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의사소통의 부재로 빚어진 전쟁 직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단 동편 지파들은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선다.

성경본문. 여호수아 22:21-29
한글본문.
21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23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24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27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 29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

영어본문.
21 Then Reuben, Gad and the half-tribe of Manasseh replied to the heads of the clans of Israel: 22 “The Mighty One, God, the LORD! The Mighty One, God, the LORD! He knows! And let Israel know! If this has been in rebellion or disobedience to the LORD, do not spare us this day. 23 If we have built our own altar to turn away from the LORD and to offer burnt offerings and grain offerings, or to sacrifice fellowship offerings on it, may the LORD himself call us to account. 24 “No! We did it for fear that some day your descendants might say to ours, ‘What do you have to do with the LORD, the God of Israel? 25 The LORD has made the Jordan a boundary between us and you–you Reubenites and Gadites! You have no share in the LORD.’ So your descendants might cause ours to stop fearing the LORD. 26 “That is why we said, ‘Let us get ready and build an altar–but not for burnt offerings or sacrifices.’ 27 On the contrary, it is to be a witness between us and you and the generations that follow, that we will worship the LORD at his sanctuary with our burnt offerings, sacrifices and fellowship offerings. Then in the future your descendants will not be able to say to ours, ‘You have no share in the LORD.’ 28 “And we said, ‘If they ever say this to us, or to our descendants, we will answer: Look at the replica of the LORD’s altar, which our fathers built, not for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but as a witness between us and you.’ 29 “Far be it from us to rebel against the LORD and turn away from him today by building an altar for burnt offerings, grain offerings and sacrifices, other than the altar of the LORD our God that stands before his tabernacle.”

도움말.
여호와께서 아시나니(22절).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모두 알고 계심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마음 중심의 동기까지도 다 감찰하신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요단 동편 지파들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는가(22절)?
⬇ 아래로 인간. 동편 지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어떻게 해명했는가(29절)?
? 물어봐. 동편 지파들이 단을 쌓은 이유는 무엇인가(27절)?
! 느껴봐. 나는 내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요단 동편 지파들은 서편 지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그들이 쌓은 것은 단이 아니라 단의 모형일 뿐이다. 그들이 단을 쌓은 이유는 자신과 그 후손들이 요단 서편 지파들과 한 형제며 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요단 강을 경계로 오래 분리되어 있다 보면 동편 지파들은 서편 지파들에 의해 다른 민족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27절).
일을 진행해 나가는 세부적인 과정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지만, 특별히 후손들의 영적 장래를 염려해 단을 쌓은 두 지파 반의 동기만큼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비록 목축을 주로 하는 그들의 생활 여건상 목초지가 좋은 요단 동편에 터를 잡았지만(민 32:1), 마음만큼은 늘 요단 서편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요단 강 가에 우뚝 솟은 단은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해 준다. 내가 내 영적인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단을 높이 쌓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식.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식
‘하나님의 뜻’이라 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리고 권위자들에게 그 권세를 위임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인간이 죄를 고집한 선택과 결과를 두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롬 1:24).
사람이 죄를 선택하고 그것을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어떤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든다. 당신은 극구 말리려 했지만, 결국 그가 뛰어 들었다. 그것이 당신의 뜻이었는가?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이웃집을 강탈하려고 했다. 당신이 저항하고 말렸지만, 그 악한 사람은 그대로 악행을 저질렀다. 그것이 당신의 뜻이었는가?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뜻이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팔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팔자’가 아니다.
‘팔자’같은 개념으로 인간의 선택과 역사를 설명하는 사람에게, 역사의식이나 책임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든지, 장차 오는 세상에서든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인격으로 지으셨다. 인격은 책임지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권한을 위임하시며, 그 인생과 역사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위임 받은 권세에 대한 책임과 심판에 대한 언급 없이, 모든 것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덮어버릴 수 없다.
그것은 종종, 자신의 또 다른 죄악 된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숨은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침략과 살상과 억압과 부도덕에 관한 소신.

— 침략과 살상과 억압과 부도덕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대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입니다 —

… 성결교회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속성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어떤 속성들만을 강조하고 다른 속성들을 소홀히 다루면 올바른 하나님 이해에 이를 수 없고, 올바른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에밀 브루너는 신의 속성들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교회 역사 속에서 신론에 대한 많은 문제점들이 야기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례를 존 웨슬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은 한 분이듯이 모든 속성들도 한 유기적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의 속성들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이 속성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속성들이기에 당연히 속성들 간에 서로 균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분리될 수 없도록 서로 연합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한 순간이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Wesley’s Works, 10:217. Jackson edition). 만약 한 속성이 과도하게 강조되면 다른 속성들은 무시되거나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전능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의 등이 무시될 수 있다.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이 무엇이나 하실 수 있기에 어떤 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영생으로, 다른 자는 영멸로 예정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의의 속성 등이 균형 있게 전능성과 함께 고려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웨슬리는 이중예정론자들을 비판하였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잘못 이해하거나 또는 편중적으로 이를 강조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도 무감정하신 분이며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고대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성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속성)은 변하지 않으시나 우리를 대하시는 그분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생각을 바꾸시는 분이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내리기로 하신 징벌을 거두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 성서의 하나님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편중되게 강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성결을 균형있게 다룰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징벌하시는 분이 아니고 죄인들의 회개함 없이도 그들 모두를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을 성결과 정의의 하나님의 속성과 균형 있게 조화시키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윌리암 로의 만인구원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전능하심을 무시할 수 있다…

출처: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 “성결교회신학 (상)”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2007), p. 393-394.
<장기영 박사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