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이 포도원의 악한 종들의 비유를 들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줄 알고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으나 무리의 눈이 두려워 실행하지는 못한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12
한글본문.
1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영어본문.
1 He then began to speak to them in parables: “A man planted a vineyard. He put a wall around it, dug a pit for the winepress and built a watchtower. Then he rented the vineyard to some farmers and went away on a journey. 2 At harvest time he sent a servant to the tenants to collect from them some of the fruit of the vineyard. 3 But they seized him, beat him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4 Then he sent another servant to them; they struck this man on the head and treated him shamefully. 5 He sent still another, and that one they killed. He sent many others; some of them they beat, others they killed. 6 “He had one left to send, a son, whom he loved. He sent him last of all, saying, ‘They will respect my son.’ 7 “But the tenants said to one an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8 So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9 “What then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He will come and kill those tenants and give the vineyard to others. 10 Haven’t you read this scripture: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11 the Lord has done this,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12 Then they looked for a way to arrest him because they knew he had spoken the parable against them. But they were afraid of the crowd; so they left him and went away.

도우말.
산울타리(1절). 살아있는 나무를 심어 만든 울타리를 뜻한다.
종(2절). 이스라엘로 보냄 받은 많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아들(5절).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들(5절), 돌(10절). 아들은 헬라어로 ‘벤’이며, 돌은 ‘에벤’이다. 곧 예수님과 모퉁이돌의 관계를 언어유희(word play)적 표현으로 연결하고 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비유 속에서 성부 하나님은 어떠한 분으로 드러나시는가(1, 2, 9절)?
⬇ 아래로 인간.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잡으려다 포기했는가(12절)?
? 물어봐. 머릿돌은 누구를 뜻하며, 어떠한 역할을 의미하는가(10절)?
! 느껴봐. 나는 주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함으로써 온전한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고 있지는 않는가?
➡ 옆으로 실천해. 사람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Meditation.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이 포도원 비유를 드신다. 이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을 소작하는 농부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고, 소작세를 받으러 온 종들과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내쳤다. 예수님은 이 악한 소작인들이 그 포도원을 몰수당하고, 포도원은 결국 열매를 맺는 다른 이들에게 위탁됐다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열방의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질 것임을 시사하셨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은 자신을 버려진 ‘모퉁이의 머릿돌’(10절)로 묘사하시면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그 머릿돌을 기초로 웅대하게 지어질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다. 그 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요동치 않고 견고히 선다. 하나님 나라의 랜드마크로 세워진다. 당신의 인생 집은 예수님을 모퉁이돌로 삼고 있는가? 당신의 인생의 건축물이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2-26.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자,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대해 논하고 질문하시면서 그들의 입을 막으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1:27-33
한글본문.
27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영어본문.
27 They arrived again in Jerusalem, and while Jesus was walking in the temple courts, the chief priests,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e elders came to him. 28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they asked. “And who gave you authority to do this?” 29 Jesus replied, “I will ask you one question. Answer me, and I will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30 John’s baptism–was it from heaven, or from men? Tell me!” 31 They discussed it among themselves and said,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ask, ‘Then why didn’t you believe him?’ 32 But if we say, ‘From men’….” (They feared the people, for everyone held that John really was a prophet.) 33 So they answered Jesus, “We don’t know.” Jesus said,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도움말.
하늘로부터냐(30절). 하늘은 하나님의 대체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냐’라는 질문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지혜가 어떻게 드러났는가(29, 33절)?
⬇ 아래로 인간. 종교지도자들이 정작 두려워한 대상은 누구인가(32절)?
? 물어봐.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곳은 어디인가(27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매 순간 인정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나의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권위가 더욱 온전하게 인정되어야 하는 자리는 어디인가?

