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죄를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주로 광의적으로 정의해 “완전한 의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비해, 웨슬리안들은 웨슬리의 정의를 따라 죄를 주로 협의적으로 정의해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정의는 신자가 이 세상 속에서 성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에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답하고, 웨슬리안은 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죄의 두 가지 정의 중 어느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페친 여러분께서 판단하실 수 있도록, 번역을 마치고 판권 계약 중에 있는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끝난 후 명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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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은 흔히 죄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모든 것, 또는 그 뜻에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곤 한다 … 이 관점은 완벽한 의를 요구하는 이상적인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그 정황이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유한한 피조물도 그러한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정의에서 도출되는 것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날마다 말과 생각과 행위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소위 죄의 “광의적” 정의에 기꺼이 동의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즉시 이 광의적 정의에 반대해 죄의 “협의적” 정의를 내리곤 했는데, 이 정의는 죄를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으로 이해한다. 이 정의는 존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The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쓴 유명한 구절 속에 등장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태만, (사람들이 부적절하게 표현하곤 하는) 결점, 판단과 실행에서의 실수, 다양한 약점들을 대속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면에서는 대속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런 것들이 적절한 의미의 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하기 쉬운 상태의 몸에서 부득이하게 흘러나오는 실수들과 모든 연약성은 사랑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에서의 죄는 아닙니다 … 죄라고 불러 마땅한 것 즉 율법을 알면서 고의로 범한 것만이 아니라, 부당히 죄로 불리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생각 없이 범한 것도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죽을 운명인 인간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무지와 잘못의 자연적 결과인 비고의적 위반을 배제하는 완전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가당착을 피하기 위해 “무죄적 완전(sinless perfection)”이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비고의적 위반을 피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웨슬리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죄의 “광의적” 정의보다 죄에 관한 그의 두 번째 통찰이 신약성경의 죄 개념에 더 부합함을 말하고 싶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윤리적 개념의 죄이지 법률적 개념의 죄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죄는 지식이나 규범 뿐만 아니라, 선택이나 동기에 관한 요소를 포함한다.

죄의 정의에 관한 이 모든 논의는 신자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문제로 넘어가면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죄의 율법적 또는 “광의적” 정의는 필연적으로 죄의 율법적 또는 “협의적” 정의를 그 속에 포함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중생한 사람, 그리고 특별히 성결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나은 판단의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것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가 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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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마흔 한 개의 구절 전체를 철저히 검토해 발견한 내용을 요약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간략한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죄의 법률적 정의는 간단히 말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다. 죄의 윤리적 정의는 웨슬리가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 서른 일곱 개의 구절 모두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임의로 다섯 구절을 선택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서에서 사례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 14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이런 해석은 이미 가련한 사람을 이전보다 훨씬 끔찍한 위치에 두는 해석임이 분명하다! 그가, 알려졌던 알려지지 않았든, 또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피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 주님의 요구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둘째, 로마서 6장 15절의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구절이 되고 만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신양성경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셋째, 바울 서신 중에서 또 한 구절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장 15절의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깨어 의를 행하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구절이 된다.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그 언제라도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해석은 성경구절을 터무니없게 만들어버리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이 구절은 신약 시대의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말씀이 된다. “깨어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네 번째 사례는 히브리서 10장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인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소용 없을 것임을 경고하는 준엄한 말씀이다.

“짐짓”(willfully, KJV, 고의로, 일부러 – 역주)이라는 부사는 우리가 다루는 죄의 문제가 의지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어로서,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도해본다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고의로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준엄한 경고의 말씀을 보존하면서도, 신약성경 전체의 취지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해석은 타락한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현재 고의로, 알려진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유효하다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모두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원문은 의도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다는 의미의 분사 형태이기 때문에, 그런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진정한 회개로 범죄하기를 멈추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사로서 전적으로 충분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다룰 마지막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9절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여기서 죄와 관련해서 두 용어는 명사이고, 두 용어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문맥 속에서 의미상 조화를 이룬다.

먼저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 기준에서 벗어났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절대적 의의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해석은 틀림없이 하나님 자녀의 수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히 모든 유한한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윤리적 정의로 돌아가, 죄에 사용된 동사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깨닫고나면, 우리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계시 전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였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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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 지점에서 “그렇지만 죄의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무슨 차이를 가져오는가? 이런 논의는 그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로 논쟁을 벌이자는 것 아닌가? 인간의 연약성에서 비롯된 기억에서의 실수나 판단의 오류, 행동의 불완전성을 죄로 부르면 왜 안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내 대답은 삼중적이다. 첫째, H. 오톤 와일리(H. Orton Wiley)의 말로 표현하면, “죄가 아닌 것을 죄로 부르면, 실제로 범죄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 된다.” 죄의 이 “넓은” 또는 율법적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육체에 매인 인간이 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 받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죄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어떤 것도 죄로 만들지 않는 것과 다를바없다. 죄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만약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이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도 죄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그렇게 흔히 죄로 일컬어지는 것들과, 거짓말이나 도둑질이나 부도덕함 같은 진짜 죄들 사이에 아무런 질적 차이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종류의 죄를 향해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의식과 양심은 여기에 결정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약속을 잃어버린 것이나 약속을 깨드린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무지에 의해 사실을 잘못 진술한 것이든 거짓말에 의해 잘못 진술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약속된 것은 지켜지지 않았고, 또 진실이 아닌 것이 진술되었다.

그러나 주관적, 윤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약속을 잃어버린 경우와 잘 알지 못해 잘못된 진술을 한 경우 모두에는 후회는 하더라도,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죄는 아니다. 기억에서의 실수와 무지는 유감스러운 것이고,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정죄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양심은 언제나 죄의 본질은 의도와 동기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법의 실체적 또는 객관적인 면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선의로 실수하는 것을 허가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선택과 의도와 목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셋째, 이 구분이 지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 인간의 실수와 연약성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죄와 예리하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마 1:21). 그는 우리를 육적인 죄에서 씻어주신다(요일 1:7).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동정하시고 체휼하신다(히 4:15). 이는 한편에서는 주님께서 가지신 우리의 내적, 외적인 죄를 향한 태도와,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나약함에 대한 태도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책망하시고(요 16:8), 우리를 죄성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롬 8:2).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롬 8:26). 자범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죄성을 씻어주시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약성은 순간적 경험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전쟁터에서 매일 매일 직면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극복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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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글은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적 율법관을 적용함으로 웨슬리안들이 강조하는 성경적 성결론을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오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완료된 후에 명기하겠습니다). 장기영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050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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