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3. 주일에는 읽는 QT.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11.

간단설명. 진정한 종교는 단순히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다. - 존 칼빈

성경본문.
한글본문. 창세기 32:26-28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Meditation. 회심(Conversion) :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
폴 스티븐스는 야곱의 회심 과정을 풀어쓴 장에서 야곱을 신약의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면서 그가 형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자신에게 돌아갔다면서 “삼중의 귀환”이란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과 진정한 삶 자체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겉치레와 연기와 가장한 모습을 버리고, 그가 자신의 모습을 찾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씨름의 절정에 다다른다. 그 사람이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야곱이 20년 동안이나 피해 온 질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일생 동안 회피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하실 수 없었다. 야곱은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 같다. 처음으로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가면을 벗고서 자신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갔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된다.”(170-2면)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키워드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항상 계획을 세우고, 뒤에서 조종하고, 은밀한 수단을 쓰고, 교활한 방법을 선택하지만”(171면), 결국 생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내 이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받아들이는 경험을 했거나 하게 됩니다. 탕자였던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 품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탕자와 야곱 같았던 우리를 받아주신 하나님, 우리의 잔꾀와 허영에서 벗어나 당신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풍성한 복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12. QT큐티체조. 사사기 11:31-40.

간단설명. 입다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돌아오고, 그의 딸은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 영접한다. 이에 입다는 옷을 찢으며 자신의 서원으로 인해 탄식한다.

성경본문. 사사기 11:32-40
한글본문.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영어본문.
32.Then Jephthah went over to fight the Ammonites, and the LORD gave them into his hands. 33.He devastated twenty towns from Aroer to the vicinity of Minnith, as far as Abel Keramim. Thus Israel subdued Ammon. 34.When Jephthah returned to his home in Mizpah, who should come out to meet him but his daughter, dancing to the sound of tambourines! She was an only child. Except for her he had neither son nor daughter. 35.When he saw her, he tore his clothes and cried, “Oh! My daughter! You have made me miserable and wretched, because I have made a vow to the LORD that I cannot break.” 36.”My father,” she replied, “you have given your word to the LORD. Do to me just as you promised, now that the LORD has avenged you of your enemies, the Ammonites. 37.But grant me this one request,” she said. “Give me two months to roam the hills and weep with my friends, because I will never marry.” 38.”You may go,” he said. And he let her go for two months. She and the girls went into the hills and wept because she would never marry. 39.After the two months, she returned to her father and he did to her as he had vowed. And she was a virgin. From this comes the Israelite custom 40.that each year the young women of Israel go out for four days to commemorate the daughter of Jephthah the Gileadite.

도움말.
아로엘(33절). 모압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되는 성읍이다.
아벨 그라밈(33절). 포도원의 목장이라는 뜻으로 암몬과 길르앗의 경계가 되는 성읍이다.
미스바(34절).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을 가리킨다.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39절). 성적 체험을 통해 아이를 낳아 가계를 잇는 것을 말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암몬과의 전쟁에 어떻게 함께하시는가(32-33절)?
⬇ 아래로 인간. 입다는 자기를 맞이하러 나온 딸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35절)?
? 물어봐. 입다는 자신의 딸을 정말 제물로 바쳐야 했을까(신 12:30-31, 레 27:8 참조)?
! 느껴봐. 나는 명분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친 적은 없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좀 더 자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Meditation. 지식이 없으면 큰 상처를 남긴다.

하나님은 입다의 전쟁에 함께하셔서(32절) 마침내 항복하게 하신다(33절).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그를 맞이하러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바로 외동딸이었다. 큰 놀라움과 충격 속에 입다는 옷을 찢으며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라고 외친다. ‘너’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딸 탓을 하는 것이다. 딸도 아버지를 다섯 번이나 언급하며 서원을 실행하라고 한다(36절). 서로를 향한 원망은 있었지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없었다. 성경은 분명 인신제사를 금하고 있고(신 12:30-31), 서원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면 감소시키거나 돌이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레 27:8). 입다가 능히 돌이킬 수 없으리라고 한 것은 잡류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일 뿐이다. 결국 잘못된 지식은 딸의 죽음을 초래했고, 입다는 자신의 후손을 잇지 못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을 오해해 마음이 힘들고 어려웠던 적이 없는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11. QT큐티체조. 사사기 11:23-31.