Meditation. 성전 안에 계시는 성전
성전이 성전 안에 계셨다. 참된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그 그림자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 거닐고 계셨다(27절). 실체와 그림자가 만난 것이다. 그러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의 권위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질문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대해 반문함으로 역공세를 펼치신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한다(33절). 이는 단지 요한의 세례에 대한 권위의 출처뿐만 아니라,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에 대한 정체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본질적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상태를 아이러니컬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오직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성전의 실체이시다. 그 성전이 당신의 인생을 성전으로 삼아 지금 거하고 계신다. 당신은 주님께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가? 말로만이 아닌 삶의 구체적 영역에서까지 주님의 권위 앞에 순종하기 위해 오늘 더욱 힘써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2-25.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선언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1:12-26
한글본문,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없음)

영어본문.
12 The next day as they were leaving Beth-any, Jesus was hungry. 13 Seeing in the distance a fig tree in leaf, he went to find out if it had any fruit. When he reached it, he found nothing but leaves, because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14 Then he said to the tree, “May no one ever eat fruit from you again.” And his disciples heard him say it. 15 On reaching Jerusalem,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began driving out those who were buying and selling there. He overturned the tables of the money changers and the benches of those selling doves, 16 and would not allow anyone to carry merchandise through the temple courts. 17 And as he taught them, he said, “Is it not written: ”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18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heard this and began looking for a way to kill him, for they feared him, because the whole crowd was amazed at his teaching. 19 When evening came, they went out of the city. 20 In the morning, as they went alo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from the roots. 21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Jesus, “Rabbi, look! The fig tree you cursed has withered!” 22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23 “I tell you the truth, if anyone says to this mountain, ‘Go, throw yourself into the sea,’ and does not doubt in his heart but believes that what he says will happen, it will be done for him. 24 Therefore I tell you,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 25 And when you stand praying, if you hold anything against anyone, forgive him, so that your Father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sins.” 26

도움말.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3절). 무화과나무는 3월이 되면 작은 식용 싹이 돋아나고, 4월이 되면 크고 푸른 잎사귀가 생기며, 5월이 되면 싹에서 열매가 달린다. 이 사건이 4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푸른 잎사귀들 안에 있어야 할 식용 싹을 찾으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산(23절). 사건 속 무화과가 뿌리 내리고 있는 감람산을 가리킨다.
바다(23절). 원문에는 ‘그(저) 바다’로 표기되어 있어 감람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사해로 간주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15-17절)?
⬇ 아래로 인간.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25절)?
? 물어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24절)?
! 느껴봐. 나는 구하는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계산을 멈추고 오늘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무화과나무와 성전의 운명
마가는 연결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 사이에 성전과 관련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삽입한다. 소위 샌드위치 기법이다. 무화과나무와 성전의 운명을 함께 묶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길 옆에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하게 매달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은 당시 웅장하고 요란한 외양에 비해 참된 믿음의 순종과 기도가 결여되었던 성전의 결국을 보여주는 실물교훈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은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의심 없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믿음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죽고 살게 할 뿐 아니라, 제자의 삶에 가로 놓인 산과 같은 난국도 능히 돌파할 수 있게 함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자아에 근거한 신념과 확신이 아니라, ‘기도할 때’(25절), 곧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이 내미시는 손앞에 열매를 맺어 내어 드리고 있는가? 또한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 사명을 가로막는 태산과 같은 장애물을 향해 믿음으로 호령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

<이 글은 서울신대 교수로 사역 중인 장기영 박사님의 글을 그의 동의로 그의 펫북에서 가져왔음을 밝히며, 조금 어려운 용어가 있더라도 좌우 문맥과 이어 거듭 읽어보면 이해가 될듯합니다>

이 글을 올리는 목적이 고 김성수 목사의 자살 사실이나, 그의 사생활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편승하여 그에 대해 인격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비난을 가하기 위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단지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신앙적 진실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김성수 목사의 성경적 균형을 잃은 메시지에 무비판적으로 빠져들어 성경의 일면 (복음, 칭의, 은혜) 은 취하면서도 다른 면 (율법, 성화, 인간의 자유와 책임) 에 대해서는 버리거나 왜곡되게 취급하는 경우가 있고, 2) 더 나아가 성경에서 신자에게 꼭 있어야 할 경건의 필수적 요소인 율법에 대한 순종을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죄악시하는 중대한 오류가 나타나며, 3) 김성수 목사의 영향을 받은 분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성경적, 신학적 입장을 두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만이 진리인 듯 전파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저는 김성수 목사의 신학에서 문제의 핵심이라 생각되는 되는 점을 정리하고, 더 나아가 그의 메시지에 의해 공격받는 성경적 성화의 교리 및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성경적 경건의 중요한 요소로서 변호하고자 합니다.

