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노예의지, 그 분기점으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 어렵다 생각말고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종교개혁500주년기념 및 웨슬리회심기념 공동학술대회 발표논문<서울신대 장기영 교수>
–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그 분기점으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 –
(보완 후 학술지 게재 예정이므로, 학술목적의 인용은 삼가주세요)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성결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의 가르침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는 신중심적 구원론에서 전적으로 일치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역할의 관계에 대해 두 신학자는 각각 노예의지와 자유의지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노예의지를 가르친 루터의 신학과 자유의지를 가르친 웨슬리의 신학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게 된 핵심 사상으로서 존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대한 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소속된 목회자이자 웨슬리 학자로서 필자가 평소에 느꼈던 안타까움과 관련된다. 한국교회 내에서 존 웨슬리를 교단의 창시자 또는 교단 신학자로 표방하는 교단들(기성, 예성, 나성, 기감 등)은 다른 교단들과 한국 복음화를 위해 동역하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신학적인 토론의 자리에서만큼은 웨슬리는 행위구원을 가르친 펠라기우스주의자로 자주 낙인 찍히곤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교세가 가장 크다는 현실적인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웨슬리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부재가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의 토대인 선행은총론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대한 소개는 개신교 신학 내에서 종교개혁 신학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던 웨슬리 신학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선행은총론은, 카톨릭의 인간의 행위 중심적 구원론을 바로잡기 위해 구원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린 종교개혁 신학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인격적 반응의 책임을 부여한다는 웨슬리의 성결교회 신학 간 체계 비교를 위한 중요한 틀을 제공해준다. 웨슬리 신학 자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선행은총론은, 웨슬리가 구원에서 개인의 인격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강조를,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루터 신학의 핵심 교리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열쇠라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충분한 주제이다.

논문의 전개 방법은, 먼저는 루터와 웨슬리 신학의 차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던 중세 스콜라신학의 구원론에 루터와 웨슬리가 각각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조사한 후, 노예의지와 자유의지가 어떻게 그들의 신학 전반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과 웨슬리의 성결교회 신학 체계의 차이를 분명히 한 후, 차이를 만드는 핵심요소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선행은총의 개념 및 선행은총론 형성에 영향을 끼친 신학 전통들을 살펴보고, 관련 성경구절에 대한 웨슬리의 해석 및 선행은총론이 그의 신학에 부여한 신학적 특성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

I. 중세 스콜라신학의 구원론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의 다른 반응

구원에서 은총과 행위의 역할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의 견해를, 카톨릭 신학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통해 살펴보면 두 신학자의 시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시작을 알리는 어거스틴(354-430)의 신학은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참여를 함께 강조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한편에서, 예정론, 값없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인간의 타락” 및 “선행을 위한 은총의 필연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아가페 등은 오직 은혜를 강조한다. 다른 한편, 은혜는 인간의 의지를 “나쁜 의지에서 좋은 의지로” 변화시키며, 이미 “선하게 된 의지에는” 조력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을 보상으로 주신다. 이러한 어거스틴 신학의 양면성이 이후 스콜라신학자들이 “공로의 가르침을 쌓아나가는 기초를 놓게 된다.”

최고의 스콜라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인간 공로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구원의 과정은 은혜의 주입을 통해 죄인이 신앙을 갖게 됨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지적인 활동인 신앙은 불완전한 회심을 가져오므로, 의지적 활동인 사랑이 회심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신앙이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신앙만으로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영생을 받는 데 은혜는 첫 번째 원인이라면, 인간의 공로는 두 번째 원인이 되며, 이를 위해 사랑이 핵심 요소가 된다.

중세 후기 유명론 신학자 가브리엘 비엘(1420-1495)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피할 수 있기에,” 은총이 없이도 “자연적인 능력”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상으로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구원의 유일한 공로가 아닌 “주된” 공로이며, “우리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충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공로는 구원에 무가치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기 안에 있는 것(the human in se)”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구원의 방법이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보상은 반드시 따르기 때문에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비엘의 칭의관은 “본질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이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중세 카톨릭 신학 전체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 모두를 가르친 “어거스틴적 종합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은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하지만 않았을 뿐, 인간 행위의 중요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신학을 발전시켰다. 어거스틴 신학의 양면성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수용하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은 거부하였다. “원죄를 하찮게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스콜라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의롭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계명의 준수도 필요하다’ … 여기서 그리스도는 부정되고 신앙은 폐지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만 속한 구원이 율법의 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어거스틴과 루터를 수용하여 원죄 교리가 기독교와 이교를 구분하는 “십볼렛”이라 가르쳤다. 또한 루터가 가르친 “믿음에 의한 구원”이 모든 로마 카톨릭적 기만의 “근본을 강타”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웨슬리의 판단에, 루터는 “성화에 대해 무지”한 채 이신칭의만 가르쳤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칭의는 전혀 모르면서” 성화라는 교리는 보존했다. 루터는 구원에서의 신인협력 때문에 어거스틴을 비판했다면, 웨슬리는 정반대의 측면, 즉 어거스틴이 인간의 도덕적 결정 능력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부인했다는 사실을 비판하였다.

