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 자체를 위해 베풀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대적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며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기적을 요구했을 때 주님은 이를 불신앙의 표시로 보았다(막 8:11-13, 참조 마 4:6-7). 예수님의 기적은 다른 차원의 현실을 섬기는 도구였다. 그 현실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다. 수단에 불과한 기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 되심을 실현하는 삶을 간구하라.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바랄 때, 필요에 따라 기적도 때론 일어난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는 관심이 적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적만 바랄 때 이는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고 병을 고치셨을 때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자, 기적을 행하는 자로 보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이는 마치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많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귀신에게 침묵하도록 하셨다(막 1:35-39),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그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막 1:44-45), 회당장 야이로의 사망한 딸을 살리셨는데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하셨다(막 5:43).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강제로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 그는 홀로 산으로 떠나셨다(요 6:13-15).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실 때 그를 기적을 행하는 자로 보았다. 또한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할 정치 지도자,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왕으로 믿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자신을 따르고 열광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셨다. 사람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고난받고 처참하게 죽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식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향한 길이었다. 그는 이 사명이 방해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기에 귀신들과 사람들에게조차 침묵을 요구하신 것이다(그럼에도 소문은 빨리 퍼져 나갔다. 막 1:46).

그럼 예수님의 기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이는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징표들이다. 이 기적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사탄의 권세가 전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고 전파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마 11:2-6.; 12:22-32; 막 3:29, 30).

특히 안식일에 베풀어진 치유 기적들은 삶의 무거운 짐에 시달리는 병자들에게 예수님이 진정한 해방과 쉼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치유를 통해 쉼을 주시는 그분의 사역이 진정한 안식일의 본질이고 목적이며 구약의 참된 해방인 희년의 참된 성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눅 4:16-21; 13:10-16; 마 12:1-14; 막 2:21). 그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주님으로 만난다. 병 치유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통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계속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가신 사건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은 정말 사실일까? 수백 년 전 사람들은 대체로 복음서의 기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사실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기적에 대하여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교육수준이 높아져 지식도 많아지고 더 똑똑해져서일까? 아니면 합리주의 과학적 세계관이 강한 교육 때문일까?실제로 이런 변화는 지난 2세기 동안 서구가 합리주의를 받아들이고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그간 전통적으로 의심 없이 믿던 것들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검증되는 것들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을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노력한다. 예수가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해변을 걸어가셨는데 멀리서 보니 햇살에 비쳐서 물 위를 걸어간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한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바쳤는데 수많은 다른 이들이 이에 감동하여 서로의 도시락을 나누어 먹다 보니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것이 아니라 며칠 간 혼절해 계셨다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온 이후 사람들은 기적에 대하여 전보다는 열린 자세로 대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종교적 세계관이 강한 문화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여기에는 현대인들이 선택한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자연원리에 대하여 밝혀낸 것들이 한몫한다. 옛날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마술적 종교적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그러나 이런 것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 다음부터 사람들은 더이상 그런 설명에 크게 귀기울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엄청난 장점도 있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달나라에 절구를 빻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미신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실제로 불가사의한 일들이 오늘날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도 자신의 태도가 변하기도 한다. 특히 회심이나 강한 신앙체험이 있을 때이다. 믿음이란 단순 태도의 차이일까? 예전에 들은 이야기다. 어떤 한 과학자가 교회 다니는 자기 부인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자기 부인이 동정녀탄생과 같은 허구요 미신을 믿는 부인이 못마땅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그런 것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의학적 치료가 어려운 암에 걸렸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그는 부인이 하나님은 당신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말에 부인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는 부인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갈급한 심령이 된 그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고 자신의 죄와 교만을 뉘우치고 통곡을 하였다. 하루 이틀, 그는 예배 때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에 젖었다.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그의 암은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 극적인 회심과 성령체험 이후 그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개구리는 전기자극을 통해 암컷만으로 부화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정녀 탄생은 사실이라고 옹호하였다.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을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라고 했다. 과학도 주관적일 뿐이고 성경이야말로 참된 진리의 말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주관적인 태도의 문제일까? 역사성이란 모두 신앙의 문제일까?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검증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계속하여…

<Lee, MinKyu교수님의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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