전에 김성수 목사의 메시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던 저의 글을 읽었던 분들 중에 최근 다시 저의 견해를 물어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계속 개인적 관계에서만 답할 성격이 아니라고 느껴, 예전에 올린 글을 부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또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제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다 들은 것은 아니지만, 김성수 목사의 설교는 성경본문은 다양하게 바뀜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주제 및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모든 본문을 알레고리적으로 풀어가는 설명방식은 천편일률적이라 할 정도로 유사하기에, 제가 지금까지 듣고 읽은 정보로도 어느 정도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판단되지만, 혹 제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저의 견해는 차후에라도 수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의 일부분에서 그를 변호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된다 하여 그것으로 반론하신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임을 말씀 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메시지의 위험성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이지, 그의 설교 전체에 대한 세세한 주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메시지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은 점이 많지만, 가장 중대한 위험성이라고 생각되는 점만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김성수 목사가 표명하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의 목적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신앙과 신학의 주된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구원과 인간 삶의 모든 원인을 100%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리고,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0.0001%도 돌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김성수 목사의 메시지의 주된 의도라는 사실이 읽혀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를 추종하고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많은 분들께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가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그분의 메시지가 참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만을 선포한다고 생각하시기에, 그분의 메시지를 접하는 분들은 자신들은 과거에 복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율법적 삶을 살았다고 여기면서 그분의 메시지에 무비판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수 목사가 제시하는 복음이 과연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메시지인가? 그의 복음이 성경의 다른 부분, 즉 신자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가운데 바르게 세우기 위한 성경적 율법관과도 바르게 양립할 수 있는가? 그의 의도가 순수하다고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의 방법까지도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루터가 인간을 “노예의지”를 가진 존재로 설명한 것보다 더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묘사합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만약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산다면 그것도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죄에 빠져서 도덕적으로 최고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불신자와 다름 없이 신자도 도덕적으로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이며 변화 받지 못한 존재이고,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극단적으로 신자의 타락을 주장하고, 인간에게 전혀 자유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자에게도 죄로부터의 해방이 없는 것으로 가르칠까요? 쉽게 표현하자면, 인간이 조금이라도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 되며,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행위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가 어느 정도 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이유는, 신자라도 도덕적으로는 전적으로 밑바닥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더욱 극대화될 수 있을 텐데, 신자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면 은혜가 훼손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신자가 어떤 선행을 하거나 죄와 싸워 이기거나 어떤 경건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 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의 공로가 0.1% 라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늘 죄인이고, 신자라 하여도 늘 죄에 빠져서 사는 존재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선행과 경건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것으로 인간 편에서는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신자 안에도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다고 가르쳐야만, 신자의 의까지도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개혁자 루터도 때로는 가르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점으로 지금부터 들어가보겠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뿐만 아니라, 신자의 어떤 의지적 노력의 가치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만 돌리는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어떻게 이상해지는지, 삼단논법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자도 죄인일 뿐이며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떤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의 어떤 경건도 불가능하다. 2) 신자라도 죄에 빠져 살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가끔씩 죄를 이기고 또 가끔씩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지배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3) 그러므로 (여기에서부터 김성수 목사의 주장은 결국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늘 승리하게 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는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늘” 지배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죄에 대해 넘어지면서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결국 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죄에 대해 승리하지 못하는 책임까지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는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 신자가 죄에 빠져서 사는 책임까지도 하나님께 전가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범함을 보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자신의 주장으로부터 사람이 행하는 어떤 선행이나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어떤 경건도 절대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짐, 즉 인간 편에서는 그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인간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행하는 선행과 경건일지라도 거기에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갔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주장으로부터 김성수 목사는 심각하게 비성경적인 주장, 즉 사람이 율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노력은 모두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되려는 것이다, 신자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율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해도… 그 모든 노력은 인간의 교만의 표현이고, 자기 의를 쌓는 것이고, 율법주의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 범죄라는 아주 해괴한 논리를 모든 설교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율법을 행하는 것을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의 잘못된 논리를 바로 잡기 위해 성경적 죄의 정의를 살펴보면, 성경적 죄의 정의는 요일 3: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불법, 즉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 버전의 영어성경 혹은 원어성경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성경적 정의는 율법을 어기는 것,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서 4장에서는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으로 재판자가 되려는 이들의 잘못을 언급한 후 4:17절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라고 죄를 정의하였습니다. 