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부제: 선교는 무엇을 겨냥해야 하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부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수 차례 예언했다(마16:21절, 17:23, 20:19절). 이 예언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마27:63절). 그리고 자신의 부활 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안했다(마26:32, 28:7, 10절). 스승의 약속대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28:16-17절).

이 때 선교사명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주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절)

선교 명령의 근거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기 때문(18절)이다. 부활 전 예수님은 구세주와 주가 될 자격자를 지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부활 후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Savior)와 만유의 주(Lord)가 되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절, 롬1:3-4절 참조)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우리의 의를 의해 부활했기 때문이다(롬4:25절). 당연히 그는 구속 받은 자들의 구원자와 주이다. 이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를 명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유대인만 위하지 않고 이방인 가운데 있는 선민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전해진 복음에 의해 이방인들도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것이다.

겉으로 보아 선교 사명의 주목적은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로 성취한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만이 전부가 아니다. 상기 본문에서 몇 가지 동사들이 보인다. ‘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 그리고 ‘가르치라!’ 원문에선 ‘제자 삼다’가 본동사이고 나머지는 보조동사들로 모두 현재 분사형이다. 보조동사들은 본동사를 더 잘 설명해 준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려면 그들에게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야 한다. 결국 제자를 삼는 방법은 셋이다. ‘가라’라는 명령에 따라 국경선을 넘어 이방 족속들에게 가야 한다. 그러나 가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복음을 전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게 한 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그들을 가르쳐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해야 한다. 선교의 목적인 제자 삼는 일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례를 주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가르침대로 지키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교의 목적이며 파송과 세례 주는 일은 이의 달성을 위한 보조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교파와 교단에 속하는 교회들은 ‘가라’라는 명령에 초점을 두며 선교사 파송이나 그 수를 늘리는 일에 힘을 쏟는다. 선교가 종교 사업처럼 된다. 반면 다른 교회들은 세례를 주는 일에 주력하며 자신의 교세를 세계 곳곳에 확장하고자 진력한다. 구교를 비롯한 개신교의 많은 교회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이다.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대형교회들이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의 이름을 파송 교회와 연결시키는 이유이다.

선교의 목적은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족속들에게 가르쳐 지키도록 함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목적이 있다. 이런 제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전세계적으로 실현되며 자연스럽게 인류 사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결과 세상과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원자와 진정한 주임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69782012 문화명령과 선교명령 )

이를 염두에 두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누구와 같은가를 설명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절)

사도 바울도 이를 잘 알기에 구원 받은 성도를 이렇게 소개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흔히 복음 전파나 세계 선교를 구원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아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선교 명령에서 ‘가라’ 나 ‘세례를 주라’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아니다. 신국론(Doctrine of God’s kingdom)의 관점에서 선교명령을 해석해야 한다. 신국(神國)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이다.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98295553 )

결국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선교 명령의 주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움에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다. 첫 사람 아담이 이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임을 잘 안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천국 복음을 외쳤다(마4:17절). 공생애의 중기(마13장)와 말기(마25장)에도 천국 비밀을 설명하는 비유들을 전했다.

부활 후 승천 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했다(행1:3절). 그리고 승천 직전 선교 명령을 제자들에게 줌으로 자신의 구속 사역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명했다. 이 일을 돕기 위해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보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은 신자의 참여를 요구하지만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행1:8절).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220007413081 )

예수님의 사역 목적은 바로 창조기사(창1-2장)가 지향하는 목적과 동일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이 세상에 인류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창1:26-28절). 아담의 불순종으로 잠시 이 목적은 실패했다(창3장).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구속을 성취했다(창3:15절). 그렇게 출발된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되며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것이다.

창조와 구속 사이 어떤 신학적 모순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사역 면에서 모순되어선 안 된다. 결국 구약의 문화사명(창1:28절)과 신약의 선교사명(마28:18-20절) 사이 어떤 모순도 있어선 안 된다. 이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교회는 국내와 국외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종교사업이나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함이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이 분부한 것들을 지켜 행하는 제자들의 수를 전세계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방법으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전세계적으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렇게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바로 무천년설이 주장하는 천년 왕국기간이 아닌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밖 즉 세상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목적(창1:26-28절)이었다.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목적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면 그의 몸인 교회도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7890369 )

결국 조직신학의 모든 각론들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각론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님의 경륜인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난다.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렇게 설명된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11662799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절)

[출처] 선교사명의 목적은 무엇인가?|작성자 오뚝이

http://blog.naver.com/rassvet/2200326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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