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에게는 복음이며, 가슴떨리는 감동이지만, 보수주의자에게는 악몽이며 신성모독이다. 최근 SNS 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마태복음 8 장에 나오는 “파이스” 가 백부장의 동성연인이라는 주장 말이다. 이 논쟁의 귀추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동성애 찬성 진영의 승리가 될 것 같다. 그런 허술한 글을 읽고 입장을 바꿀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잽 펀치를 자주 맞으면 쓰러질 수 있는 법이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동성애와 성서에 관한 논쟁은 로마서 1장의 죄 목록에 등장하는 동성애 언급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동성애 찬성론자들이 아무리 맥락을 찬찬히 설명해 내어도, 근본적으로 불리한 게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선을 마태복음 8 장으로 옮겨와서 불을 붙이는 것은 일거에 구도를 바꾸어 놓는 효과가 있다.
성서학자로서 나는 백부장 이야기의 동성애적 해석이 본문에 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주석적 엄밀성도, 논리적 정합성도, 그레코 로만 사회에 대한 필수 지식도 갖추지 못한 허술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나의 해석학적 입장은 성서가 열린 텍스트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성서 안에 여러 목소리가 있으며, 심지어 같은 본문도 읽는 사람과 그 정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독자 반응 비평이나, 제 3 세계의 성서해석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입장에 있다. 특별히 수십년 동안 진행되어져 온, 여성신학적 성서읽기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면모를 밝히는 일에 끼친 공헌에 대해서는 비록 그 결과를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을 때에도, 머리숙여 경의를 표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들 중에는 성서가 열린 텍스트임을, 시대와 청중을 초월해서 권위와 적절성을 갖는 진리를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준, 현대에 있어서 성서의 실질적 귄위를 높인 신앙의 영웅들이 많다.
그러나, 성서가 열린 텍스트라고 해서, 성서 본문을 가져다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서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뜻을 가진 채 전달 된 이상, 그 본래 뜻을 헤아리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성서 본문을 놓고 가능한 하나의 해석을 제안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유일하게 옳은 해석임을 주장하는 닫힌 해석학적 입장에 있는 주장이라면 더욱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Mark Tyler Connoley와 Jeff Miner의 책 에 나오는 백부장 이야기 해석은 그런 해석의 일례이다. 논리의 중요한 골격은 아래와 같다.
파이스라는 단어가 세 가지 뜻으로 쓰였고, 누가복음에는 “엔티모스 둘로스” 라고되어 있으므로 (1) 아들은 아니고, 그러면 노예일 수 밖에 없다.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파이스라 불리고 있으니 (2) 보통 노예(ordinary slave) 는 아니고 각별한 노예일 것이다. 그러니 (3) 동성 애인 일 수 밖에 없다.
첫째로, 파이스의 해석 가능성을 위의 세 가지로 나열한 것은 옳다. 그러나,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세 해석이 다 동일한 비중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세 선택항 사이의 빈도 수와 비중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파이스는 압도적으로 아들, 소년 (사실은 딸, 소녀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등의 의미로 쓰였고, 노예라는 등으로 쓰인 적은 좀 더 적었지만 일반적이었고, 동성애인으로 쓰인 예는 극소수이다. 이 본문에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맥락은 “노예”이다. “동성애인”은 지극히 드문 용례에 속하기 때문에, 이 해석을 선택할 경우에는 다른 경우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이 쪽 해석의 저울에 올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저자들의 저울은 빈약하다.