즉, 율법이 가르치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 선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는 교묘하게 죄의 정의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립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죄이고, 율법이 명령하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성수 목사는 율법을 행하려 하는 것이 죄이고, 선을 행하겠다고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뒤집어 버립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전복 속에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6-17) 라고 하신 말씀을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4-5) 라고 뒤집어 말한 것과도 유사할 정도도, 교묘함과 대담함이 들어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김성수 목사는 어떤 논리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까요? 그의 설교 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글들에서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논리가 바로 “선악과”의 논리 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선악과를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과 연결시킵니다. 죄의 본질은 교만이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누구나 교만하여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을 행함으로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언뜻 들어보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논리의 교묘함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란 바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어긴 죄”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죄”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타락했다는 사실을 감추어버림으로써,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 즉 그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 (요일3:4) 과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 (약4:17) 이 죄라는 성경적 정의를 감추어버립니다. 결국, 성경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성화의 교리, 율법에 대한 순종, 선행에 대한 권면을 뒤엎어버리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교묘한 수단이 바로 “선악과”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죄의 본질은 숨겨버리고 그 대신 “선악과”만 전면에 내세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율법을 행하려 하고 선을 행하려 한다는 표현을 통해 교묘하게 율법에 순종하려는 것을 죄로 만들어버리고, 성화로 나아가려는 것이 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인 순종과 성화를 인간의 교만과 자기 우상화의 죄로 뒤바꾸어버립니다. 인간의 타락을 말할 때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라면서 계속 “선악과”만 강조하는 김성수 목사의 메시지에는 아주 위험한 율법무용론적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율법을 행하려 것이 교만이고 타락이고 인간의 자기 우상화라고 말하지만, 창세기 타락 기사를 보면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때문에 인간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죄가 아니라 정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는 불순종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 하는 교만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 되려는 반역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명령, 율법,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하나님 권위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가 성경적 가르침인 율법에 대한 순종과 성화를 전복시키는 데 사용하는 또 다른 논리로서 “바리새인”의 논리도 중요합니다. 김성수 목사는 바리새인이 율법을 행하고도 예수님께 사탄의 자식이라는 꾸지람과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행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그것이 인간의 자기 우상화라는 주장을 끊임 없이 폅니다.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성수 목사는, 성경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한 자들이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겨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진정으로 율법을 행한 자로 나타날까요? 예수님께서 마 23:2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신 데서 알 수 있듯,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를 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 즉, 율법의 정신은 지키지 않으면서 행동으로는 외식하고 위선함으로써 율법을 깨뜨린 것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결의론적으로만 지켰을 뿐이지 참되게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 참되게 율법을 지킨 자들이 아닙니다. 결의론적 율법 준행이란, 율법을 몇 가지 외적인 행동규칙으로 만들어 그것만 행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식의 잘못된 율법 준행을 말합니다. 김성수 목사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화 있을진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그들은 참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화 있을진저” 저주를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들의 죄성을 따라 율법을 왜곡하여 지킨 척 한 것이지, 율법을 참되게 지킨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왜곡한 자, 율법을 어긴 자들입니다. 바로 이 사실,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지,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김성수 목사의 율법 비방이 아주 잘못된 논리에 근거해 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주 중요하기에 다시 반복하고자 합니다. 김성수 목사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고 말하면서, 그 논리를 신자들에게도 적용하여 율법을 지키려 함으로써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말라, 율법을 행함으로써 거룩한 척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율법의 정신과 핵심에 순종하지 않고 겉으로 몇 가지 행동을 준수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순종하여서가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자들,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난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 한 자들, 하나님처럼 되려 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행하다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김성수 목사의 주장 속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성화를 깨뜨리는 교묘하고도 간교한 진리의 왜곡이 숨어있습니다.

