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바이블 김진산 목사님이 올려주신 글입니다.
최근 중동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아쉬에 관한 이스라엘의 관점이라 읽어볼 만 하네요.
텔아비브 대학교 교수인 시몬 샤미르 교수가 이스라엘의 유명 일간지 하아레쯔에 기고한 글입니다. 연세대에서 강의하시는 윤성덕 박사께서 번역해서 올려주신 내용인데 현재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IS(다아쉬)는 아랍인들이 그토록 꿈꾸오던 희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상황인지..제목은 “아랍의 실패”입니다^^
아랍의 실패
쉼온 샤미르, 텔아비브 대학, 중동 역사학과 명예 교수, 이집트와 요르단 전 대사
2015년 11월 26일 하아레츠(http://www.haaretz.co.il/opinions/.premium-1.2785586)
21세기는 갈수록 아랍 세계에 재난이 겹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부족들, 민족들, 지역 군대와 정부군대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고, 아랍 국가들은 이런 집단을 통제할 능력을 잃고 분해되고 있으며, 순니와 시아파 사이의 갈등은 아랍을 갈라놓고 있고, 지하드 이슬람 군부 세력들은 아랍 국가 영토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따로 자세히 논의하기에 앞서 아랍 국가들이 현대에 진입하는 역사적 과정이 왜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 서구세계가 아랍/이슬람 세계에 침입하면서 아랍인들은 찬란한 문화적 유산을 자랑하는 자신들이 왜 열등한 민족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음 네 가지 도전에 응해야 했다. 첫째, 국민들이 참여하는 제대로 기능하는 국가 조직을 가진 주권 국가를 확립하기. 둘째, 국제 경제 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는 기술력을 발전시키기. 세째, 분명한 가치관을 통해 사회를 이끌 수 있고, 신-식민지 사상의 영향에서 해방된 독립된 정체성을 확립하며, 사회를 퇴화시키는 폭력적인 세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이슬람교 전통을 수립하기. 네째, 국제 외교 무대에서 강대국으로부터 독립된 세력으로 활동하기.
아랍국가들이 20세기 중반에 독립하면서 이런 임무들은 곧 성취해야 할 국가적 목표가 되었고, 또 이를 성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어떤 나라에서는 개혁적인 정부가 정권을 잡고 이런 임무를 자진해서 어깨에 짊어졌다(나세르). 이들은 국가 조직을 단단히 감독하며 국가 기관을 확립해 갔고, 강력한 교화와 교육 정책을 실시하여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긴밀하게 규정하였다. 그들은 생산시설을 국유화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국가의 과학적 기술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 가르쳤다. 이런 체제를 “아랍식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이슬람교는 상징적 선언적 차원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이런 정부가 세속 정부였기 때문에 이슬람 군부 세력을 탄압하였다. 이들은 외국 군대의 주둔기지를 제거하였고 “바그다드 협약”과 같은 외국의 전략적 보호도 거절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아프리카-아시아 권역과 함께 국제 무대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기능하기를 바랐으며, 그래서 “긍정적인 중립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현재 아랍인들이 닥친 현실은 매우 다르다. 연구자들이 범하는 가장 충격적인 실수는 우리가 사는 지역이 “사회는 허약하지만 국가는 강력하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통치를 강제하는 강압적인 조직(무바락)은 그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이 속속 드러났다.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정부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이 출현하였고, 이들은 현대화 과정에서 자기들의 사회는 이미 활동력을 잃었다고 간주하고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결과 어떤 나라는 망하고 다른 나라들은 안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아랍 국가들은 여러 면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그들의 이념적 틀도 굳건하지 못했다. 모든 이념이 현대에 새롭게 만들어졌고 마땅히 부를 이름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랍 국가가 과거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전통적인 사전에서 “다블라”라는 말을 취하였다. 이제 이 “다블라”라는 말은 “국가”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원래 “다블라”라는 말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왕조를 가리키며, 곧 정권을 불러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개념은 곧 정권과 같다고 생각하며,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독재적인 정권이 무너지면 그 대신 민주적인 정권이 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정권이 넘어가면 국가의 틀 자체가 무너져서 결국 카오스가 나타나고 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아랍의 봄”을 주도한 젊은이들이 실패한 요인이다. 독재 정권을 쓰러뜨릴 수는 있지만 이를 대신하여 민주주의를 건설할 적절한 사회적 사상적 조직적 기반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현재 단계에서 많은 아랍 국가들은 독재 정권이나 전통적인 왕정 하에서만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려도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서구세계에서 생각하는 현대 국가를 세우는 일은 아직도 미래에 성취해야 할 의무로 남아있다.
유사한 실패는 경제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아랍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고 지난 몇 십년 동안 눈에 띄게 경제가 발전하여 막강한 부를 쌓은 나라도 있다(카타르는 국민총생산 면에서 지구상 가장 부유한 나라이며 쿠웨이트는 네 번째로 부자 나라다). 그러나 음식과 생필품들을 수입하기 위해서 그들은 영토 안에 있는 자연자원과 관광 수입, 해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이집트의 경우 수에즈 운하에서 버는 외화가 필수적이다. 국제 시장에는 아랍 국가들이 생산하는 최신 기술 공산품을 찾아 볼 수 없다. 현실을 실감하기 위해서 이집트와 남한을 비교해 보라. 처음 독립국가를 건국할 때 두 나라의 경제 지표는 거의 동일했다. 그러나 이집트와 달리 남한은 하이텍 제품부터 시작해서 자동자와 배 등 거의 모든 제품을 생산한다. 남한의 경제 규모는 이집트의 다섯 배에 달한다.
