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대중적으로 가장 잘못 알고 있는 지식 중의 하나는 천국에 관한 내용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천국은 저 세상 어디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고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었다. 히브리 전통은 유별날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구약은 내세보다는 현세의 삶의 소중함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한다. 그래서 대조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아니고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이다.
그리고 성경의 천국은 이를 반영한다. 그러기에 천국은 미래에 다가올 세상이지 결코 저 세상이 아니다. 그런데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들어보면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 어딘가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죽음 이후 가야 하는 그곳, 내 영혼이 몸을 빠져나갈 때 갈 수 있는 천국! 천국은 오로지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영의 세계다. 그런 천국을 강조할 수록 사람들은 이 세상에 관심이 적어진다. 그럼 빨리 죽는 것이 복이 된다. 빨리 천국가는데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까? 어차피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성경의 천국은 이 땅에 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구분한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 지는 곳이란다. 사실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마태복음 18:23-24절을 보라. 이 두 용어는 의미상 같은 내용이기에 교차하여 사용할 수 있다.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고대 유대인들이 꿈꾸던 천국을 보여주는 예전에 부르던 찬송이 기억난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리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 찬양은 이사야의 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에 근거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사야 11:6~8
주님이 다스리는 천국이 이 땅에 도래하면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린다. 다리를 절던 사람은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자의 혀가 노래를 부르게 된다.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도 평화가 이루어진다. 이 사역을 예수님이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바로 천국을 이 땅에 임재하게 하신 주님이라는 뜻이다.
5 그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6 그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8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사 35:5-9).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는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천국을 구약의 하나님의 통치에 비추어 표현한다.
51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52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53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54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눅 1:52-54).
이런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왕으로 통치하실 때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천국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 그리고 이런 나라는 시작되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죄 용서가 주어진다. 교만한 자는 천국에서 배제되고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천국이 허락된다. 굶주린 자들에게 예수님은 때론 기적적인 방법으로 빵을 나누어 주셨고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경제적인 나눔과 보살핌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부자들에계 예수님은 엄한 경고를 하시고 재물을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 4:23).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천국은 옷 두벌을 가진 자는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가난한 자와 나누어야 하며 더 이상 가진 자의 비리와 횡포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이다.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3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14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눅 3:11-14).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은 단순 영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는 토색한 것은 4배로값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기로 결심한다(눅 19). 참으로 그간 힘없어 당하고만 살았던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삭개오의 회심 이야기는 개인의 구원 문제를 넘어 천국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이 도래했다. 예수님은 사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고 광풍과 같은 자연현상도 압제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미와 아직”이란 중간 단계 속에 완성된 천국은 아직 미래에 있다. 초대교인들처럼 우리도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결국 천국은 우리가 죽음 후에 가야하는 저곳이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소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부활소망을 말한다. 썩지 않을 몸에 대한 소망!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 발생한 사탄의 권세이기 때문에 인류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질병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해답은 저 천국이 아니라 부활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원인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소망 가운데 살아야 한다.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고전 15:54-55).
천국은 플라톤 주의처럼 물리적인 것이 배재된 곳이 아니다. 천국은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새창조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갱신된 곳이다.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회복에 들어서고 있다. 천국은 시작됐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때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통치를 받은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제발 천국을 저 세상으로 보고 이 세상을 외면하는 잘못된 신플라톤주의를 벗어나 다시 성경의 믿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돌보고 다스려야 하는 제사장들로 부름받았다.
그럼 기독교의 하늘은 어떤 뜻인가? 우리는 천국(하늘나라)과 하늘을 구별하지 않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
계속하여 글은 [완성된 천국은 사후 가야할 저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이다]로 이어집니다.
<MinKyu Lee 교수님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