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21. 주일에는 읽는 QT. 믿음의 사칙연산 3.

간단설명. 믿음이란 우리보다 큰 힘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 폴 틸리히

한글본문. 누가복음 5:1-11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영어본문.
1 One day as Jesus was standing by the Lake of Gennesaret,with the people crowding around him and listening to the word of God, 2 he saw at the water’s edge two boats, left there by the fishermen, who were washing their nets. 3 He got into one of the boats, the one belonging to Simon, and asked him to put out a little from shore. Then he sat down and taught the people from the boat. 4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he said to Simon, “Put out into deep water, and let down the nets for a catch.” 5 Simon answered,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6 When they had done so, they caught such a large number of fish that their nets began to break. 7 So they signaled their partners in the other boat to come and help them, and they came and filled both boats so full that they began to sink. 8 When Simon Peter saw this, he fell at Jesus’ knees and sai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9 For he and all his companions were astonished at the catch of fish they had taken, 10 and so were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Simon’s partners. Then Jesus said to Simon, “Don’t be afraid; from now on you will catch men.” 11 So they pulled their boats up on shore, left everything and followed him.

Meditation. 믿음의 곱셈: 시몬×말씀 = 베드로

시몬이 베드로가 됩니다. 갈릴리 어부로 잔뼈가 굵어오는 동안 줄곧 그는 시몬이라고 불렸습니다(3-4절). 그러나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이 부여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인격과 인생을 의미합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시몬의 삶의 자리에 새 사람이 시작된 것을 시사합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몬, 사람이 원하고 사람이 만들어가는 인생을 살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고(마 16:16), 그 이름 안에 담긴 의미와 같이 하나님 나라 ‘반석’(마 16:18)이 될 수 있는 새 사람이 시작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의 역동 때문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말씀에 ‘의지’하기 시작할 때(5절) 그의 삶에 놀랍고도 총체적인 변화가 동반됩니다. 말씀이 그의 인생에 곱해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던진 그물의 기능이 달라집니다. 말씀에 붙들린 그물질로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손맛을 느껴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친구의 어선까지 채우는 만선의 아침을 경험합니다. 그의 손은 일상 속에서 기적을 건지는 복된 손이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말씀에 붙들리자 그의 삶의 자리가 바뀝니다. 그물 던지고 씻는 생존을 위한 반복을 일삼고 있던 갈릴리를 떠납니다. 배를 육지에 대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11절). 호수를 배회하던 인생이 육지에 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을 따라 걷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발 디딘 지경 위에서 영광스러운 사도행전을 펼쳐가게 됩니다. 별다른 의미 없이 반복적이던 일상이 치유된 것입니다. 일상이 생존 투쟁의 자리가 아니라, 사명의 자리요 사역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곱해진 인생 위에 펼쳐지는 변화들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곱해지면 기적이 일어나고 반석과 같은 삶이 시작됩니다. 참된 제자도가 열리고 사도행전적인 인생이 펼쳐집니다. 당신의 삶에는 이 믿음의 곱셈이 풀리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 매일의 일상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하는 거룩한 곱셈을 완성하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5-06-20.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라헬이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내어주어 아들을 낳게 하자, 이에 맞서 레아도 자기 여종 실바를 내어주어 아들을 낳게 한다.

성경본문. 창세기 30:1-13
한글본문.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9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영어본문.
1 When Rachel saw that she was not bearing Jacob any children, she became jealous of her sister. So she said to Jacob, “Give me children, or I’ll die!” 2 Jacob became angry with her and said, “Am I in the place of God, who has kept you from having children?” 3 Then she said, “Here is Bilhah, my maidservant. Sleep with her so that she can bear children for me and that through her I too can build a family.” 4 So she gave him her servant Bilhah as a wife. Jacob slept with her, 5 and she became pregnant and bore him a son. 6 Then Rachel said, “God has vindicated me; he has listened to my plea and given me a son.” Because of this she named him Dan. 7 Rachel’s servant Bilhah conceived again and bore Jacob a second son. 8 Then Rachel said, “I have had a great struggle with my sister, and I have won.” So she named him Naphtali. 9 When Leah saw that she had stopped having children, she took her maidservant Zilpah and gave her to Jacob as a wife. 10 Leah’s servant Zilpah bore Jacob a son. 11 Then Leah said, “What good fortune!” So she named him Gad. 12 Leah’s servant Zilpah bore Jacob a second son. 13 Then Leah said, “How happy I am! The women will call me happy.” So she named him Asher.