사랑이 신앙을 보완해야 온전한 회심이 된다고 한 아퀴나스를 루터는 “모든 이단과 오류, 복음 말살의 근원”으로 비난하였다. 아퀴나스의 주장은, 신앙을 폄하한 후 신앙에 없는 능력이 사랑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구원과 연관 짓는 일은, 은혜와 행위를 뒤섞고, 복음과 율법을 뒤섞어, 은혜를 행위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공로이며”, “그들이 사랑을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앙을 말한다” 라고 단언하였다. 죄인의 변화는 오직 믿음 또는 오직 성령과만 연결시켰다.

웨슬리는 루터처럼 신앙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강조하여 아퀴나스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신앙은 수단이며 신앙의 목적이 성결임을 가르친 점에서는 아퀴나스와 일치한다. 신자 자신의 성화는 부인하고, 성화를 외부로부터 의의 전가에 의존시킨 루터와 달리, 웨슬리와 아퀴나스는 모두 성화를 신자 자신 속에 이루어지는 “영혼의 습관적 기질”로 보았다. 웨슬리가 성결이 은총의 주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점에서도 아퀴나스와 유사하다. 웨슬리가 성품의 변화를 강조한 것은 “Malebranche, Norris, Cudworth 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아퀴나스적 유산”이다.

비엘에 관한 루터의 생각은 오버만이 잘 정리하였다. “만약 비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말이 된다 … 나 자신에게서 의롭게 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의지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율법의 범위와 죄의 심각성을 오해”한 데 기인한다. 루터에게 은혜와 공로는 “상호 배타적”이며, “신앙이 모든 행위와 의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웨슬리는 영국 유명론 전통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영국국교회 신학의 원천은 “영국 유명론의 자유의지 전통” 및 거룩한 삶 신비주의 전통(the holy living mysticisms)”과 연결된다. 영국국교회주의는 “옥스포드 유명론자들을 거쳐,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 후기 교부들의 전통”과 연결된다. 유명론자들의 “자기 안에 있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개신교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았지만, 영국에서는 살아남아 “신앙과 행위 모두”를 강조하는 “영국국교회 특유의 신학적 특징”을 만들었고, “이 영국국교회 신인협동 전통이 웨슬리 신학에 자양분을 공급하였다.” 아우틀러는 웨슬리를 “도덕주의와 신앙지상주의라는 두 극단”을 피하면서 “오직 믿음과 거룩한 삶의 반제(antithesis)”를 통합한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영국성공회 [via media, 중도신학] 신학자”라고 말한다. “제3의 대안”으로서 웨슬리의 방법은, 개신교적 이신칭의의 은혜 및 카톨릭적 실제적 의의 분여의 은혜의 바탕 위에서, “중세의 자신에게 있는 것(in se est )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전통”을 접목한 것이다.

그 결과 루터와 웨슬리는 “신앙의 복음”에서는 “깊은 유사성”을 가진 반면, “복음전도, 그리스도인의 양육, 그리고 성결”에 대해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루터의 관점에서 보면, 웨슬리는 이신칭의와 함께 “인간 안에 있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실질적으로 펠라기우스적”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엘과 다르다. 그의 인간의 책임 강조가 어떤 점에서 종교개혁적 은총의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의 선행은총론이다.

II. 루터 신학과 웨슬리 신학의 조직신학적 체계 비교

1. 마틴 루터의 신학

로마 카톨릭의 구원론에 반대하여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 루터의 신학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구원과 거룩한 삶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하다고 하는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 위에 건설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가 가르친 전적타락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이 죄로 가득하다 (2) 한 인간 속을 들여다보아도 죄로 가득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다 (3) 죄는 인간을 사탄의 지배 아래 종속시켰다 (4) 심지어 … 신자라도 항상 죄인일 뿐이다.”

루터의 신자 묘사에는 세 가지 대조가 나타난다. (1)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지만 자신의 본성으로는 죄인일 뿐이다. (2) 신자는 미래에 의롭다 하실 하나님의 약속에서는 의롭지만, 실제로는 죄가 가득하다. (3) 성령이 신자의 의지를 다스릴 때는 의롭지만, 자기 의지로는 죄의 노예일 뿐이다. 신자의 순종은 성령의 결정에 따라 “불변의 필연성에 의한 (by the necessity of immutability)” 수동적인 순종일 뿐이다. 따라서, 루터에게는 신자라도 자기 자신의 의지로는 죄의 노예일 뿐이다. 인간의지의 노예성 강조는, 카톨릭의 공로사상이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념 위에 세워진 것을 간파하였기에, 자유의지를 부인함으로써 공로사상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인간론에서의 노예의지론과 인간의 무능은,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및 예정의 교리로 연결된다. 루터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다스리는 이 세상 및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고, 오직 필연과 은혜만이 절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다스림을 가르쳤다. 루터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은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서 나타난다.