요일3:4절 또는 약4:17절에 나타난 성경적 죄의 정의, 율법 없음 (lawlessness), 율법을 깨뜨림 (transgression of the law), 또는 율법이 가르치는 바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음 이라는 죄의 정의는 분명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것,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성경적 죄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죄 중에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르게 말한다면, 율법의 제1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려 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제1계명을 깨뜨리는 죄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죄 자체인 것입니다.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요일 3:8절은 (4절에서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죄라고 설명한 이후에 이어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가르치셨고, 율법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 등 율법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셨고,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 회개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죄를 다시 짓지 않도록 율법 어기는 죄의 근원인 마귀의 일을 멸하여 율법 깨뜨리는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율법 어기는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고 반역하던 존재였던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자기 자리 이탈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 반대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이 진정으로 자기 우상화와 교만의 죄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불순종하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그 율법에 바르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결의론적으로 왜곡시킨 율법을 다시금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해야 하고, 바리새인들이 왜곡시켜 순종한 율법주의적인 율법 순종을 그치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대로 참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서부터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고,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의 메신저 마틴 루터가 그렇게 강조했듯, 하나님의 율법 중에서 제 1 계명, 즉 믿음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가장 먼저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다음으로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계명들에도 순종하는 삶을 열매로 맺는 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열매이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김성수 목사는 자신의 잘못된 논리로 교묘하게 율법에 대한 순종을 죄로 탈바꿈 시키려 하고, 율법을 비난하고 폐하려 합니다. 김성수 목사의 비성경적인 메시지는 신자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가장 근본적인 죄로 바꾸어버리고 비난함으로써 잘못된 율법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서의 율법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폐하시지 않고 오히려 모범을 보이시고 온전히 설명해주심으로 완성하신 율법 (마5:17), 바울이 폐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굳게 세운다던 율법에 대한 순종 (롬3:31)을 김성수 목사는 폐하고, 폄하하고, 비난하고, 죄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김성수 목사는 복음을 율법무용론적 복음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다 읽으셨다면 최근에 올린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을 찾아 읽어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2014-02-2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앞서고 뒤서면서 따른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1:1-11
한글본문.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영어본문 :
1 As they approached Jerusalem and came to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his disciples, 2 saying to them,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just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3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s?’ tell him,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 ” 4 They went and found a colt outside in the street, tied at a doorway. As they untied it, 5 some people standing there asked, “What are you doing, untying that colt?” 6 They answered as Jesus had told them to, and the people let them go. 7 When they brought the colt to Jesus and threw their cloaks over it, he sat on it. 8 Many people spread their cloaks on the road, while others spread branches they had cut in the fields. 9 Those who went ahead and those who followed shouted,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10 “Blessed is the coming kingdom of our father David!” “Hosanna in the highest!” 11 Jesus entered Jerusalem and went to the temple. He looked around at everything, but since it was already late, he went out to Bethany with the Twelve.

도움말.
