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사와 기쁨을 강요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 함께 울어 주고 함께 아파할 때만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평생 자녀와 가족을 가슴에 묻고 죽을 때까지 상처를 견디어 내며 살아야 할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민규 필자 주

I.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에는 긍정의 강요가 넘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승리하는 삶일까? 예수 믿으면 내면의 아픔은 모두 기쁨으로 바뀌어야 하나? 믿으면 실패를 느끼는 것도 좌절감이나 우울한 감정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참된 기독교인이라도 죽을 때까지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다만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런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의 안식을 누릴 기회들이 있을 뿐이다. 상처와 고통 그리고 기쁨과 평화란 두 손님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적으로 오거니 가거니 하는 삶, 그래서 견딜 만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상처는 잠시 잊거나 덮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요즘 신앙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상처와 고통, 슬픔을 넘어서 늘 기뻐해야 한다는 강요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일처럼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학대한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혹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기 때문이란다.

II. 몸글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초청이지 강요가 아니다. 사실 슬플 땐 울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볼 때는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반응이다. 이는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깊은 영성을 지닌 기독교인의 자세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목석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메마르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다. 성경을 보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감정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조건 부정적이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는 세상에 사는 동안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세상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런 예들을 살펴보자.

1.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

1) 건강한 염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 사이엔 염려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염려는 누구나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염려 자체가 항상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선한 염려도 있고 나쁜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염려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한 염려라면 부정적이지만 이웃 사랑과 섬김의 차원의 지혜로운 염려라면 영성의 일부가 된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하고 의로운 염려를 하라고 요구하신다. 많은 이가 겪는 지저분하고 해로운 염려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건강한 염려가 있기에 우리는 부주의한 사고도 면할 수 있고 어떤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긍정적인 염려에 관한 바울의 예를 보자. 고후 11:28을 보라! 바울은 그를 짓누르는 선한 근심을 토로한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오직 그분에게 맡기고 나는 편히 쉬며 기뻐하리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모습은 “신앙 없음”, “믿지 못함”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염려하듯이 말이다.

2) 건강한 상심과 슬픔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거룩한 상심과 슬픔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들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심히 슬퍼하셨다. 사도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을 초월한 도인처럼 초연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몹시 상심하며 그들을 위해 많이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고후 2:4 새번역). 그는 “난 속상하지 않아!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신앙으로 하나님께 맡기니 내 마음은 늘 편하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때론 속상하고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거룩한 표현일 수 있다.

3) 건강한 분노

예수님을 보라. 악한 자, 위선자들을 보셨을 때 세상을 달관한 이처럼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계셨나? 아니면 분노를 품으셨을까? 예수님은 나사로와 같은 가까운 이가 죽었을 때,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시며 슬피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3-35). 그저 연기하신 것이 아니셨다. 교리상으로 볼 때 죽은 자가 하나님 품으로 갔으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목회적 차원에서 위로한 것일까? 아니다. 지금 사랑하는 이가 당장 내 곁을 떠난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살기 좋은 나라로 이민하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도 슬피 운다. 딸을 좋은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아버지도 식장에서 슬피 운다. 성경은 애통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물론 무엇에 관한 애통인가가 중요하다. 사리사욕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세상을 꿈꾸는 애통일 때 복이 있다는 뜻이다.

4) 거룩한 불평

불평하는 것은 과연 항상 나쁜 것일까?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평뿐만 아니라 기쁨도 평화도 다 나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중심일 때 슬픔도 불평도 저주까지도 다 좋은 것이다. 나쁜 말을 하고 죽고 싶은 마음은 악한 것일까? 욥도 하나님께 불평했고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욥 3:1-10). 물론 그의 거룩한(?) 친구들은 그의 이런 신앙 없는 행위를 꾸짖었다.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불평했다.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다. 위선으로 우리는 자신을 학대하고 남에게 짐을 지운다.