노예의지론과 하나님의 주권의 기독론적 표현이 “행복한 교환” 또는 이중전가, 즉 구원은 신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됨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 이루어진다는 교리이다. 루터에게는 성화 역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성화이다. 신자가 의인이자 죄인이며, 이 세상에서 신자 자신의 의는 시작되지만 완성될 수 없는 이상 성화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만 가능하지, 신자 자신의 불완전한 의에 기초할 수 없다.

성령론에서 루터 신학의 신중심성은 성령 없이는 율법과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는 가르침에서 나타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인간은 율법적 사고에 매여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조명 없이 죄인은 자신을 변호하므로 율법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은 신자의 내부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외부에서 찾아오시는 성령께 의존한다. 성령에 의한 성화의 가르침에서도 루터는 신중심성을 나타낸다. 즉, 성령에 의한 신자의 변화는 긍정하면서도,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의 신자는 전혀 선이 없는 죄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공로에 대한 생각을 철저히 차단하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다.

구원론에서 루터는 구원의 모든 것을 신앙으로 돌리되, 사랑에는 아무 것도 돌리지 않는다. 신앙은 지성, 감성, 의지, 즉 인격 전체의 변화, 율법 이해와 율법의 성취,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 세상과 육체와 지옥을 이김” 등 구원의 모든 측면을 내포한다. 루터가 구원과 변화된 삶 모두를 믿음으로 설명하는 것은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것이다. 반면, 루터는 인간의 사랑은 죄로 오염되었다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믿음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 및 인간의 사랑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루터 신학의 신중심성의 구원론적 표현이다.

인간론에서 루터는 노예의지를 부인하는 것 자체를 인간의 교만으로 설명한다. 자유의지를 통한 공로 주장은 하나님께로의 의존을 거부하고 독립을 꾀하는 것이다. 선행과 순종을 핑계로 자력구원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죄에 넘어지게 하심으로 교만을 깨뜨리시고 겸손케 하신다. 이 세상에서 성결이 불가능한 이유는 죄인으로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루터에게는 기독교 윤리의 실천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즉, 신자가 세상 나라 속에서도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초는 칭의이다. 구원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짐을 알게 될 때, 신자는 공로를 통한 하나님께로의 상향적 접근, 이기적 관심에서의 선행,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른 행위들의 구분, 영적 세속적 직업의 구분에서 해방되어, 이 세상에서, 이웃과 함께, 직업과 세속적 신분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이상에서 루터의 신학은 모든 주제들을 통해 하나님 중심적 신학이라는 중심 동기를 드러낸다. Watson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이라는 슬로건은 칼빈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게 루터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 그대로, 루터 자신이 자신의 신학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신학이라고 설명하였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악과 무능만을 돌리는 노예의지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 존 웨슬리의 신학

웨슬리는 신학의 모든 주제들에서 루터만큼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은혜의 강조가 결코 인간의 무책임과 태만, 방종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먼저, 인간론에서 루터의 노예의지론과 대칭을 이루는 웨슬리의 주장이 자유의지론이다. 웨슬리는 원죄와 인간의 타락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인간의 인격성 및 책임성과 관련된 기능들을 회복시키셨음을 가르쳤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이고 책임성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의 회복이 반드시 교만과 공로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예의지론적 숙명론과 패배주의로부터 벗어나, 책임 있는 인격체로서 하나님께 응답하게 한다. 웨슬리에게 하나님 예배의 본질은 인간을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낮추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뛰어난 능력과 기능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데 있다.

인간론에서 자유의지는 신론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본성 강조와 연결된다.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전능하심으로 강제하시지 않고, 사랑의 본성을 따라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으로 인도하신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마저도 가능해지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심판을 통해 확립되므로,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허용적 주권을 침해하지는 않는다. 이로 인해 세상의 많은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불순종과 무책임, 태만의 결과일 수 있다.

기독론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으로 설명된다. 예언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셨다. 제사장 그리스도는 죄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웨슬리는 칭의가 죄 용서임을 강조하면서, 루터의 이중전가 교리를 부인하였다. 그 이유는 “율법을 심각하게 깨뜨린 신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순종을 한 것처럼” 인정된다면, 율법무용론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신자의 순종과 연결시켰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왕이시지만, 왕권은 오직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신자의 순종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순종의 동기와 방향과 능력을 부여한다.