도움말.
자식을 낳게 하라(1절). 직역하면 ‘내게 아들을 달라’가 된다.
내 무릎에 두리니(3절). ‘양자가 되리니’란 뜻이다.
단(6절). 변호자란 뜻이다.
납달리(8절). 씨름이란 뜻이다.
갓(11절). 복, 행운이란 뜻이다.
아셀(12절). 행복이란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의 고백을 통해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하는 분으로 드러나시는가(2절)?
⬇ 아래로 인간. 라헬과 레아의 여종들은 각각 어떤 자녀를 낳았는가(5-13절)?
? 물어봐. 라헬이 야곱에게 죽고 싶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1절)?
! 느껴봐. 나는 시기와 미움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한 선의의 경쟁을 하려면 내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Meditation. 하나님의 은혜를 사유화하지 말라.
라헬과 야곱의 분노가 충돌한다. 라헬은 자식을 넷이나 낳은 언니를 시기해 분노하고, 야곱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남편의 잘못으로 몰아붙이는 것에 분노한다. 아무리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가까워도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르면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도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신실하게 유지할 수 있다.
라헬의 분노에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견디다 못한 라헬은 자기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들여보내고 그 여종이 낳은 아이의 이름을 단(변호자)과 납달리(씨름)로 붙인다. 이 이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묻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힘과 욕심이 뚝뚝 묻어나온다. 반면 출산이 멈춘 레아는 시녀 실바를 통해 아들을 낳고 갓과 아셀로 이름 붙인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라고 고백하는 레아는 그 후로도 아들과 딸을 더 낳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유화할 수 없다. 내 힘으로 되는 것도, 또 잘 되지 않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당신은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내 것처럼 교만하게 여기는가, 감사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5-06-19. QT큐티체조.

간단설명. 하나님은 레아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아들들을 출산하게 하신다.
성경본문. 창세기 29:31-35

한글본문.
31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영어본문.
31 When the LORD saw that Leah was not loved, he opened her womb, but Rachel was barren. 32 Leah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a son. She named him Reuben, for she said, “It is because the LORD has seen my misery. Surely my husband will love me now.” 33 She conceived again, and when she gave birth to a son she said, “Because the LORD heard that I am not loved, he gave me this one too.” So she named him Simeon. 34 Again she conceived, and when she gave birth to a son she said, “Now at last my husband will become attached to me, because I have borne him three sons.” So he was named Levi. 35 She conceived again, and when she gave birth to a son she said, “This time I will praise the LORD.” So she named him Judah. Then she stopped having children.

도움말.
사랑 받지 못함(31절). 히브리어 ‘싸나’는 미워하다는 의미로,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Leah was hated, ESV).
르우벤(32절). 보라 아들이라 라는 뜻이다.
시므온(33절). 들으심이란 뜻이다.
레위(34절). 연합함이란 뜻이다.
유다(35절). 찬송함이란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이 레아의 태를 열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31절)?
⬇ 아래로 인간. 레아는 출산을 통해 어떤 위로와 용기를 얻는가(32절)?
? 물어봐. 레아가 출산한 아들들의 이름은 레아의 마음을 어떻게 반영할까(뜻풀이 참조)?
! 느껴봐. 나는 미움을 받거나 고통 중에 있을 때 무엇을 의지하며 그 시기를 극복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극복해야 할 상황은 무엇인가?

