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 오히려 축복하고, 그들의 희노애락에 함께하며, 원수 갚는 일을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김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한다.

성경본문. 로마서 12:14-21
한글본문.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어본문.
14.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15.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16.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Do not be proud, but be willing to associate with people of low position. Do not be conceited. 17.Do not repay anyone evil for evil. Be careful to do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everybody. 18.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 live at peace with everyone. 19.Do not take revenge, my friends, but leave room for God’s wrath, for it is written: “It is mine to avenge; I will repay,”says the Lord. 20.On the contrary: “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 In doing this,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 21.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도움말.
선한 일(17절). 헬라어 ‘칼로스’로서, ‘아름다운, 귀한, 휼륭한’이라는 뜻이다. ‘아가토스(12:9, 21, 13:3의 ‘선’)와 함께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성품인 ‘선’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공적 회개 행위로서 사람의 머리 위에 숯불판을 올려놓던 고대 근동의 전통을 가리킨다(잠 25:21-22 인용).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성도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19절)?
⬇ 아래로 인간. 박해자에 대한 성도의 반응은 어떤 원리에 근거해야 하는가(17절)?
? 물어봐. 악을 이기는 결정적인 방법은 무엇인가(21절)?
! 느껴봐. 내가 악을 이기는 방식은 ‘더 큰 악’이 아니라, ‘선’인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께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 사안은 무엇인가?

Meditation. 악을 이기는 법, ‘선’
‘삶의 예배’(1절)를 믿음의 공동체에 적용(3-13절)했던 바울은 그 차원을 ‘박해하는 자’(14절)와 ‘원수’(19절)들과의 관계에까지 확대시킨다.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서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며, 그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마음을 같이하라고 명한다(14-16절). 또한 원수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악을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것을 명령한다(19절). 바울은 박해하는 자와 원수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선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으로 악을 이기는 것일 뿐 아니라(17, 21절) 그로 인해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뜻풀이 참조).
삶의 예배는 박해하는 자와 원수들 앞에서도 면제될 수 없다. 오히려 삶의 예배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방도가 된다. 만일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며 이기는 것이다. 누구와의 관계에서 삶의 예배가 실패하고 있는가? 그의 앞에서 어떻게 삶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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