성령의 은혜 역시 순종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현존이자,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심으로 신자의 본성의 새로운 구성요소가 되신다. 외부로부터 때때로 찾아오는 성령의 역사로서 루터의 성화 개념과 비교하면, 웨슬리의 성화는 “성품의 변화를 가져오는 신자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으로서, 신자 자신의 능동적 의라는 관점에서 훨씬 진전된 개념이다. 신자 안에서 신자의 본성을 변화시키시고 의의 동력을 일으키시는 성령의 내주와 능력 부으심을 바탕으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성결한 마음과 삶이 가능해진다.

웨슬리의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강조점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 용서에서 끝나지 않고 죄를 이길 능력까지 주시므로, 구원은 성결을 포함한다. 웨슬리의 구원론은 또한 믿음과 사랑의 이중적 강조점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은 자칫 나태와 방종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랑은 나태와 방종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믿음이 행위를 낳지만,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하는 그 자체만의 역할이 있다. 구원론에서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결, 은총과 책임 모두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는 은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웨슬리는 이타적 동기와 행복의 동기 모두를 중시하였다. 죄와 거룩하지 못한 성품은 그 자체가 불행이라면, 사랑과 거룩한 성품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성결에서 나오는 행복은 자기 중심적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이웃, 자신과 평화로서 행복이다. 참된 믿음에 의한 영원한 행복 및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기대는 신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거룩하고 이타적 삶을 사는 데 동기부여가 된다. 웨슬리의 윤리에서 하늘, 이타적 사랑, 행복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상에서 다룬 루터 신학과 웨슬리 신학을 종합적으로 비교해보면, 루터는 신학 전반에서와 각각의 주제들에서 인간의 전적타락을 바탕으로 인간의 무능 및 어떤 행함과 헌신과 순종도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인간 삶과 구원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을 강조하는 신중심성을 나타낸 데 비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되 은혜가 순종과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는 동기와 목표와 능력으로 작용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율법주의를 통한 인간의 자기 우상화의 교만을 경계하였다면, 웨슬리는 율법주의를 통한 교만뿐만 아니라, 신앙을 빙자한 태만과 방종, 거룩하지 못한 성품과 삶, 즉 율법무용론을 함께 경계하였다.

III.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그 분기점으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

이상에서 본 루터 신학과 웨슬리 신학간 차이를 논문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시 정리하면, 루터는 원죄와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로부터 인간은 구원과 선행에 무능하다는 노예의지론을 끌어내고, 구원과 거룩한 삶 여부를 하나님의 결정(예정)으로 돌리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웨슬리는 원죄와 인간의 전적타락에서 루터와 일치하지만, 선행은총이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회복시켰기 때문에 구원이 예정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두 신학의 차이를 만드는 요소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선행은총의 개념

어원적으로 “선행하는 (Prevenient)” 이라는 말은, “이전에 (before)” 를 의미하는 라틴어 prae 와 “오다 (to come)” 를 의미하는 venire 에서 유래하였다. 선행은총은 ~ 보다 먼저 오는 은총, 혹은 ~ 이전에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 신학에서 선행은총 개념은 두 가지 용례로 쓰인다. 첫째, “협의적” 의미로 선행은총은 “칭의” 이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협의적” 선행은총을 매덕스는 “칭의 이전에 타락한 인간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련된 교리라고 설명한다.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이 칭의 이전부터 부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은 아니지만, 회복을 위한 하나님 역사의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광의적” 의미로 선행은총은 “은총의 선행 (prevenience of grace)” 즉 “신앙의 가장 초기적 표현에서부터 성화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익한 인간의 결정 및 행위는,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먼저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은총이 칭의 이전부터 역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칭의 이후 성화의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신자를 돕기 위해 먼저 능력을 부어주신다고 보는 관점이다. 자신의 글에서 “선행은총”이라는 용어를 명시했을 때 웨슬리는 주로 “협의적” 의미를 지칭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웨슬리의 글 전체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의 원천

웨슬리의 선행은총 사상의 출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으로, 요1:9, 6:4, 12:32절, 행10장과 롬2:14-16절과 같은 신약성경 구절들이 선행은총을 암시한다. 맥고니글은 웨슬리가 “성경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선행은총론을 통해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도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응답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게 되었다고 바르게 분석한다.

둘째로, “고대와 중세 신학”으로, 동방교부들에게서 그 개념이 나타나며, 서방 신학자들 중에서는 어거스틴이 『자연과 은총』 (De natura et gratia) 에서 “선행은총”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행은총과 뒤따르는 은총의 관계를 다루었다.