Meditation. 주밖에 없네.
야곱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그녀를 사랑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워했다. 일생동안 함께 사랑하고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미움 받는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그 비참함과 괴로움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속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 때에 레아는 더욱 주님을 바라보았다.
레아가 아들들을 낳고 쏟아내는 고백을 보라. 르우벤을 낳고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고백한다. 시므온을 낳고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아들을 주셨다’고 감사한다. 유다를 낳고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들은 레아가 아들을 잉태하여 출산하기까지 매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레아는 이 과정을 통해 정말 의지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뿐임을 배운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 받길 원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배운다. 당신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무엇을 바라보는가? 주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돌이켜야 할 일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5-06-1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라헬을 향한 사랑으로 7년간 일한 야곱은 라반에게 아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라반은 첫날밤에 라헬 대신 언니인 레아를 들여보내고, 야곱은 라헬을 얻는 대가로 다시 7년을 섬기기로 한다.

성경본문. 창세기 29:21-30
한글본문.
21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영어본문.
21 Then Jacob said to Laban, “Give me my wife. My time is completed, and I want to lie with her.” 22 So Laban brought together all the people of the place and gave a feast. 23 But when evening came, he took his daughter Leah and gave her to Jacob, and Jacob lay with her. 24 And Laban gave his servant girl Zilpah to his daughter as her maidservant. 25 When morning came, there was Leah! So Jacob said to Laban, “What is this you have done to me? I served you for Rachel, didn’t I? Why have you deceived me?” 26 Laban replied, “It is not our custom here to give the younger daughter in marriage before the older one. 27 Finish this daughter’s bridal week; then we will give you the younger one also, in return for another seven years of work.” 28 And Jacob did so. He finished the week with Leah, and then Laban gave him his daughter Rachel to be his wife. 29 Laban gave his servant girl Bilhah to his daughter Rachel as her maidservant. 30 Jacob lay with Rachel also, and he loved Rachel more than Leah. And he worked for Laban another seven years.

도움말.
속이다(25절). 에서가 이삭에게 야곱이 한 일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단어다(27:35-36 참조).
칠 일을 채우라(27절). 결혼을 하면 7일 동안은 합방을 하는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다. 이는 신랑의 의무였으며 이로써 온전한 결혼관계를 이뤘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의 공의는 야곱의 삶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가(25절)?
⬇ 아래로 인간. 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큰 딸을 준 것에 대해 뭐라고 변명하는가(26절)?
? 물어봐. 야곱이 삼촌의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칠년을 더 일한 이유는 무엇인가(30절)?
! 느껴봐. 나는 타인이 상처받고 싫어하는 것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 옆으로 실천해. 상처 주고 받는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를 돌아보고 고쳐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Meditation. 뛰는 야곱 위에 나는 라반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라반에게 속은 야곱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누구보다 약삭빠르고,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이 삼촌 라반에게 고스란히 속임을 당한다. 그것도 자신이 형과 아버지를 속였던 것과 너무나도 흡사하게 당한다. 야곱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아버지를 속였다. 형의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 형인 척 했던 것이다. 삼촌 라반은 야밤에 야곱이 잘 볼 수 없는 틈을 이용해, 언니 레아를 라헬인 것처럼 속였다. 자신이 가족을 속인 그대로 당한 것이다.
이 배후에는 야곱을 사랑하셔서 언약을 이루기 원하시지만 그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 하나님은 죄인 야곱을 사랑하시지만 그의 죄는 미워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인도하심 속에는 야곱의 잘못된 죄의 습관을 변화시켜 축복의 통로로 삼기 원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다.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그 백부장은 동성애자가 아니다 – 로마 노예제에 대한 오해와 이해.

동성애자에게는 복음이며, 가슴떨리는 감동이지만, 보수주의자에게는 악몽이며 신성모독이다. 최근 SNS 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마태복음 8 장에 나오는 “파이스” 가 백부장의 동성연인이라는 주장 말이다. 이 논쟁의 귀추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동성애 찬성 진영의 승리가 될 것 같다. 그런 허술한 글을 읽고 입장을 바꿀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잽 펀치를 자주 맞으면 쓰러질 수 있는 법이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동성애와 성서에 관한 논쟁은 로마서 1장의 죄 목록에 등장하는 동성애 언급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동성애 찬성론자들이 아무리 맥락을 찬찬히 설명해 내어도, 근본적으로 불리한 게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선을 마태복음 8 장으로 옮겨와서 불을 붙이는 것은 일거에 구도를 바꾸어 놓는 효과가 있다.