간단설명. 아모리 왕이 입다의 설명을 거부하고 전쟁준비 태세에 돌입하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고 입다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며 서원을 한다.

성경본문. 사사기 11:23-31
한글본문.
2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24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5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26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27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28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영어본문.
23.”Now since the LORD, the God of Israel, has driven the Amorites out before his people Israel, what right have you to take it over? 24.Will you not take what your god Chemosh gives you? Likewise, whatever the LORD our God has given us, we will possess. 25.Are you better than Balak son of Zippor, king of Moab? Did he ever quarrel with Israel or fight with them? 26.For three hundred years Israel occupied Heshbon, Aroer, the surrounding settlements and all the towns along the Arnon. Why didn’t you retake them during that time? 27.I have not wronged you, but you are doing me wrong by waging war against me. Let the LORD, the Judge, decide the dispute this day between the Israelites and the Ammonites.” 28.The king of Ammon, however, paid no attention to the message Jephthah sent him. 29.Then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Jephthah. He crossed Gilead and Manasseh, passed through Mizpah of Gilead, and from there he advanced against the Ammonites. 30.And Jephthah made a vow to the LORD : “If you give the Ammonites into my hands, 31.whatever comes out of the door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in triumph from the Ammonites will be the LORD’s, and I will sacrifice it as a burnt offering.”

도움말.
심판하시는 여호와(27절). 히브리어 ‘쇼페트’는 ‘샤파트’의 분사형으로 심판하시는, 다스리시는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재판관, 사사로도 번역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사사 여호와’로 부르는 것이다.
길르앗의 미스베(29절). 갓 지파의 북쪽경계로 라맛 미스베라고도 한다(수 13:26 참조).
번제물(31절).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을 말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선명한 논리를 붙든 입다를 어떻게 붙드시는가(29절)?
⬇ 아래로 인간. 입다가 전쟁의 부당성을 설명하는 주요 논리 세 가지는 무엇인가(23, 25, 26절)?
? 물어봐. 입다는 왜 자신을 영접하는 이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을까(31절)?
! 느껴봐. 나는 상대방의 논리적인 설명을 잘 듣는 편인가?
➡ 옆으로 실천해. 욕심이 앞설 때 이를 어떻게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겠는가?

Meditation. 욕심이 앞설 때
암몬 왕이 억지 주장을 내세울수록 전쟁의 명분이 없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지켜야 할 명분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었다(23, 25, 26절). 암몬 왕이 거부하자(28절), 입다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친히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에 사사가 되어 달라고 기도한다(27절). 그러자 하나님의 성령이 입다에게 임하시고, 입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전쟁에 나선다(29절). 이 전쟁이 철저히 하나님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다의 관심은 온통 승리에 집중돼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서원을 내뱉고 만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나와 자기를 영접하는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것이다(30-31절). 인신제사는 여호와가 가증하게 여기시는 끔찍한 것이지만(레 18:21 참조), 승리에 혈안이 된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서원을 하고 만다.
나는 어떨 때 욕심이 일어나는가? 이 때 지혜로운 친구의 조언을 잘 듣는 편인가, 아니면 나도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저지르고 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10. QT큐티체조. 사사기 11:12-22.

간단설명.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유를 묻고 이에 역사적 과거를 회상하며 암몬 왕이 주장하는 것이 부당함을 설명한다.