감람 산(1절). 예루살렘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 맞은편에 위치한 길이 약 4km, 최고 높이 약 880m의 산등성이로, 정상에서는 예루살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호산나(9절). 구약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린 짧은 기도와 찬양의 내용(시 118:25-26)으로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이 받으신 찬양의 내용은 무엇인가(9-10절)?
⬇ 아래로 인간. 나귀의 주인들은 어떤 말씀 앞에 기꺼이 자신의 나귀의 고삐를 풀어 넘겼는가(3, 6절)?
? 물어봐.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7-10절, 슥 9:9 참조)?
! 느껴봐. 나는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 나의 소중한 것들을 내어 드리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주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서 오늘 내가 내어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Meditation. 고삐를 푸는 패스워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행렬을 멈추신 예수님은 제자 둘을 명하여 한 마을로 들어가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끌어 오라고 하셨다. ‘벳바게와 베다니 맞은편 마을’로 불린 무명의 한 마을 어귀에서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입성 사건(슥 9:9)을 성취할 요긴한 도구를 손에 건네 받으셨다. 그 나귀로 인해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로부터 메시아로서의 인증과 찬양을 받으셨다. 매여 있는 그 나귀의 고삐가 풀릴 수 있었던 패스워드(password)는 바로 ‘주가 쓰시겠다’라는 단 두 마디였다. 주인들은 이 요청 앞에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주님께 내어 드렸다.
당신은 주님 앞에서 벳바게 맞은 편 마을과 같이 이름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요긴한 것들을 내어 드리는 신실한 동역자인가?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말씀 앞에 주님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가? 오늘 당신의 것들 중에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내어 놓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고삐를 풀겠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2-23.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간단설명.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세상과 타협해 미지근하게 살지 말라. - A. W. 토저-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2:12-17
한글본문.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영어본문 :
12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Per-gamum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him who has the sharp, double-edged sword. 13 I know where you live–where Satan has his throne. Yet you remain true to my name. You did not renounce your faith in me, even in the days of Antipas, my faithful witness, who was put to death in your city–where Satan lives. 14 Nevertheless, I have a few things against you: You have people there who hold to the teaching of Balaam, who taught Balak to entice the Israelites to sin by eating food sacrificed to idols and by committing sexual immorality. 15 Likewise you also have those who hold to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 16 Repent therefore! Otherwise, I will soon come to you and will fight against them with the sword of my mouth. 17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To him who overcomes, I will give some of the hidden manna. I will also give him a white stone with a new name written on it, known only to him who receives it.

Meditation. 버가모교회: 일상에서의 승리.
기록에 의하면 버가모는 여섯 개의 그리스 신전과 애굽의 태양 신전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제우스 신전을 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버가모교회의 위치를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야말로 사탄이 왕 노릇 하는 우상숭배의 도시 가운데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사탄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라는 올무를 통해서 버가모교회를 극심하게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박해 가운데 그들은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황제숭배를 거절했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가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은 안디바라고 하는 신실한 순교자를 거명하십니다. 그는 어두운 시대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위대한 순교의 피를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흘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발람의 교훈을 쫓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좇는 사람들을 용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사랑을 잘못 적용해 거짓된 가르침을 용인했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수용했습니다. 에베소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하나님께 반쪽짜리 헌신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큰 싸움을 하다가 작은 싸움을 놓치는, 외형적인 싸움을 하다가 내용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버가모교회가 범했던 잘못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큰 싸움에서는 이긴 것 같지만, 작은 싸움에서 질 때가 많습니다. 큰 명분 앞에서는 뜨겁게 헌신하는 것 같은데, 사소한 것에서 세상과 미지근하게 타협하곤 합니다.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슬그머니 수용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세상을 섬기는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섞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대의명분에서는 승리했지만, 작은 일상의 삶 속에서는 실패하고 타협하면서 살고 있는 이중적인 신앙 구조에 대해 주님은 “회개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상의 삶 가운데서 죄와 타협했던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새롭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