성서학자로서 나는 백부장 이야기의 동성애적 해석이 본문에 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주석적 엄밀성도, 논리적 정합성도, 그레코 로만 사회에 대한 필수 지식도 갖추지 못한 허술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나의 해석학적 입장은 성서가 열린 텍스트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성서 안에 여러 목소리가 있으며, 심지어 같은 본문도 읽는 사람과 그 정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독자 반응 비평이나, 제 3 세계의 성서해석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입장에 있다. 특별히 수십년 동안 진행되어져 온, 여성신학적 성서읽기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면모를 밝히는 일에 끼친 공헌에 대해서는 비록 그 결과를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을 때에도, 머리숙여 경의를 표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들 중에는 성서가 열린 텍스트임을, 시대와 청중을 초월해서 권위와 적절성을 갖는 진리를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준, 현대에 있어서 성서의 실질적 귄위를 높인 신앙의 영웅들이 많다.

그러나, 성서가 열린 텍스트라고 해서, 성서 본문을 가져다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서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뜻을 가진 채 전달 된 이상, 그 본래 뜻을 헤아리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성서 본문을 놓고 가능한 하나의 해석을 제안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유일하게 옳은 해석임을 주장하는 닫힌 해석학적 입장에 있는 주장이라면 더욱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Mark Tyler Connoley와 Jeff Miner의 책 에 나오는 백부장 이야기 해석은 그런 해석의 일례이다. 논리의 중요한 골격은 아래와 같다.

파이스라는 단어가 세 가지 뜻으로 쓰였고, 누가복음에는 “엔티모스 둘로스” 라고되어 있으므로 (1) 아들은 아니고, 그러면 노예일 수 밖에 없다.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파이스라 불리고 있으니 (2) 보통 노예(ordinary slave) 는 아니고 각별한 노예일 것이다. 그러니 (3) 동성 애인 일 수 밖에 없다.

첫째로, 파이스의 해석 가능성을 위의 세 가지로 나열한 것은 옳다. 그러나,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세 해석이 다 동일한 비중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세 선택항 사이의 빈도 수와 비중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파이스는 압도적으로 아들, 소년 (사실은 딸, 소녀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등의 의미로 쓰였고, 노예라는 등으로 쓰인 적은 좀 더 적었지만 일반적이었고, 동성애인으로 쓰인 예는 극소수이다. 이 본문에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맥락은 “노예”이다. “동성애인”은 지극히 드문 용례에 속하기 때문에, 이 해석을 선택할 경우에는 다른 경우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이 쪽 해석의 저울에 올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저자들의 저울은 빈약하다.

둘 째,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과 문화적 정향 (orientation), 그리고 마태복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평균적 윤리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 대로의 마태와 신약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정경에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아주 희박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해석은 의외로 동성애 옹호론자인 마태가 동성애적 코드를 암호처럼 이 단어에 심어 놓았을 가능성이다. 이는 마치 유명한 스타 연예인이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고 “저건 나에게 윙크한 것이야. 우리는 마음이 통해. 나는 분명히 알아” 라고 말하는 소녀 팬의 주장과 비슷하다. 뭐라고 하겠는가? 그게 사랑인데…. 그냥 놓아두는 수 밖에. 그러나, 이 주장이 객관적으로 인정 받으려면 최소한의 방증, 그 스타가 이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거나, 문자라도 한 번 보냈다거나, 이름이라도 안다는 정도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가발전이다. 적어도 마태복음이 파이스에서 주는 힌트는 기껏해야 이 정도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째로, Connoley와 Miner는 백부장이 9 절에서 종을 “둘로스”라 부르지만, 8 절에서 이 종을 “파이스”라고 부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며, 이 파이스는 “보통 노예 (Ordinary slave)”와 구별되는 특별한 노예였다고 주장한다. 명칭을 결정하는 것은 맥락이다. 9 절은 명령과 복종의 맥락이기 때문에 둘로스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썼고, 8 절은 아픈 이가 자신에게 소중한 대상임을 호소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파이스를 썼다. 이 파이스가 다른 맥락에서 둘로스라 불리지 않았을거라는 증거는 없다. 나는 학교에서 교수라고 불리지만, 채플에 설 때는 목사로 불린다. 같은 예수님을 언제는 “주여” 했다가 언제는 “랍비여” 한다. 그게 맥락이다.