성경본문. 사사기 11:12-22
한글본문.
12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14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17이스라엘이 사자들을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하건대 나를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그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렀더니 18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 아르논 저쪽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지역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19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20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21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22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

영어본문.
12.Then Jephthah sent messengers to the Ammonite king with the question: “What do you have against us that you have attacked our country?” 13.The king of the Ammonites answered Jephthah’s messengers, “When Israel came up out of Egypt, they took away my land from the Arnon to the Jabbok, all the way to the Jordan. Now give it back peaceably.” 14.Jephthah sent back messengers to the Ammonite king, 15.saying: “This is what Jephthah says: Israel did not take the land of Moab or the land of the Ammonites. 16.But when they came up out of Egypt, Israel went through the desert to the Red Sea and on to Kadesh. 17.Then Israel sent messengers to the king of Edom, saying, ‘Give us permission to go through your country,’ but the king of Edom would not listen. They sent also to the king of Moab, and he refused. So Israel stayed at Kadesh. 18.”Next they traveled through the desert, skirted the lands of Edom and Moab, passed along the eastern side of the country of Moab, and camped on the other side of the Arnon. They did not enter the territory of Moab, for the Arnon was its border. 19.”Then Israel sent messengers to Sihon king of the Amorites, who ruled in Heshbon, and said to him, ‘Let us pass through your country to our own place.’ 20.Sihon, however, did not trust Israel to pass through his territory. He mustered all his men and encamped at Jahaz and fought with Israel. 21.”Then the LORD, the God of Israel, gave Sihon and all his men into Israel’s hands, and they defeated them. Israel took over all the land of the Amorites who lived in that country, 22.capturing all of it from the Arnon to the Jabbok and from the desert to the Jordan.

도움말.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12절).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느냐’, ‘너는 왜 나에게 적대적이냐’라는 의미다.
아르논(18절). 요단강 동쪽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사해 동쪽 중간 지점으로 흘러 들어오는 강 또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모압의 경계가 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이스라엘이 시혼과 모든 백성을 쳐서 승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21절)?
⬇ 아래로 인간.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과 싸우려는 이유는 무엇인가(13절)?
? 물어봐. 입다는 암몬 자손의 오해를 어떻게 설명하는가(15-22절)?
! 느껴봐. 나는 상대방의 부당한 주장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상대방의 오해를 논리정연하고도 부드럽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Meditation. 하나님 백성의 선명한 논리를 붙들라
입다가 군사령관이 되자마자 한 것은 암몬 자손에게 사자를 보내 쳐들어온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12절). 암몬 왕은 원래 요단 동쪽 사해 중간 지점에 있는 아르논 강에서부터 갈릴리 호수와 사해 중간쯤 위치한 얍복강 지역이 자신의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부당하게 점령한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응답한다(13절). 입다는 다시 사자를 보내 이들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각 나라의 경계를 지날 때마다 그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허락하지 않을 때는 그 땅의 경계를 돌아갔다. 뿐만 아니다. 아모리왕 시혼은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맞붙으려 했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넘겨주셨던 것이다. 입다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가 화를 내며 감정적으로 시비를 걸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분명하고도 정당한 논리를 차분히 설명하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9. QT큐티체조. 사사기 11:1-11.

간단설명. 이스라엘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오자 길르앗 사람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다.

성경본문. 사사기 11:1-11
한글본문.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영어본문.
1.Jephthah the Gileadite was a mighty warrior. His father was Gilead; his mother was a prostitute. 2.Gilead’s wife also bore him sons, and when they were grown up, they drove Jephthah away. “You are not going to get any inheritance in our family,” they said, “because you are the son of another woman.” 3.So Jephthah fled from his brothers and settled in the land of Tob, where a group of adventurers gathered around him and followed him. 4.Some time later, when the Ammonites made war on Israel, 5.the elders of Gilead went to get Jephthah from the land of Tob. 6.”Come,” they said, “be our commander, so we can fight the Ammonites.” 7.Jephthah said to them, “Didn’t you hate me and drive me from my father’s house? Why do you come to me now, when you’re in trouble?” 8.The elders of Gilead said to him, “Nevertheless, we are turning to you now; come with us to fight the Ammonites, and you will be our head over all who live in Gilead.” 9.Jephthah answered, “Suppose you take me back to fight the Ammonites and the LORD gives them to me–will I really be your head?” 10.The elders of Gilead replied, “The LORD is our witness; we will certainly do as you say.” 11.So Jephthah went with the elders of Gilead, and the people made him head and commander over them. And he repeated all his words before the LORD in Mizpah.