셋째로, 영국국교회와 청교도 및 장로교 신학자들 을 포괄하는 16~18세기 영국 개신교 신학의 영향이 결정적이다. 영국국교회 39개 신조(제10조)는 구원에서 은혜의 우선성 및 지속성에 관한 선행은총 교리를 담고 있다.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 역시 구원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광의적 선행은총 사상을 담고 있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양심, 창조를 통한 계시, 성령의 깨우치심 등으로 설명한 16-18세기 영국 개신교 신학자들로부터 선행은총의 기본 개념, 용어, 성경 해석의 근거를 물려받았다.

넷째로, 또 하나의 중요한 출처는,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1648-1690)이다. 웨슬리가 발췌하거나 인용한 바클레이의 글은 원죄의 교리,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를 바탕으로 성령의 빛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임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항함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할 가능성 및 바르게 반응하여 구원으로 나아갈 가능성 등을 언급하였다.

3. 선행은총의 전제로서 원죄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

웨슬리는 기독교의 3대 교리를 “원죄, 이신칭의, 그리고 성결의 교리”라고 하였다. 타락한 인간은 “전혀 선이 없고”,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마음의 생각이 지속적으로 악할 뿐”이다. 타락의 결과로 죽음과 무지와 실수, 영적이고 육적인 죽음이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의 전체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크로포드에 따르면 웨슬리의 원죄론은 어거스틴적인 것이며, 콜린스에 따르면 웨슬리의 원죄론은 루터나 칼빈과 유사하다.

원죄와 선행은총의 관계는 공생관계이다. 인간의 타락이 없다면 선행은총이 필요 없으므로,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원죄를 부인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펠라기우스주의를 배제하는 교리이다. 루터가 인간의 전적타락 때문에 예정을 가르치듯,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타락 때문에 무능을 해결하는 선행은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원죄와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도 루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능하고 끔찍한 상황 속에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선행은총으로 인해 인간의 전적타락은 “그 범위에 있어서는 전적이지만 … 그 정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타락한 “자연인” 개념은 논리적으로만 가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연인 플러스(+) 선행은총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경감시키는 요소로서 선행은총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능력조차 없이 무능해진 데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4. 선행은총론의 성경적 근거 및 해석

인간의 현재 상태가 전적타락 플러스(+) 선행은총이라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가? 웨슬리가 선행은총론의 근거로 삼은 주요 성경구절과 그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롬1:19-21절이다. 이 구절을 웨슬리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을 받았다” 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움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지만, 그들이 그 도움을 바르게 활용하지 않을 시에는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된다.” 이 빛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원천에서는 나올 수 없는 빛으로, 하나님만이 주시는 빛이다.

둘째로, 롬2:14-15절이다. 웨슬리는 외적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의 마음에 자연법이 새겨진것은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신 바로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양심을 통한 선악의 분별,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가책을 선행은총의 역사로 보았다.

셋째, 웨슬리는 갈5: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한 신자들은 “두려움과 의심” 없이 확고하고 “끊임없이” 성령의 “진정한 열매”들을 누리지만,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도 선행은총을 통해 그 열매를 “어느 정도는” 누린다고 설명하였다. 성령의 열매의 예비적 “맛봄(foretastes)”을 웨슬리는 그것에 안주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은혜 즉 “진정한 열매”를 사모하여 구원과 참 성결로 나아가게 하시기 위한 선행은총으로 보았다.

김홍기 박사는 그의 글 “존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 이해”에서 선행은총이 전적타락의 상태에서 인간의 도덕적 형상의 일부를 회복시켰다는 조종남 박사의 분석 을 반박하면서 “조종남 박사는 선재적 은총이 마치 도덕적 형상과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 모두의 회복인양 해석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 속에 결코 도덕적 형상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에 속하며, 비록 선행은총에 의한 회복이 부분적이더라도 웨슬리는 이것이 “단지 그림자가 아니라, 실질적 수준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넷째, 눅10:42절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해를 가져가시지 않고 밝히고 강화하시며,” 인간의 “감정을 파괴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하시며”,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 즉 선악간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하신 후 인간에게 “강제력을 행하시지 않고” 마리아처럼 더 좋은 편을 택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 선택의 자유를 선행은총으로 본 것이다.