Connoley와 Miner는 이 파이스가 보통 노예인가 아니면 동성애인이가 이항대립을 제시하고 보통 노예일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인임에 틀림없으며, 다른 가능성은 없다라는 형식논리적 논증을 하고 있다. 이는 로마사회 노예제도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다. 노예제 사회를 인구의 25% 이상이 노예인 사회로 정의한다면, 역사상 이 분류하에 들어가는 사회는 여섯 개 밖에 없다. 그 중의 두 개가 미국의 노예해방 이전시대와 로마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의 로마 노예제에 대한 선입견은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상식을 로마 사회에 대입해 넣은 그림이다. 그러나, 로마의 노예 제도는 미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노예들이 사회의 최하층에서 최상층까지 골고루 포진해 있었고, 노예들에게만 한정된 직업도 없었고, 노예들에게 원천적으로 제한된 직업도 드물었다. 로마군으로 복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도 사유재산을 가졌고,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기도 했고, 사회의 최상층에 포진한 엘리트 노예들도 다수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황제의 노예들 (“가이사 집 사람들”) 이었다.

로마인들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산 노예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노예들을 구별했다. 집에서 태어나 집안에 머무르며 일하는 노예를vernae 라 불렀으며, 들에서 농사일을 하는 노예들과는 상당히 다른 대우를 했다. Vernae 들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발전시킨 예들은 많다. 아래는 공화정 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요 연설가였던 키케로의 동생이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이다.

친애하는 마르커스 ….. 나는 형님이 티로에게 해준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형님이 그의 이전 신분이 그가 받아야 할 응분의 대우에 못 미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노예가 아닌 우리의 친구로 삼기로 선택한 결정 말입니다. 내 말을 믿어 주세요. 나는 형님과 티로의 편지를 읽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Epistulae and Familiares 16.6. K. Bradley “Slavery and Society at Rome. 1 면에서 재인용).

형이 티로라고 하는 노예를 해방시키기로 결정한 것을 편지로 전해 듣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편지다. 형인 마르커스 키케로 역시 티로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긴 편지를 많이 남겼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들이 노예를 극단적으로 가혹하게 다루었던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요점은 로마의 노예제도가 상당히 복잡한 제도이며, 노예들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나 주인과의 관계에 엄청난 차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의 책, 1-4면). 결국, 로마사회에서 “보통노예 (ordinary slave)” 라는 개념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결론이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신약성서에 나온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1:1).” 아들이 종과 다름 없다니, 무슨 말인가? 당시에 유복한 집들에서는 자녀를 유모의 손에서 키웠으며, 유모가 노예일 경우 노예의 자녀들, 가족들과 함께 노예들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살게 했다. 유모들이 어머니보다 더 깊은 정서적 유대를 가진 경우도 많았으며 (참조, 살전 2:7) 주인의 자녀들과 노예들이 형제처럼 가까운 연대감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마태복음 8 장의 백부장이 여성노예의 방에 드나들었으며, 얼마 후에 그 방에서 백부장을 닮은 아들이 태어났고, 이 노예 아이를 “파이스”라 했을 가능성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럴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보지만, 최소한 파이스를 동성애인으로 보는 것 보다는 훨씬 유력한 시나리오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서는 열린 텍스트이다.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면밀한 주석적 연구는 본문을 새로운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도와 주며,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딱 부러진 대답을 못하는 것이 이유가 있다!). “일반 노예”냐 “동성 연인”이냐 하는 질문을 본문에 강요하여, “동성연인”이라는 결론을 압박해 내는 것은 본문에 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다. 분명한 것은 헬라어 파이스의 해석이 사전이 제시하는 1, 2, 3 번 중에서 하나를 기계적으로 골라내는 작업은 아니며, 이 의미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가능성들, 그 의미 영역들이 서로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짧은 지식과 보수적인 상상력이 그려내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이 파이스는 백부장의 집에서 태어난 종(vernae)이다. 아들과 함께 먹고 자고, 친구처럼 자랐을 것이다. 긴요한 종이었기에 먼 원정길에도 따라 왔을 것이다. 혹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들은 감당하지 못할 슬픔에 빠질 것이다. 백부장 역시 이 파이스를 아들같이 아끼고 돌보고 사랑했다. 아들같이 아끼고 키운 종 이야기는 한국에도 많지 않은가? 이 아이는 다른 노예들 같이 둘로스로 불리기도 했지만, 백부장은 자주 이 아이를 파이스로 불렀다.