도움말.
길르앗(1절). 요단 동편의 비옥한 고원지역을 말한다.
돕(3절). 길르앗 북쪽에 있는 땅으로 의미상으로 좋다는 뜻이다.
잡류(3절). 언행이나 행실이 점잖지 못한 사람들로 직역하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장관(6절). 히브리어 ‘카찐’으로 주로 전쟁시의 군대장관 또는 사령관을 말한다.
미워하여(7절). 히브리어 ‘싸네’로 강한 미움 또는 증오를 의미한다.
머리(8절). 정치, 군사적 최고의 우두머리로 길르앗의 최고 지도자를 의미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입다와 길르앗 장로들에게 어떤 존재이신가(9-10절)?
⬇ 아래로 인간. 입다의 출생배경은 어떠한가(1-3절)?
? 물어봐. 길르앗 장로들은 왜 쫓아냈던 입다를 다시 찾아갔는가(6절)?
! 느껴봐. 날 배척했던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도움을 요청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으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Meditation. 세상의 편견을 뚫고 찾아오는 기회
입다는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난 용사였다. 어머니는 기생이었는데, 이방 우상을 섬기는 신전 창기였을 가능성이 크다(1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견제 받고 배척당했다(2절). 세상의 거절을 뒤로 하고 입다는 길르앗 북쪽 돕 땅에 거주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낙오한 인생이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암몬 자손의 침입에 위기감을 느낀 이스라엘이 입다를 찾아오는데, 하나님이 날 때부터 주셨던 강인함 때문이었다(1절). 그의 강인함은 주변의 잡류들을 끄는 힘이 있었다(3절). 길르앗 사람들은 이런 잡류들과 어울리는 입다를 무시하고 좋지 않게 봤지만 입다만한 큰 용사가 없었다.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전쟁의 사령관이 되어달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6, 8절). 더 나아가 그들의 머리, 즉 최고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한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세상의 거절과 소외가 반복될 때 희망을 포기하고 내 인생은 끝이라고 쉽게 좌절하진 않았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죄를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주로 광의적으로 정의해 “완전한 의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비해, 웨슬리안들은 웨슬리의 정의를 따라 죄를 주로 협의적으로 정의해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정의는 신자가 이 세상 속에서 성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에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답하고, 웨슬리안은 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죄의 두 가지 정의 중 어느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페친 여러분께서 판단하실 수 있도록, 번역을 마치고 판권 계약 중에 있는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끝난 후 명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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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은 흔히 죄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모든 것, 또는 그 뜻에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곤 한다 … 이 관점은 완벽한 의를 요구하는 이상적인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그 정황이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유한한 피조물도 그러한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정의에서 도출되는 것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날마다 말과 생각과 행위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소위 죄의 “광의적” 정의에 기꺼이 동의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즉시 이 광의적 정의에 반대해 죄의 “협의적” 정의를 내리곤 했는데, 이 정의는 죄를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으로 이해한다. 이 정의는 존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The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쓴 유명한 구절 속에 등장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태만, (사람들이 부적절하게 표현하곤 하는) 결점, 판단과 실행에서의 실수, 다양한 약점들을 대속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면에서는 대속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런 것들이 적절한 의미의 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하기 쉬운 상태의 몸에서 부득이하게 흘러나오는 실수들과 모든 연약성은 사랑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에서의 죄는 아닙니다 … 죄라고 불러 마땅한 것 즉 율법을 알면서 고의로 범한 것만이 아니라, 부당히 죄로 불리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생각 없이 범한 것도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죽을 운명인 인간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무지와 잘못의 자연적 결과인 비고의적 위반을 배제하는 완전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가당착을 피하기 위해 “무죄적 완전(sinless perfection)”이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비고의적 위반을 피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웨슬리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죄의 “광의적” 정의보다 죄에 관한 그의 두 번째 통찰이 신약성경의 죄 개념에 더 부합함을 말하고 싶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윤리적 개념의 죄이지 법률적 개념의 죄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죄는 지식이나 규범 뿐만 아니라, 선택이나 동기에 관한 요소를 포함한다.

