌1:20) 소망에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이 모든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귀절에서도 바울은 … 같은 뜻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즉,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밑에 숨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소망의 목표와 믿음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이 자비이다 … 주의 자비에서 모든 것을 대망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다…”
출처: 기독교강요, III. 2. 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