파이스가 동성애인이라는 해석의 중요한 전제는 보통 하인이라면 그러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 리가 없다는 완고한 선입견이다. 동성연애 지지그룹의 생각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기계론적 사고이다. 노예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깊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하셨으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하셨다. 비슷한 사랑을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한 적이 있다 종이 친구로 바뀌는 것은 위의 키케로의 편지에서도 확인한 바다. 종이 그 주인과 대등한 우정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주종관계 또한 넘어서게 한다. 신약성서의 증거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종관계 철폐가 복음 안에서 가능한 변화의 대표적 사례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다 (갈 3:28; 빌레몬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예수에 대한 전폭적 신뢰 뿐 아니라,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종(둘로스)를 아들(파이스)처럼 사랑한 그 태도 역시, 예수의 칭찬을 받아 마땅한, 모범적인 신앙의 내용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이스가 동성애인임을 주장하지 않고도, 이 본문은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가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내용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파이스가 동성애인을 뜻할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거리가 있다.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쳐 주신 것이 동성연애를 수긍하고 지지하신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이라면 동성연애가 옳지 않다 생각하셨어도, 그를 고쳐 주셨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동성애자인가, 아닌가 따져야 하겠는가? 예수님은 “동성애자는 저리 가라”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애인이면 너에게 중요한 상대겠구나. 그러면 내가 고쳐주마” 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만에 하나, 파이스가 백부장의 성적정체성을 고백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다시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성적 정체성 (sexual orientation)” 과 관계없이 아픈 이를 위해 간청하는 그의 마음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다. 동성 연애 주창자나 반대자가 공히 본받아야 할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한다.

성서가 열린 텍스트라는 말은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더 나은 통찰이 있을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텍스트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최선의 연구자도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그 동안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성서본문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동성애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데 일조해 왔음을, 또 그것을 정치적 목적이나 종파의 이익을 위해서 악용해 왔음을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는 그 죄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주도권이 완전히 동성애 찬성 쪽으로 넘어갔고, 이제는 역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핍박받을 걱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5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의 내일이 어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이 일 아니어도, 기독교는 여러 방면에서 문화적 주도권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

나는 사회에서 특별한 억압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성서를 더 잘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동성애자도 이러한 해석학적 특권을 부여받은 그룹이다. 그러나, 아무 말이나 해도 좋다는 전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파이스 동성애인론은 상당히 넓은 의미의 합리성도 벗어난 주장이다. “독자 반응 비평” 같은 용어로 변호해 주려하는 이들도 있는 듯 하나, Connoley와 Miner의 논리는 독자 반응 비평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섬세함이나 개방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성서를 왜곡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밉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어쨌거나 성서로 얘기하자고 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이들이 성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성서의 영향력을, 기독교의 문화적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말이니까….

이제 기독교 신학은 전에 없던 새로운 도전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열린 자세로 이 과제에 응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으니, 목소리 높여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가 아니라, 문화변동과 최선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포함한 시대의 도전들에 주체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생명 같이 여기는, 그러한 신학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때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신학자들은 날마다 탄식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015년 6월 16일 오전 6:41,

2015-06-1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하란으로 피신한 야곱은 삼촌 라반을 만나 한 혈육임을 확인한다.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제안하고, 야곱은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을 요구한다.