죄의 정의에 관한 이 모든 논의는 신자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문제로 넘어가면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죄의 율법적 또는 “광의적” 정의는 필연적으로 죄의 율법적 또는 “협의적” 정의를 그 속에 포함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중생한 사람, 그리고 특별히 성결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나은 판단의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것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가 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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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마흔 한 개의 구절 전체를 철저히 검토해 발견한 내용을 요약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간략한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죄의 법률적 정의는 간단히 말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다. 죄의 윤리적 정의는 웨슬리가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 서른 일곱 개의 구절 모두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임의로 다섯 구절을 선택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서에서 사례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 14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이런 해석은 이미 가련한 사람을 이전보다 훨씬 끔찍한 위치에 두는 해석임이 분명하다! 그가, 알려졌던 알려지지 않았든, 또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피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 주님의 요구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둘째, 로마서 6장 15절의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구절이 되고 만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신양성경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셋째, 바울 서신 중에서 또 한 구절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장 15절의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깨어 의를 행하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구절이 된다.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그 언제라도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해석은 성경구절을 터무니없게 만들어버리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이 구절은 신약 시대의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말씀이 된다. “깨어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네 번째 사례는 히브리서 10장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인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소용 없을 것임을 경고하는 준엄한 말씀이다.

“짐짓”(willfully, KJV, 고의로, 일부러 – 역주)이라는 부사는 우리가 다루는 죄의 문제가 의지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어로서,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도해본다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고의로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준엄한 경고의 말씀을 보존하면서도, 신약성경 전체의 취지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해석은 타락한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현재 고의로, 알려진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유효하다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모두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원문은 의도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다는 의미의 분사 형태이기 때문에, 그런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진정한 회개로 범죄하기를 멈추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사로서 전적으로 충분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다룰 마지막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9절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여기서 죄와 관련해서 두 용어는 명사이고, 두 용어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문맥 속에서 의미상 조화를 이룬다.

먼저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 기준에서 벗어났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절대적 의의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해석은 틀림없이 하나님 자녀의 수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히 모든 유한한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윤리적 정의로 돌아가, 죄에 사용된 동사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깨닫고나면, 우리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계시 전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였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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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 지점에서 “그렇지만 죄의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무슨 차이를 가져오는가? 이런 논의는 그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로 논쟁을 벌이자는 것 아닌가? 인간의 연약성에서 비롯된 기억에서의 실수나 판단의 오류, 행동의 불완전성을 죄로 부르면 왜 안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내 대답은 삼중적이다. 첫째, H. 오톤 와일리(H. Orton Wiley)의 말로 표현하면, “죄가 아닌 것을 죄로 부르면, 실제로 범죄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 된다.” 죄의 이 “넓은” 또는 율법적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육체에 매인 인간이 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 받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죄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어떤 것도 죄로 만들지 않는 것과 다를바없다. 죄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만약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이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도 죄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그렇게 흔히 죄로 일컬어지는 것들과, 거짓말이나 도둑질이나 부도덕함 같은 진짜 죄들 사이에 아무런 질적 차이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종류의 죄를 향해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의식과 양심은 여기에 결정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약속을 잃어버린 것이나 약속을 깨드린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무지에 의해 사실을 잘못 진술한 것이든 거짓말에 의해 잘못 진술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약속된 것은 지켜지지 않았고, 또 진실이 아닌 것이 진술되었다.