다섯째, 빌2:12-13절이다. 이 구절로 웨슬리는 광의적 선행은총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선을 이루려는 생각조차 위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선을 끝까지 행할 능력도 위로부터 오는 것” 이라는 말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해야 합니다” 라는 말로는 인간의 책임도 함께 강조하였다. 주님께서 은혜로 “선한 의욕”과 “선한 동기,” “선을 끝까지 행할 능력”을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이상, 성도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고의로 저지른 불손종”에 대해 “거짓 겸손”으로 “변명”할 수 없고, 성도는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요1:9절이다. 웨슬리는 “만약 사람이 방해하지 않으면 빛은 점점 더 빛날 것”이라고 하였다. “방해하지 않으면” 또는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면” 등의 표현은 선행은총이 보편적인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신앙 이전의 사람들의 도덕성과 영성 및 신앙의 수용에서 “상당한 차이(considerable difference)”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해답이 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성경구절들에는 크로포드가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의 세 범주로 구분한 요소들이 모두 들어있다. 인간론적 범주에서 선행은총은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 이성, 양심, 의지의 기능을 일부 회복시키시는 은혜로, 이로써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선한 것을 자각하고 행할 수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선과 악의 개념을 가지며, 어느 정도 선을 행하려는 노력, 어느 정도 성령의 열매를 갖게 되고, 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저항성 및 죄책을 갖게 된 은혜를 의미한다. 우주론적 범주에서 선행은총은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어느 정도 알게 하시는 은혜이다. 성령론적 범주에서 선행은총은, 칭의 이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성령께서 죄인을 이끄시고, 그 마음을 겸손케 하시고,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죄인의 영혼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5. 선행은총과 일반은총

콜린스는 웨슬리가 가르친 선행은총을 통한 혜택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즉 (1)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기본 지식 (2) 도덕법에 대한 각인 (3) 양심 (4) 은혜로 회복된 어느 정도의 의지의 자유 (5) 악의 제어이다. 구원 이전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은혜라는 점에서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루터의 자연법(시민법)을 통한 창조의 보존 개념과 유사하고, 더 널리 알려진 칼빈의 일반은총 개념과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선행은총과 일반은총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핫지는 일반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미치는 성령의 영향”으로 정의하고, “성령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현존하셔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격려하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와 그 규례들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질서와 예절과 덕은 모두 성령의 현존과 영향 때문이다.” 핫지의 설명을 바탕으로 두 은총을 비교해보면, 둘 모두는 (1) 성령의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라는 점과 (2) 양심을 통해 악을 제어하고 선행을 자극하는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1)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주어진 선행은총에 비해, 일반은총이 회개와 연결되는 것은 예정된 자에 한해서이다. 예정 받지 못한 자에게는 일반은총이 회개와 상관없다. (2) 선행은총은 사람의 의지에 인격적 응답 능력을 부여하여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책임을 부여하지만, 일반은총은 그렇지 않다.

6. 선행은총의 삼위일체적 기초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삼위일체적으로 설명하여 “죄인은 성부의 사랑에 이끌리고, 성자에 의해 빛이 비추어지고, 성령에 의해 죄를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선행은총은 특히 그리스도의 대속을 토대로 주어지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둡고 죄 많은 피조물”에게 선행은총을 베푸시는 이유는, “자신이 행하신 일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 사람들과 화해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과 죄인의 화해의 길을 여신 그리스도의 대속에 기초한다. 구원을 위한 예비적 은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다면 예비적 은혜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롬8:32절을 설명하면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고 (free for all)” 또한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다 (free in all)” 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라는 뜻이라면,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다” 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기질, 선한 욕망” 등 타락한 인간에게 불가능했을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 이러한 선행은총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듯, 그 영향 역시 모두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선행은총을 통한 실제적 사역자가 되셔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비추시고, 빛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양심의 불안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7. 선행은총의 한계

웨슬리는 선행은총의 한계 역시 언급하였다. 먼저,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격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기능의 일부 회복이지, 구원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선행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계는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까지이다. 선행은총을 통한 죄의 자각이 있기에 율법 선포가 더 깊이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한 결과, 죄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께 자신의 모든 죄를 던진다.” 웨슬리는 1742년의 논문 “메소디스트 원리”에서 선행은총은 우리를 구원자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칭의 시킬 수 있는 은혜는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선행은총의 다른 한계는 선행은총을 통한 죄의 자각은 가볍고 일시적(“slight, transient conviction”)이라는 것이다. 선행은총은 사람들의 죄로 저항을 받아 질식 당하고,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빛은 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행은총을 통해 일어나는 “죄에 대한 자각을 최대한 빨리 억눌러 버리고, 잠시 후에는 자신이 죄의 자각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거나, 기억을 하더라도 부인하고 만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행은총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은 선행은총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은총을 질식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선행은총만으로의 회개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선행은총으로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의 죄책일 뿐이므로 참된 회개의 역사는 성령께서 성경 속 율법을 계시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선행은총과 죄를 깨닫게 하는 은총은 인간의 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콜린스는, 선행은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율법을 “객관적으로 재각인”해주신 은혜라고 한다면, 죄를 깨닫게 하는 은총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을 “주관적으로 재각인”해주시는 은혜라고 설명한다.

선행은총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은총을 주실 때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게 하는 예비적 깨달음의 기능이다. 구원의 과정을 하나님 은혜들의 연결로 설명할 때 웨슬리의 전제는, 선행은총은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진 은총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어진 은혜들을 주신다는 것이다.