둘 째,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과 문화적 정향 (orientation), 그리고 마태복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평균적 윤리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 대로의 마태와 신약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정경에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아주 희박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해석은 의외로 동성애 옹호론자인 마태가 동성애적 코드를 암호처럼 이 단어에 심어 놓았을 가능성이다. 이는 마치 유명한 스타 연예인이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고 “저건 나에게 윙크한 것이야. 우리는 마음이 통해. 나는 분명히 알아” 라고 말하는 소녀 팬의 주장과 비슷하다. 뭐라고 하겠는가? 그게 사랑인데…. 그냥 놓아두는 수 밖에. 그러나, 이 주장이 객관적으로 인정 받으려면 최소한의 방증, 그 스타가 이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거나, 문자라도 한 번 보냈다거나, 이름이라도 안다는 정도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가발전이다. 적어도 마태복음이 파이스에서 주는 힌트는 기껏해야 이 정도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째로, Connoley와 Miner는 백부장이 9 절에서 종을 “둘로스”라 부르지만, 8 절에서 이 종을 “파이스”라고 부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며, 이 파이스는 “보통 노예 (Ordinary slave)”와 구별되는 특별한 노예였다고 주장한다. 명칭을 결정하는 것은 맥락이다. 9 절은 명령과 복종의 맥락이기 때문에 둘로스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썼고, 8 절은 아픈 이가 자신에게 소중한 대상임을 호소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파이스를 썼다. 이 파이스가 다른 맥락에서 둘로스라 불리지 않았을거라는 증거는 없다. 나는 학교에서 교수라고 불리지만, 채플에 설 때는 목사로 불린다. 같은 예수님을 언제는 “주여” 했다가 언제는 “랍비여” 한다. 그게 맥락이다.
Connoley와 Miner는 이 파이스가 보통 노예인가 아니면 동성애인이가 이항대립을 제시하고 보통 노예일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인임에 틀림없으며, 다른 가능성은 없다라는 형식논리적 논증을 하고 있다. 이는 로마사회 노예제도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다. 노예제 사회를 인구의 25% 이상이 노예인 사회로 정의한다면, 역사상 이 분류하에 들어가는 사회는 여섯 개 밖에 없다. 그 중의 두 개가 미국의 노예해방 이전시대와 로마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의 로마 노예제에 대한 선입견은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상식을 로마 사회에 대입해 넣은 그림이다. 그러나, 로마의 노예 제도는 미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노예들이 사회의 최하층에서 최상층까지 골고루 포진해 있었고, 노예들에게만 한정된 직업도 없었고, 노예들에게 원천적으로 제한된 직업도 드물었다. 로마군으로 복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도 사유재산을 가졌고,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기도 했고, 사회의 최상층에 포진한 엘리트 노예들도 다수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황제의 노예들 (“가이사 집 사람들”) 이었다.
로마인들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산 노예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노예들을 구별했다. 집에서 태어나 집안에 머무르며 일하는 노예를vernae 라 불렀으며, 들에서 농사일을 하는 노예들과는 상당히 다른 대우를 했다. Vernae 들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발전시킨 예들은 많다. 아래는 공화정 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요 연설가였던 키케로의 동생이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이다.
친애하는 마르커스 ….. 나는 형님이 티로에게 해준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형님이 그의 이전 신분이 그가 받아야 할 응분의 대우에 못 미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노예가 아닌 우리의 친구로 삼기로 선택한 결정 말입니다. 내 말을 믿어 주세요. 나는 형님과 티로의 편지를 읽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Epistulae and Familiares 16.6. K. Bradley “Slavery and Society at Rome. 1 면에서 재인용).
형이 티로라고 하는 노예를 해방시키기로 결정한 것을 편지로 전해 듣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편지다. 형인 마르커스 키케로 역시 티로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긴 편지를 많이 남겼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들이 노예를 극단적으로 가혹하게 다루었던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요점은 로마의 노예제도가 상당히 복잡한 제도이며, 노예들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나 주인과의 관계에 엄청난 차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의 책, 1-4면). 결국, 로마사회에서 “보통노예 (ordinary slave)” 라는 개념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결론이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신약성서에 나온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1:1).” 아들이 종과 다름 없다니, 무슨 말인가? 당시에 유복한 집들에서는 자녀를 유모의 손에서 키웠으며, 유모가 노예일 경우 노예의 자녀들, 가족들과 함께 노예들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살게 했다. 유모들이 어머니보다 더 깊은 정서적 유대를 가진 경우도 많았으며 (참조, 살전 2:7) 주인의 자녀들과 노예들이 형제처럼 가까운 연대감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마태복음 8 장의 백부장이 여성노예의 방에 드나들었으며, 얼마 후에 그 방에서 백부장을 닮은 아들이 태어났고, 이 노예 아이를 “파이스”라 했을 가능성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럴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보지만, 최소한 파이스를 동성애인으로 보는 것 보다는 훨씬 유력한 시나리오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서는 열린 텍스트이다.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면밀한 주석적 연구는 본문을 새로운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도와 주며,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딱 부러진 대답을 못하는 것이 이유가 있다!). “일반 노예”냐 “동성 연인”이냐 하는 질문을 본문에 강요하여, “동성연인”이라는 결론을 압박해 내는 것은 본문에 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다. 분명한 것은 헬라어 파이스의 해석이 사전이 제시하는 1, 2, 3 번 중에서 하나를 기계적으로 골라내는 작업은 아니며, 이 의미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가능성들, 그 의미 영역들이 서로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짧은 지식과 보수적인 상상력이 그려내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이 파이스는 백부장의 집에서 태어난 종(vernae)이다. 아들과 함께 먹고 자고, 친구처럼 자랐을 것이다. 긴요한 종이었기에 먼 원정길에도 따라 왔을 것이다. 혹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들은 감당하지 못할 슬픔에 빠질 것이다. 백부장 역시 이 파이스를 아들같이 아끼고 돌보고 사랑했다. 아들같이 아끼고 키운 종 이야기는 한국에도 많지 않은가? 이 아이는 다른 노예들 같이 둘로스로 불리기도 했지만, 백부장은 자주 이 아이를 파이스로 불렀다.