그러나 주관적, 윤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약속을 잃어버린 경우와 잘 알지 못해 잘못된 진술을 한 경우 모두에는 후회는 하더라도,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죄는 아니다. 기억에서의 실수와 무지는 유감스러운 것이고,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정죄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양심은 언제나 죄의 본질은 의도와 동기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법의 실체적 또는 객관적인 면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선의로 실수하는 것을 허가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선택과 의도와 목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셋째, 이 구분이 지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 인간의 실수와 연약성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죄와 예리하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마 1:21). 그는 우리를 육적인 죄에서 씻어주신다(요일 1:7).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동정하시고 체휼하신다(히 4:15). 이는 한편에서는 주님께서 가지신 우리의 내적, 외적인 죄를 향한 태도와,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나약함에 대한 태도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책망하시고(요 16:8), 우리를 죄성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롬 8:2).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롬 8:26). 자범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죄성을 씻어주시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약성은 순간적 경험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전쟁터에서 매일 매일 직면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극복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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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글은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적 율법관을 적용함으로 웨슬리안들이 강조하는 성경적 성결론을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오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완료된 후에 명기하겠습니다). 장기영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05082018.

복음을 왜곡시키는 14가지 방법 (by 하워드 스나이더) 장기영 박사(서울신대)

— 복음을 왜곡시키는 14가지 방법 (by 하워드 스나이더) —

1. 복음을 주로 로마서를 통해서만 설명하라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성경 전체를 공부하고 성경을 그 전체의 관점에서 해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는 완고한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고통을 당한다 (나의 글 “Misplacing Romans (로마서 잘못 읽기)”를 참고하라).

2.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라
성경은 사적이고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개인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많은 방법과 많은 비유를 통하여 모든 것의 화해를 가르친다 (엡1장, 골1장). 그리고 심판 역시 가르친다.

3. 하늘만 목적으로 삼으라
사람들은 “하늘에 가는 것”을 구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과 초대교회 신조들은 “하늘로 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 전체의 궁극적 구원에 초점을 두지, 우주적으로 땅과 하늘이 영원히 분리될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4.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시키라
이 방법은 교회에 “불법의 비밀”이 침범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표징 중 하나이다. 사탄은 단지 우리에게 아주 소수만 (그리고 주로 특별한 종류의 남성들만) “사역”으로 부르셨다고 납득시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교회의 유효한 능력을 90%나 감소시켜버린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라는 편견은 교회 안의 다른 어떤 편견보다 교회를 약화시킨다. 이 편견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성경적 교리와 성령의 은사들과 모든 성도들을 디아코니아(사역과 봉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소명을 지속적으로 파괴한다.

5. 경제와 정치 문제는 복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라
경제와 정치를 복음에서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제자도와 상관 없는 문제로 만드는 것은 비성경적 이원론이다. 복음은 경제적, 정치적 실체이며, 따라서 교회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경제와 정치가 복음의 빛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포괄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6. 공동체를 우선시하지 말라
신약성경 저자들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 그리스도의 몸,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또 서로에게 참여하는 공동체를 중시하였다. 공동체가 성경적 코이노니아로서의 나눔에 덜 진실할수록, 교리적 논쟁이 더 중시되고, 교회는 공동체가 아닌 다른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것이 내가 『왕의 공동체 (Community of the King)』 및 다른 책들에서 공동체를 주제로 많이 다루는 이유이다.