8. 선행은총과 복음적 신인협동 (Evangelical Synergism)

하나님 은혜의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콜린스는 웨슬리 신학의 구원의 순서를 “율법 중지”와 “율법 계속” 사이의 순환으로 설명하였다. 구원의 과정 전체는 선행은총-회개-칭의와 중생–성결-영화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은혜들이 주어지는 순간들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율법 중지”의 순간들이라면, 그 순간들 전후에는 받은 은혜에 대해 합당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율법 계속”의 과정이 이어진다.

“율법 계속” 즉, 은혜 받은 자의 책임을 가르치는 성경적 용어로서 웨슬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8) 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웨슬리가 가르친 은혜에 대한 “합당한” 태도란, 죄와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대한 “자기 부인”,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일과 이웃을 향한 자비의 일, 교회 사역으로서 복음전도에의 헌신 및 신자의 거룩성을 위한 철저한 양육과 훈련 등이 포괄적으로 포함된다.

은혜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취하느냐 아니냐가, 신자가 받은 은혜를 무효화할 것인지 아니면 은혜 안에서 최대한 성장하여 다음 단계의 은혜로 나아갈 것인지에 영향을 끼친다. 선행은총의 단계에서 사람은 은혜에 저항하면서 굳어진 양심으로 죄에 거하거나, 반대로 민감한 양심을 통해 회개로 나아갈 수 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는, 다시 죄 된 삶으로 돌아가 은혜를 무효화 하거나, 회개에 합당한 태도로서 순종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다. 칭의와 중생의 은혜로 새 생명을 통해 죄를 이길 능력을 받은 신자는, 은혜를 소홀히 여겨 태만과 방종, 심지어 다시 불신앙에도 빠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받은 은혜 안에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점점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성결의 은혜를 받은 신자라도, 무죄한 아담이 타락한 것처럼, 유혹에 넘어져 성결을 상실할 수도 있고, 성결의 은혜 안에서 더 깊이 성숙할 수도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하나님 은혜의 결과 이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행은총을 공로사상으로 오해하지 않으려면 신인협력(synergism)이라는 말을 제한된 의미,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범위 안에서라는 전제 하에 사용해야 한다. 동시에, 웨슬리는 인간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은혜의 결과까지 완벽한 형태로 주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인간의 반응으로 웨슬리는,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든 충만함의 비결이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와 무지와 경박함은 은혜를 거부하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일부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여 은혜의 방해물을 최대한 제거하라는 것이다. 받은 은혜에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느냐?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가 동일하고 하나님 나라의 “씨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의 상태는 동일하지 못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웨슬리의 응답이다. 이로부터 성령과 은혜를 “질식시키거나”, “저항하지” 말고, 은혜에 “순응하고”, “활용하고”, “향상시키라”는 것이 웨슬리의 강조점이다. 바로 이점에서 콜린스는 웨슬리의 광의적 선행은총을 단순히 카톨릭이나 동방 전통에서의 신인협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활동만을 강조하는 개신교(바울) 입장”이라는 큰 틀에서 읽어야 한다고 정확히 말한다.

9. 선행은총과 성결

루터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신자에게까지 적용하여 성결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신자가 부분적으로라도 죄를 이길 가능성을 성령께서 외부로부터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동안으로 한정하였다. 루터의 성령론적 주장은 성화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만 가능하다는 기독론과 연결되며, 인간에게는 죄만 돌리고 구원과 거룩한 삶 전부를 하나님의 역사(예정)로만 돌리는 신론과 연결된다. 특히 루터는 이론적으로는 카톨릭의 대죄와 소죄 사이의 구분을 부인하고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임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는 인간의 자유의지 주장 및 구원에 인간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인간의 교만이라는 대죄 개념으로 보고, 이러한 대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신자를 소죄에 빠지게 하신다는 주장을 하였다. 인간 자신의 본성의 변화로서 성화의 주장은 바로 공로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루터는 전적타락-노예의지-예정으로 이어지는 구원론을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에까지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웨슬리는, 그 본성 자체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죄에 남겨두심으로써 거룩(겸손)하게 하실 수는 없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거슬러 일하시는 분이실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지도록 회복을 미루신 것은 도덕적 형상이 아닌 자연적 형상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있어 성결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는 부족함이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해도 죄로 소멸시키는 신자들이 문제이다. 마치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원의(原義)를 받았지만 아담이 자유의 남용으로 은혜를 소멸시켜 타락에 이른 것처럼, 받은 은혜에 대해 합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성결로 나아감을 방해하거나, 받은 성결을 지속하지 못하게 막는 방해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면, 사람들이 멸망 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뜻이 멸망의 이유일 수는 없다는 강조점을 웨슬리는 성결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이는 교회의 부흥과 타락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는 언제나 초대교회 오순절과 같은 성결 부흥의 가능성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 죄에 함몰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합당한 태도로 받지 못하고 소멸시키는 교회가 문제인 것이다. 사랑이 식어지고 성결의 은혜를 소멸시킨 것이 신자와 교회의 침체의 원인이다. 그 점에서 웨슬리는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의 작용을 회개와 칭의뿐만 아니라, 성결 및 그 전후의 성장, 교회의 사역에도 연결시켰다. 웨슬리는 은총을 소멸시키지 말고 합당하게 받아야 할 책임을 언제나 강조하였다.