파이스가 동성애인이라는 해석의 중요한 전제는 보통 하인이라면 그러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 리가 없다는 완고한 선입견이다. 동성연애 지지그룹의 생각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기계론적 사고이다. 노예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깊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하셨으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하셨다. 비슷한 사랑을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한 적이 있다 종이 친구로 바뀌는 것은 위의 키케로의 편지에서도 확인한 바다. 종이 그 주인과 대등한 우정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주종관계 또한 넘어서게 한다. 신약성서의 증거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종관계 철폐가 복음 안에서 가능한 변화의 대표적 사례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다 (갈 3:28; 빌레몬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예수에 대한 전폭적 신뢰 뿐 아니라,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종(둘로스)를 아들(파이스)처럼 사랑한 그 태도 역시, 예수의 칭찬을 받아 마땅한, 모범적인 신앙의 내용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이스가 동성애인임을 주장하지 않고도, 이 본문은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가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내용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파이스가 동성애인을 뜻할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거리가 있다.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쳐 주신 것이 동성연애를 수긍하고 지지하신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이라면 동성연애가 옳지 않다 생각하셨어도, 그를 고쳐 주셨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동성애자인가, 아닌가 따져야 하겠는가? 예수님은 “동성애자는 저리 가라”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애인이면 너에게 중요한 상대겠구나. 그러면 내가 고쳐주마” 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만에 하나, 파이스가 백부장의 성적정체성을 고백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다시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성적 정체성 (sexual orientation)” 과 관계없이 아픈 이를 위해 간청하는 그의 마음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다. 동성 연애 주창자나 반대자가 공히 본받아야 할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한다.
성서가 열린 텍스트라는 말은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더 나은 통찰이 있을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텍스트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최선의 연구자도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그 동안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성서본문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동성애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데 일조해 왔음을, 또 그것을 정치적 목적이나 종파의 이익을 위해서 악용해 왔음을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는 그 죄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주도권이 완전히 동성애 찬성 쪽으로 넘어갔고, 이제는 역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핍박받을 걱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5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의 내일이 어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이 일 아니어도, 기독교는 여러 방면에서 문화적 주도권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
나는 사회에서 특별한 억압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성서를 더 잘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동성애자도 이러한 해석학적 특권을 부여받은 그룹이다. 그러나, 아무 말이나 해도 좋다는 전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파이스 동성애인론은 상당히 넓은 의미의 합리성도 벗어난 주장이다. “독자 반응 비평” 같은 용어로 변호해 주려하는 이들도 있는 듯 하나, Connoley와 Miner의 논리는 독자 반응 비평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섬세함이나 개방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성서를 왜곡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밉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어쨌거나 성서로 얘기하자고 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이들이 성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성서의 영향력을, 기독교의 문화적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말이니까….
이제 기독교 신학은 전에 없던 새로운 도전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열린 자세로 이 과제에 응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으니, 목소리 높여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가 아니라, 문화변동과 최선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포함한 시대의 도전들에 주체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생명 같이 여기는, 그러한 신학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때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신학자들은 날마다 탄식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015년 6월 16일 오전 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