7. 구약을 무시하라
두 가지 가장 일반적인 실수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라고 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무시하는 것과, 신약이 구약의 모든 중요한 진리들에 영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 잘못된 통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 예로, “약속된 땅”은 “천국”이나 어떤 내적인 영적 체험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주 성경의 역사적 맥락이나 성경 자체의 의미와 전혀 동떨어진 “영적인 사실들”을 억지로 구약 속에서 찾으려 하게 된다.

8. 공의(justice)를 개인적 의(personal righteousness)로 제한하라
시가서, 예언서, 율법서, 지혜서로서 구약 성경은 끊임없이 공의와 개인적인 의를 동일한 종합적 실재의 양면으로 다룬다. 정의와 개인적인 의가 얼마나 자주 짝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둘이 성경에서 얼마나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는지 살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주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와 개인적인 의를 분리시켰다. 예를 들어, 의가 개인적 도덕성을 의미한다면, 정의는 하나님께서 대속이나 심판을 통해 직접 다루시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9. 중보기도를 경시하라
나는 성경에서 모세, 다윗, 선지자들, 욥,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모범 및 서신서들에서 기도에 대해 읽으면 읽을 수록, 나와 교회가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라는 중요한 사역을 경시해왔음을 확신하게 된다. 기도의 신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 백성들의 지속적인 중보기도는, 우리 자신이 당면한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나라와 백성과 종교들 간의 관계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주 그렇게 해왔다. 중보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중요한 방편이다.

10. 제자는 되지 말고 신자만 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신약은 “신자들”이라는 말을 아주 드물게 사용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형제들” 또는 “그들” 같은 말 대신에 “신자들”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적 용어들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수가 아닌 제자들의 수, 그리고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다.

11.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체하게 만들라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주권, 사랑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마태복음에서의 “하늘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달리 표현한 것임을 알았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와 분리될 수도 없는 교회와의 신비한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고, 천상적이면서 지상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순간적면서 점진적이고, 내적이면서 외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12. 신앙을 단지 삶의 작은 부분만이 되게 하라
우리는 일상적 삶과 신앙적 삶과 구분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작은 일부분이 되도록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 작은 일부분마저도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감당하라. 성경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항상 그러하다. 성경적으로 보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사랑은 믿음으로 가능케 되어서, 소망 즉 하나님께서 창조 전체를 온전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확신에 의해 힘을 얻는다.

13. 창세기 9장을 무시하라
“언약” 혹은 “계약” 신학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신학들은 거의 언제나 (창3:15절을 잠깐 언급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부터 다룬다. 하지만, 성경에서 명백한 첫 번째 언약은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세상과의 언약”(창9:13)을 맺으시는 데서 발견된다. 분명히 반복되고 강조되는 점은,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 및 모든 살아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과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만약 구원에 대한 이해가 창세기 3장에서 12장으로 바로 뛰어넘어버린다면, 우리는 창조 질서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놓치게 될 것이고, 성경 속에 있는 다른 모든 가르침도 왜곡하게 될 것이다.

14. 제자도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돌봄과 상관없는 것이 되게 하라
우리가 창조 질서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성경이 약속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 축소시키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손해이다. 우리는 교회를 메마르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지나치게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되고, 선교의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제자도와 창조의 돌봄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교회는 인내와 겸손 속에서 “견고한 진을 파할 정도로” (고후10:4) 강해질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초점을 옮겨 복음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면 문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뒤튼다, 왜곡한다, 구부린다, 침식한다, 중화한다, 약하게 한다, 취소한다, 꺾어버린다 등 어떤 동사를 사용하든, 문제는 지속될 것이고, 주의 깊게 성경에 기초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제자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 속에서 제자들이 복음 왜곡의 문제와 분투했음을 본다. 그러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할 때까지”(사11:9) 하나님의 성령은 여전히 능력 있게 그리고 신기하게 일하시고, 여전히 약속을 성취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모든 진리” (요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출처: http://howardsnyder.seedbed.com/…/14-favorite-ways-to-twis…/
2014년 5월 6일에 장기영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