10.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의 신학적 의의

이제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노예의지론이 루터의 신학 체계에서 가지는 역할과 비슷한 정도로, 웨슬리 신학 체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선행은총론임을 살펴보았다. 아우틀러는 “기독교 전통에서 웨슬리의 위치”를 결정짓는 신학적 특징이 그의 선행은총론임을 바르게 주장하였다. 스타키는 웨슬리가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적인 인간 교리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선행은총론으로 인해 루터와 스콜라신학 양자로부터 구분되는 “독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크로포드는 최근에 출판되는 웨슬리 신학 서적들에서 선행은총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는 선행은총 교리가 웨슬리 학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한 주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선행은총은 개인의 응답보다 앞선 하나님 은혜의 주도권이다. 선행은총은 사람들의 후속적 응답 여부와 상관 없이 모두가 “불가항력적으로” 받는 은혜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구원에 무능한 이상, “구원의 어느 시점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가 필요한데, 웨슬리는 이 시점을 루터보다 빠른 칭의 이전으로 본 것이다. 이 은혜에서 인간의 책임성이 나오므로, 원죄 교리로부터 노예의지론과 예정론을 도출하는 루터 식 “논리적 필연성의 연결고리”는 깨어진다.

이로부터 선행은총론은 인간의 전적타락-노예의지론-예정론의 연결을 “과도한 (superfluous)”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을 과도하게 무능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의 운명을 과도하게 숙명론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하나님의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로 과도하게 독단적이고 무감정적인 능력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웨슬리의 가르침에는 “구원을 위해 충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지속하기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율법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웨슬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을 책임을 부여하는 동시에, 율법과 복음의 선포와 교육이라고 하는 교회의 사역에 긴급성과 중요성을 부여한다.
신자의 율법의 행위와 사랑, 선행, 더 나아가 교회의 복음전도와 신자의 양육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만드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펠라기우스적 자신감이 아니라, 루터가 강조한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신뢰이다. 선행은총에 의해 모든 사람들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의롭게 하는] 신앙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기능들”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성결이라는 더 큰 은혜 역시 부분적으로는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자유를 선용하는 데 의존한다.

웨슬리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를 피하고 전통적인 원죄 이해를 가지면서도 예정이나 불가항력적 은혜, 유기와 같은 운명론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선행은총의 교리이다. 선행은총에 의해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를 견지하고 “펠라기우스주의나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난”을 피하면서도, 율법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 능력에 대한 “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맥고니글은 선행은총에 의해 웨슬리는 “원죄에 대해 거의 어거스틴적 이해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조건적 선택과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구원론을 부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전적 타락, 은혜로 인한 구원, 인간의 책임성,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제공이라는 네 주제를 어떤 모순도 없이 함께 붙들 수 있게 만든” 신학적 열쇠가 선행은총론이다.

나가는 말

웨슬리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이 카톨릭의 공로사상에 지나치게 반응한 나머지, 개신교 내에는 구원과 거룩한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간이 응답할 책임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로 여김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보편적이 되었고, 이것이 신앙지상주의와 율법무용론적 신앙 양태를 보편화시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상습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교회를 채우게 되었다고 보았다. 필자는 루터의 의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사적 결과로서 볼 때 웨슬리의 분석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존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달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된 인격적 응답 능력을 강조한 점에서 종교개혁 신학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신학적 시도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수용으로서 인간의 인격적 응답이라는 설명마저도 자주 행위구원, 공로구원을 주장한 것으로 오해를 받지만, 사실상 웨슬리에게 선행은총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 그 방법에 대하여 보다 성경적이고 종합적인 눈으로 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를 통해 회복된 것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됨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로만 돌리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을 책임을 인간에게 지운다. 크로포드는 노예의지를 가진 사람을 불가항력적으로 구원하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꼭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에 인격적 응답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구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지를 묻는다.

루터가 가르친 인간의 전적타락-노예의지-예정의 논리와 웨슬리가 가르친 인간의 전적타락-선행은총-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의 논리 중 어떤 것이 성경적 메시지를 더 잘 담아낼 수 있으며, 또한 신자들의 신앙생활 및 교회의 개혁과 참된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인지,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서로의 신학적 차이를 좁히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선행은총론에 대한 소개로 웨슬리에 대한 오해의 범위가 좁혀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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