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 걸린 남편이 “나 여자 있어”라고 고백한다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정호 저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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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글 | 김이준수 사진 | 출판사 제공
최근 칸영화제에서 <스틸 더 워터>라는 신작을 선보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2007년작 <너를 보내는 숲>.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별(상실)에 대처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느닷없는 이별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이들이 주인공이다. 상실의 슬픔을 품은 이들은 눈물, 즉 ‘티어스테라피(tears therapy)’를 통해 이별을 감내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생(生)임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읽고 있었다.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중요하며, 이별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살아있음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작가만남-채정호
지난 5월 28일의 봄밤에는 그렇게 <너를 보내는 숲>이 떠올랐다. 이날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톨릭의대, 정신과 전문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전한 세월호 정국. 이 집단적 슬픔 앞에 우리는 어떻게 견뎌나가야 할까.
감정에 충실하게 복무할 것.
“감정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슬픔의 감정이 움직였다면, 어떻게든 그 감정에 귀 기울어주는 것이 옳다. 그래야 그 슬픔의 감정으로부터 내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1쪽)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그러나 한국인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희로애락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채 교수는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화내는 것은 잘 하나, 기쁠 때 이것을 잘 표현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즐거움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다.
“슬프면 슬퍼야 한다. 희로애락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상 시 그런 것이 별로 없다. 4년에 한 번 월드컵 하면 기쁘고(웃음). 평상시 기분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감성적임에도 기쁠 때 기뻐하지 않는다. 화날 때는 화내면 되는데, 화를 안 낸다. 그러다 나중에 지랄을 하고(웃음). 장례식 가서도 울어야 한다. 요즘 세월호 관련한 정신과 치료를 맡고 있는데, 제대로 울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슬픔의 감정을 섣불리 억누르지 말자. 감정이란 본능적인 것이다.(중략) 슬픔이란 감정은 한치의 오차가 없다. 슬픔의 대가를 일시불로 치르느냐 아니면 할부로 치르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9쪽)
우리는 뭔가 잃고 상실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운 적이 없다. 대신 어떻게 하면 얻을 것인지만 배운다. 돈, 성적, 집, 승진 등이 그것이다. 계속 얻어야 하는 것만 주입받는다. 삶은 그러나 얻을 수만 없다. 얻으면 잃는 것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상실하고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채 교수의 이야길 들으면서 도정일 교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 교수는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 기술을 언급했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이 훨씬 중후해 보이는 것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와 함께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어떻게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가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상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상실의 의미).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상실의 순간을 결코 피해갈 순 없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행복했던 결혼생활도 언젠가는 끝난다. 사별이나 이혼, 이 둘 중 하나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부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일도 그렇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은퇴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중략) 삶이란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8쪽)
살다보면 안다. 견디기 어려운 상실은 갑자기 찾아온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다. 세월호도 그랬다. 4월 16일 이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 그러나 그날이후 아픔과 슬픔이 갑자기 닥쳤다. 전쟁도 그러하며 교통사고도 그렇다. 채 교수는 이별은 내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힘들어진다. 예고 없는 이별, 준비 없는 상실. 그렇기에 묻는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실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채 교수에 의하면, ‘애도(哀悼)’를 잘 해야 한다. 애도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을 때의 정신적 충격과 그에 따른 심리적 반응과 진행 과정. 즉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그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한다. 결혼의 끝은 무엇일까. 이혼이나 사별이다. 대언이 있나? 없다! 아들, 딸을 사랑해도 그 관계의 끝은 무엇일까. 내가 죽거나 아이가 죽거나. 물론 의절도 있겠지만. 모든 관계의 끝은 안 보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 너무 두렵지. 굉장히 좋아하면 이별이나 상실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어떤 것도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사실 치유나 힐링은 개소리다(웃음). 치유는 안 된다. 상담 받으면 치유가 된다고? 치유,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영화 <상실의 시대>에 나온 와타나베의 말을 인용했다. “나오코가 내게 가르쳐준 건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치유란 없었던 일처럼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나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다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33쪽)
상실로 인한 심리적 문제들(상실의 상처).
그렇다면 상실로 인한 문제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 채 교수는 자신과 상담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30년을 함께 산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간암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그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남은 3개월 사랑하는 이와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것도 10년이나 된 사이. 아내는 묵묵하게 남편의 소원을 들어줬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아내는 화병이 나서 채 교수를 찾아왔다.
“화병이 안 오면 이상한 거다. 부인이 쿨하게 장례까지 치르고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세우는데 7~8년이 걸렸다. 그만큼 치유가 안 된다. 자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럴 땐 화를 내야 한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부인이 화 한 번 안 냈다. 상실이 있을 때 화가 나는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화가 계속 나는 건 문제다. 화가 계속 간다면 우울이다. 우울한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나 계속 가는 것은 나쁘다.”
