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진정한 회개에는 삶의 변화가 따른다.
개역성경 번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다른 번역 제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은데(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진홍같이 붉을진대 어떻게 양털같이 되겠느냐?(사 1:18).”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은 성도들에 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문맥 무시한 채 18절만 읽으면 위의 개역성경의 번역이 자동 나온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번째 질문형의 번역이 훨씬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장의 결론이 심판 내용이기 때문이다.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특히 그들의 죄가 주홍, 진홍 같다는 표현은 신약의 가르침처럼 모든 인류의 죄인 된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15절의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면”을 떠올린다. 이는 그들이 행하던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의 고통을 외면하여 약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를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교리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문맥보다 교리가 앞설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러려면 문맥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번역에 교리라는 선입관이 문맥보다 앞설 때 성경 본문의 의도는 왜곡된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겠지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듣는 것은 상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의견이 선입관일수도 있다. ^^)
이 말씀은 정말 모든 죄가 사하여질 것이라는 용서에 관한 내용일까? 사실 문맥 무시한 채 18절 원문만 보면 두 번역 모두 가능하다. 고대 히브리어 원문에는 ‘?’와 같은 물음표 사용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1장 18절은 원문으로 보면 선언문이 아니다. 미완료 과거형의 조건절이다. 문법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만일 너희 죄가 주홍 같다면(if your sins are like the scarlet robes)”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후반부에 따른 번역을 선택해야 한다. 즉, “흰 눈같이 될 것이다.” 아니면 “흰 눈같이 되겠느냐?”가 문자적 번역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만일 너희 죄가 진홍 같다면, 흰 눈같이 될 것이다” 아니면 “만일 너희 죄가 진홍 같다면, 흰 눈같이 될 수 있겠느냐?” 중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가? 이것이 안건이다.
사 1:18이 질문이냐 아니냐는 문맥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들의 죄악이 눈과 같이 희게 용서함을 받았다”는 선언으로 보지 않을 때 1장의 결말이 묘사하는 그들이 왜 그토록 비참하게 심판을 받는지에 대한 답이 보다 쉽게 나온다.
위의 본문에 관한 독일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셨던 독일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그러셨다. 전공 교수들도 교리 때문에 다 눈치를 봐야 한다고. 교리의 장벽이 너무 강해서 자체적인 번역을 따로 해야 할 판이라고. 그래서 독일어 성경에는 각주로 전공 교수들의 의견을 다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권력을 가진 비전문가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란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우리 성서공회에서도 번역에 참여하시는 교수들이 이런 문제로 많이 고민한다. 한번은 필자도 대한성서공회 당국자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다 알지만 결정권이 있는 분들(비전공자들이심)이 불편해하시는데 할 수 없잖아. 아직 때가 아니야!”
사실 문맥을 살펴보아야 본문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죄로 붉게 더럽혀졌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눈처럼 희게 씻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의 얼룩은 짙은 홍색이다. 너희는 너희가 양털처럼 하얗게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이사야의 질문은 풍자적 의미를 내포하며, 백성들의 얕은 회개를 넌지시 말하는 것이다.”
독일성서공회 해설 성경을 번역한 대한성서공회 관주 해설 성경전서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백성과 소송하시려고 이들을 불러내신다. 18 하반절은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보통은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이를 무조건적인 용서의 약속으로 이해한다. 문맥상으로 보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다면(사실 그렇다!), 과연 너희가 (제사를 통해) 눈처럼 희어지겠는가? …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언약으로 정한 의무에 순종해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며 약속하신 바들도 요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신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은 성도의 상태를 설교하려면 계시록이나 다른 본문으로 설교해야 더 적합할 것 같다. 이사야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하나님이 유다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도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세상에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사야서 1장은 소송의 문맥에서 쓰였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2)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로 시작하는 18절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본문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패역한 유다 백성을 소송하신다. 1장은 언약의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를 밝히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송사하시고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들의 죄악은 무엇인가? 전체 문맥에서 보자. 11~14절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다양한 제사와 월삭과 절기를 정성껏 준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그들이 가난한 자와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은 결코 언약에 따른 복을 그들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고(10~17절) 그들에겐 저주만 내려질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가지고는(10절), 기도하는 이의 손에 과부와 고아의 피가 있을 때 그 기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15절).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의 복을 받는 길은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길이다(16~17절).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 이후 18절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만일 너희 죄가 주홍 같다면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만일 진홍같이 붉다면 양털같이 되겠느냐?(사 1:18)”
회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여 주실 것이지만 유대의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다(1:23).”
그래서 하나님이 몸소 개입하셔서 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죄악에 빠진 창기와 살인자들 같은 원수들은 심판받고(1:23~24)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회복될 것이다(1:25~26).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대부분은 패망을 받을 것이다. 죄를 씻는 길은 피의 제사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닌 회개와 순종뿐인데 강퍅한 악인들은 이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1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사 1:28~31).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명시된 사회적 의무를 행하지 않을 때 어떤 종교적 제의도 죄 사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종교적 제의로는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죄를 결코 희게 만들 수 없다. 불가능하다. 회개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함을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세상에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 1:18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악인으로 살면서 종교적 제의와 절기를 지킨다고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법은 없다는 가르침은 결코 그리스도 언약에 따른 완벽한 죄 사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오히려 이사야서 1장 18을 단박 구원 방식으로 오해해서 실족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형제자매에게 몹쓸 죄를 지어 놓고도 진심으로 뉘우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홍 같은 내 죄가 눈과 같이 희어졌다잖아. 죄 사함 받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면서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는 이를 다그친다. 회개 없는, 삶의 변화로 이끌지 못하는 죄 사함은 거짓 구원의 확신을 만든다. 그리고 나와 이웃을 실족하게 한다.
우리도 변론해 보자. 진심 어린 뉘우침과 이웃을 향한 삶의 변화 없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말이다. 회개는 단순한 죄 사함 교리에 대한 동의나 종교 행사에 참여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진심으로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경청해야 할 말씀이다. 우리도 세상의 악인들과 다름없이 살면서 죄 사함의 은혜만 강조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뉴스엔조이 목회/신학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