성경본문. 창세기 29:1-20
한글본문.
1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15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영어본문.
1 Then Jacob continued on his journey and came to the land of the eastern peoples. 2 There he saw a well in the field, with three flocks of sheep lying near it because the flocks were watered from that well. The stone over the mouth of the well was large. 3 When all the flocks were gathered there, the shepherds would roll the stone away from the well’s mouth and water the sheep. Then they would return the stone to its place over the mouth of the well. 4 Jacob asked the shepherds, “My brothers, where are you from?” “We’re from Haran,” they replied. 5 He said to them, “Do you know Laban, Nahor’s grandson?” “Yes, we know him,” they answered. 6 Then Jacob asked them, “Is he well?” “Yes, he is,” they said, “and here comes his daughter Rachel with the sheep.” 7 “Look,” he said, “the sun is still high; it is not time for the flocks to be gathered. Water the sheep and take them back to pasture.” 8 “We can’t,” they replied, “until all the flocks are gathered and the stone has been rolled away from the mouth of the well. Then we will water the sheep.” 9 While he was still talking with them, Rachel came with her father’s sheep, for she was a shepherdess. 10 When Jacob saw Rachel daughter of Laban, his mother’s brother, and Laban’s sheep, he went over and rolled the stone away from the mouth of the well and watered his uncle’s sheep. 11 Then Jacob kissed Rachel and began to weep aloud. 12 He had told Rachel that he was a relative of her father and a son of Rebekah. So she ran and told her father. 13 As soon as Laban heard the news about Jacob, his sister’s son, he hurried to meet him. He embraced him and kissed him and brought him to his home, and there Jacob told him all these things. 14 Then Laban said to him, “You are my own flesh and blood.” After Jacob had stayed with him for a whole month, 15 Laban said to him, “Just because you are a relative of mine, should you work for me for nothing? Tell me what your wages should be.” 16 Now Laban had two daughters; the name of the older was Leah, and the name of the younger was Rachel. 17 Leah had weak eyes, but Rachel was lovely in form, and beautiful. 18 Jacob was in love with Rachel and said, “I’ll work for you seven years in return for your younger daughter Rachel.” 19 Laban said, “It’s better that I give her to you than to some other man. Stay here with me.” 20 So Jacob served seven years to get Rachel, but they seemed like only a few days to him because of his love for her.

도움말.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9절). ‘그’는 여성형이며 여자 목자로서 양들을 치고 있었다는 의미다.
칠 년(18절). 당시 신부의 결혼 지참금은 보통 신랑의 1년 치 삯이었다.
더 사랑하므로(18절). 원문에는 비교급이 나오지 않고, 라헬을 사랑했다는 표현만 나온다. 즉 레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4-9절)?
⬇ 아래로 인간. 삼촌 라반은 야곱을 어떻게 대하는가(13-15절)?
? 물어봐. 야곱은 어떻게 7년을 며칠 같이 여기며 일할 수 있었는가(18, 20절)?
! 느껴봐. 지금 내가 일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 옆으로 실천해. 내 일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Meditation. 성도에게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인도에 우연은 없다. 모든 걸음이 그분의 예비하심과 섭리 속에 있을 뿐이다. 야곱은 먼 길을 여행한 끝에 하란 부근 우물가에서 장차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난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을 만난다. 그의 이전 행동을 볼 때(24:29 이하), 야곱이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야곱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함께 지내며 그에게 얻을 특별한 유익이 없는 것을 보고 그에게 삯을 정하자고 제안한다.
야곱은 당시 신부 지참금에 해당하는 1년 치 삯보다 무려 7배나 되는 조건을 내걸고 라헬을 달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라반과 라헬, 이 두 사람을 통해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 라헬을 통해서는 7년을 며칠처럼 여길 정도로 순수한 열정과 동기를 배운다. 장자권을 빼앗고자 고민하며 형을 속이고 살았던 야곱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또한 라반을 통해서는 간교하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뼈저리게 경험한다. 이처럼 야곱의 피난은 성품과 영성을 훈련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당신 주변의 관계 하나하나를 감사하고 그 가운데 감추어진 섭리를 발견하라.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