“화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화의 감정은 정직하다. 따라서 화가 났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 반응할지가 더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79쪽)
그는 ‘망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감정을 눌러 놓으면 반드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을 눌러놓으면 어느 순간 생뚱맞게 튀어나온다. 너무 누르기 때문에 계속 가고 병이 된다. 이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불안 역시 상실 후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국은 지금 ‘범불안장애주의보’가 내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화나 우울처럼 계속 가는 것은 문제다. 중독에 빠지는 이유다. 중독은 뭔가를 대체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 술을 많이 마시거나, 도박에 빠진다. 혹은 물건을 사는데 열중하는 쇼핑 중독에 빠진다. 아울러 충동적이 되거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실연 뒤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애도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위해서는 과거의 삶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즉 과거의 상태를 버리는 것이 애도의 핵심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00쪽)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법(상실의 치유).
“동양철학에서는 애이불상(哀以不傷)이라 하여 슬퍼하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건강한 슬픔이라고 말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85쪽)
채 교수는 거듭 강조했다. 치유는 안 되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에 잘 사는 방법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잘 우는 것(눈물). 물론 계속 울어선 안 된다. 울 때 우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우울도 있는데, 이것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적절하게 슬퍼하고 눈물 흘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
“나 스스로 슬픔의 통로를 만들고, 그곳으로 상실의 감정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우는 것이다. 나에게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53쪽)
또 하나는 말, 즉 이야기다. 내 상태나 감정이 어떠한지 이야기할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훌륭할까. 그는 어떤 개소리라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의 원칙은 이랬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우리는 진지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잘 못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만들어라. 그게 없으면 돈을 내고 정신과에 오는 거다.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 힘든 사람에겐 진지하고, 공정하게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실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세 가지는 울기, 말하기, 시간이다. 정말 견디지 못할 정도면 치료를 받아도 된다는 것이 채 교수의 말이다. 상실의 슬픔이 병적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면 치유과정에서 얻을 것만 얻으면서 시간과 함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지 못하면 달라지지 못한다. 그러면 상처를 누르면 튀어 오르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를 잃는다면 그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나다. 내가 아닌 게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전의 모습에 익숙해서 내가 아닌 것 같은데, 그 잃어버린 것도 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없다고 정말 없는 걸까? 지금 없다고 그 사람과 살았던 시간이 없는 것일까? 치유와 회복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런 순간을 ‘딜리트(delete)’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내 안에 있다. 같이 있는 것이다.”
아무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상실을 잘 애도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제자원봉사를 나갔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딸.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원했던 국제자원봉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나도 살고 딸도 사는 방법을 택한다.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가 떠올랐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채 교수는 상실과 이별을 내 삶의 사실로 받아들일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것은 순서적, 시간적 문제라는 것. 이별하면 끝이 아니다. 잃어버린 나도 내 삶이다.
“세월호 이후 내 자식이 살아 있어서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이 아프다. 아프지 않으려고 하지 말자. 아파도 된다. 아픈 것만큼 기쁜 것도 누리고, 대체는 안 되지만, 다른 것에 기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잃고 죄책감 등으로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녀에 대한 이야기,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이다. 울고 싶으면 울고 말해야 한다. 시간도 필요하다.”
“상실의 문제에는 시간의 원칙이 적용된다. 물론 상실의 대상과 자신의 심리적 자원에 따라 애도 기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중략)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상실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의 속도에 맞추어 애도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이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92쪽)
내 인생에 있었던 것을 ‘딜리트’ 키를 누른다고 없앨 수 없다. 라캉 왈, “애도는 산 자에게 욕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애도다. 그 중에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이 나다. 자녀를 잃어버린 나, 남편을 잃어버린 나,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게 애도다.
“치유는 안 되나, 안 돼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다. 30여년 정신과 의사로 있지만, 나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 안 되더라. 그래도 괜찮다. 꽤 괜찮다. 치유는 안 됐지만 나름대로 살 수 있다. 그러니 쫄지 마라. 그래도 살 수 있다. 병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괜찮을 수 있다. 내 삶이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울고, 때론 말하고, 때론 시간 보내고, 그러면 괜찮다.”
정신의학적으로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비워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콤플렉스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내가 비우고 싶고 지우고 싶은 덩어리가 있을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도 나다. 그 아픔이 없기를 원하는 거지. 딱 그 시간, 그 상처만 없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잖나. 그걸 도려내면 내 인생이 아니다. 나빠지지 말고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난 모든 것이 쌓인 것이 지금의 나다. 나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지우려고 하지 말고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온전히 계속되어야 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45쪽)
극소수지만, 이지선 씨는 엄청난 상실을 당하고 난 뒤 훌륭하게 승화를 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표현도 쓰던데, 상실이나 상처가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나?
많은 연구들이 있는데, 힘든 일을 겪고 더 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나, 많지 않다. 열 명 중 한 명 정도다. 또 열 명 중 한 명은 병이 나고 망가진다. 나머지 여덟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거나 조금 나아지거나 그냥 산다. 좀 더 큰 나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건강한 사람, 원래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좋아진다. 원래 어땠느냐가 중요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나 충격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개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있는 사람들, 삶에 사랑의 흔적이 많은 사람들이 회복을 잘 한다. 우리 모두는 상실을 겪는다. 외상 후 성장을 하려면,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끔찍한 일을 겪어도 회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정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살 길은 사랑하는 것이다. 치유는 안 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사랑해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다른 이와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일이 아닌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상실은 그만큼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흔적이다.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아픔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