국제 경제의 놀라운 발전은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 분야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나라는 뒤로 쳐지고 있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 최신 기술을 이용한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한 과학적 기술적 지식은 필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국제연합에서 발표한 “아랍의 인류 발전”이라는 보고서에는 이 현상을 “지식 부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아랍 국가들이 발전하지 못하는 세 가지 요인들 중 하나라고 규정한다. 아랍 국가에서 지식 기반이 부족한 이유는 학교와 대학들이 충분히 많지 않고, 이런 학교에서 아직도 암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 부족의 또 다른 이유는 하층 세계가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랍 국가에는 번역문학이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연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세기 말 5년 동안(1981-1985) 외국 책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국민 한 명 당 4.4권이었다. 같은 기간에 헝가리는 519였고, 스페인은 920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랍인들이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기술을 수입한다고 해도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 기술은 매우 빠른 속도로 새로 개발되고 또 사장되기 때문에 그 기술을 직접 개발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기술을 배워서 효과적인 경쟁력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독창적인 창의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런 특성은 아랍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초현대식으로 빛나는 외양을 가진 페르시아만 국가들도 자기 힘으로는 절대 생산할 수 없는 선진국들의 제품을 사들이는 구매력만 있을 뿐이다. 동일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1980-2000년 동안 아랍국가 전체가 등록한 특허는 모두 370개 였고, 이스라엘은 7,700개의 특허를 냈으며, 남한은 모두 16,300개의 특허를 인정받았다. 인구 백만 명 당 연구인력의 숫자는 아랍 국가에서 300명이지만, 전세계 평균치는 900명으로 세 배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아랍 국가에서 젊은이들의 실업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아서 30-50%에 이른다.
아랍 국가에서 이슬람의 “제도화”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 동안 수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군부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가말 압드 알나쯔르는 이슬람 형제단 수천 명을 감옥에 수감했고, 하페즈 알아싸드는 수만 명을 학살했으며, 알제리 군대는 지금도 이슬람 군부와 잔인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슬람화 현상을 보여주는 20세기 말의 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슬람 세력의 엄청난 성장을 잘 보여준다. 2000년에 이슬람 군부는 규모가 작았고, 게릴라 전을 펼치며, 작은 규모의 활동에 그쳤는데, 2015년에 이들의 군대는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아랍 세계 넓은 지역에 확고한 발판을 굳히고 있다. 이들은 그 지역 정부만 위협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정부를 후원하는 외국까지 공격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세계는 전례없는 대규모 테러행위를 계속해서 목격해 왔고, 911 테러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특히 지난 5년간 이슬람 세력이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테러 때문에 죽은 사망자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전년 대비 10배가 늘어날 때도 있다.
이런 이슬람화 현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는 주로 군사적인 해결책에 의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슬람화 현상은 단순히 테러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 먼저 이 지역에 위태로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많은 무슬림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아랍 국가들은 이 생각에 대응할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이런 의견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각들을 무시해 왔다. 20세기 초반 무슬림들 중 자유주의 사상이 나타났었다. 인도주의적, 이성적 이슬람 사상이 지식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아랍 국가 정부들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자는 선택을 거절했고 중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모든 선택 가능성의 단점들만 그대로 떠안았다. 아랍 국가들은 잔인한 이슬람화 현상을 제거하고 시대 정신에 맞추어 건전한 미래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개혁을 실행할 용기가 있는 지도자가 없다.
이들은 아랍 국가의 독립을 성취한 제 1세대들의 꿈도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초기 선각자들은 식민지 주의가 철회되면서 “공백 상태”가 형성되어 오히려 외국인들을 끌어들이는 상황을 걱정했다. 그러나 실패의 조짐은 나세르 시대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집트에서 영국 군대 10,000명을 추방하여 아랍 세계의 영웅이 되었지만, 곧 소비에트 군대 20,000명을 허용했기 때문이다(그후 사다트가 이들을 추방했다.). 제 1차 걸프 전쟁에서 이런 현상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아랍 국가 군대들이 연합하여 싸움에 임했으나, 이 군대의 지휘는 거의 미국인들이 주도했고, 이란에 대항하여 “아랍 보호장벽”을 이루고 있었던 아랍 정치인이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런 모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토 군대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해 나섰고, 이란인들은 이라크와 시리아를 침입했으며, 터키인들도 이라크와 시리아 북쪽 국경을 넘었고, 러시아는 아사드 편에 서서 전쟁에 동참하였으며, 프랑스는 유럽 연합 국가들에게 이슬람 국가(다아쉬)에 대항한 전쟁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고, 이 지역에서 철수했던 미군은 이라크와 시리아에 돌아올 틈만 노리고 있다.
아랍 국가에서는 소규모 지역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지난 십여 년간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백만 명에 가깝다.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고향과 나라를 등지고, 죽음과 폐허를 피해 떠나고 있다. 난민들은 고향에서 사는 삶에 이미 희망이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아랍인들의 상황에 관해 발표된(2014.5.7) 암담한 글에서 저자는 “한 때 전세계를 이끌던 문명이 이제 폐허가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아랍인들은 자기 “문명이 저무는” 모습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적었다. 이 말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에 찬성하며 나기브 마흐푸즈가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그는 “문명을 재건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평화협정이 꼭 필요하다고 했었다. 마흐푸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분명히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우리 이웃들의 재난에 기뻐하고, 우리는 “정글 한 복판에 있는 저택”과 같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은 실수다. 결국 사람이란 다 마찬가지다. 우리 국경은 이 지역에서 몰아치는 폭력적인 정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우리의 평화는 우리 이웃들의 평화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