그들은 악하고 속이 좁은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몰라서 불평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롭고 선한 이들이었기에 세상에 대해 불평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그분의 능력을 믿어서 하나님께 아픔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웃들과 피조물의 고통에 함께 참여했다. 마치 우리의 연약하고 고통스러움에 참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말이다. 제발,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그들의 눈물에 함께 울어 주고 고통에 함께 아파할 때만 그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고 늘 감사해야 할까? 정말 짜증 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받아들이고 감사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 분노하는 이들이 결국 더 크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전도연)가 그런 예일 것이다. 유괴범에 의해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가짜 용서와 감사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다가 결국 터져 버린다. 강요된 긍정은 결코 힐링의 힘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참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자신의 좌절과 한을 표출하셨다.

2. 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마음이 늘 평안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성령이 충만한 이는 늘 마음이 평안하고 초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는 성경으로 본다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하다. 몸을 가지고 사는 한, 그리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삶에는 눈물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성경은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눈물도 아픔도 사라지고, 연약함을 더는 체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상태는 오직 부활 이후의 복이다. 지금은 아직 아니다. 이미 천국이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크고 작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늘 부분적으로만 주님의 생명과 평온을 체험할 뿐이다. 오히려 믿는 이들도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남들처럼 다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거하기 때문이다.

3. 사역자라고 연약함과 고통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 후의 현실이다.

1)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런 일이 있는데 괴로워하지도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기뻐 찬양하는 것이 높은 영성일까? 난 솔직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때론 나도 기도 가운데 충만을 체험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해도 그렇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내가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을 크게 오해한 것이었다. 이는 중요한 과정이 생략된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난 내 내면의 슬픔으로부터 도망하여 주님의 기쁨을 찾았다. 그러나. 진짜 기쁨이 넘칠 수 있으려면 내 연약함을 다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세상엔 별 인간 없다. 물론 영적으로 충만하면 힘든 일에 대한 극복이 빨라진다. 쉽게 과거를 털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자 강박관념을 가질 때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집착해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한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2)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도피일 뿐 바른 방식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가식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회복된 상태다. 순수함이 있는 아이에겐 조작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어른보다 건강하다. 아이처럼 슬플 때 진실하게 슬프고 아플 때 진실하게 그 아픔을 느껴라. 이웃이 슬플 때 그들과 함께 진실하게 슬퍼해 보자. 그때 우리에겐 힐링이 일어난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 안에 스며드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이 방식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라.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울어 주라.

3)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때 아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내 연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하는 그릇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던 중 바울은 질병을 앓았다. 하도 사역의 방해가 되어서 그가 이를 사탄의 하수인 같은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그가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성령님께서 함께하셔도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약함을 체험한다. 피할 길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롬 8:26).

4)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결코 염려와 속상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피하지 마라.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그럴수록 그런 감정을 잘 다스리고 극복이 빠르다.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더 아프다. 현실적으로 보면 영적인 사람일수록 사는 것이 더 힘들다. 사서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살면 힘든 일과 갈등도 더 많이 겪는 것이 정상이지, 어찌 가는 길이 늘 평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치고 평탄한 길 간 사람 없다. 진리의 길은 늘 모욕, 갈등, 핍박을 겪게 된다. 그래도 살 만하다. 왜? 주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나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는 긍정의 자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병이 드는 것 같다.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단한 사람은 없다. 믿음이 있다 해도 내면은 다 약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를 믿어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평생 상처는 평생 상처로 남는다. 다만 끌어안고 주어진 삶을 살아 낼 능력을 배울 뿐이다. 체면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 중에도 마음이 아픈 이들이 주변에 많다.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자. 외롭고 힘들 땐 솔직하게 힘들다고 말하자. 그리고 약함을 고백하는 이의 손을 잡아 주자. 우리 모두 자신의 약함 가운에 주변의 위로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강함을 체험해 보자.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나의 약함을 기뻐한다고 말한 바울의 의미는 자신의 연약함에서 도피하여 강함을 체험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만큼 그분의 강함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글쓴이,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성서신학 교수,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저자
<뉴스엔조이 2015.04.10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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