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5.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북이스라엘 왕정 내부문제에 이어, 그들이 대외관계 속에서 범했던 어리석음이 책망을 받는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주변 강대국들의 힘을 빌려 생존을 보장받고자 했다.

성경본문. 호세아 7:8-16
한글본문.
8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10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13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14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15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16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영어본문.
8 “Ephraim mixes with the nations; Ephraim is a flat cake not turned over. 9 Foreigners sap his strength, but he does not realize it. His hair is sprinkled with gray, but he does not notice. 10 Israel’s arrogance testifies against him, but despite all this he does not return to the LORD his God or search for him. 11 “Ephraim is like a dove, easily deceived and senseless– now calling to Egypt, now turning to Assyria. 12 When they go, I will throw my net over them; I will pull them down like birds of the air. When I hear them flocking together, I will catch them. 13 Woe to them, because they have strayed from me! Destruction to them, because they have rebelled against me! I long to redeem them but they speak lies against me. 14 They do not cry out to me from their hearts but wail upon their beds. They gather together for grain and new wine but turn away from me. 15 I trained them and strengthened them, but they plot evil against me. 16 They do not turn to the Most High; they are like a faulty bow. Their leaders will fall by the sword because of their insolent words. For this they will be ridiculed in the land of Egypt.

도움말.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14절). 죄에 대해 탄식하고 회개하며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단지 당장 처한 곤경만을 면해보려는 부르짖음이었다는 것이다.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16절).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셨는가(13b, 15a)?
⬇ 아래로 인간. 강대국을 의지하려던 북이스라엘의 외교정책은 무엇으로 풍자되고 있는가(11-12절)?
? 물어봐. 강대국만 의지하던 외교정책이 초래한 결과는 무엇인가(8-9절, 메디테이션 참조)?
! 느껴봐. 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경우는 없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먼저 하나님 편에 서라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보이는 위쪽은 문제없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아래쪽은 다 타서 먹을 수 없게 된 ‘뒤집지 않은 전병’과도 같았다. 안전을 보장 받고자 주변 강대국들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치다 보니 나라가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골병이 들고 있었다(8-10절). 하나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비둘기’에 비유하신다. 그들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어느 편에 둥지를 틀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그물에 걸리고 말 것이다(11-14절).
그들은 과녁에 명중시키지 못하는 ‘불량 활’처럼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고 빗나가버리고 말았다(15-16절). 그들은 애굽을 의지해 앗수르를 대적했지만, 결국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도와줄 줄 알았던 애굽으로부터는 비웃음만 사고 말았다. 그들은 애굽이냐 앗수르냐를 잘 선택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나라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해서 망했다. 내가 인간적인 계산만을 앞세워 어느 편에 줄을 서야 유리할지를 따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는 없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주홍 같은 너의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이사야 1장…진정한 회개에는 삶의 변화가 따른다.

개역성경 번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다른 번역 제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은데(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진홍같이 붉을진대 어떻게 양털같이 되겠느냐?(사 1:18).”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은 성도들에 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문맥 무시한 채 18절만 읽으면 위의 개역성경의 번역이 자동 나온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번째 질문형의 번역이 훨씬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장의 결론이 심판 내용이기 때문이다.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특히 그들의 죄가 주홍, 진홍 같다는 표현은 신약의 가르침처럼 모든 인류의 죄인 된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15절의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면”을 떠올린다. 이는 그들이 행하던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의 고통을 외면하여 약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를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교리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문맥보다 교리가 앞설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러려면 문맥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번역에 교리라는 선입관이 문맥보다 앞설 때 성경 본문의 의도는 왜곡된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겠지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듣는 것은 상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의견이 선입관일수도 있다. ^^)

이 말씀은 정말 모든 죄가 사하여질 것이라는 용서에 관한 내용일까? 사실 문맥 무시한 채 18절 원문만 보면 두 번역 모두 가능하다. 고대 히브리어 원문에는 ‘?’와 같은 물음표 사용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1장 18절은 원문으로 보면 선언문이 아니다. 미완료 과거형의 조건절이다. 문법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만일 너희 죄가 주홍 같다면(if your sins are like the scarlet robes)”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후반부에 따른 번역을 선택해야 한다. 즉, “흰 눈같이 될 것이다.” 아니면 “흰 눈같이 되겠느냐?”가 문자적 번역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만일 너희 죄가 진홍 같다면, 흰 눈같이 될 것이다” 아니면 “만일 너희 죄가 진홍 같다면, 흰 눈같이 될 수 있겠느냐?” 중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가? 이것이 안건이다.

사 1:18이 질문이냐 아니냐는 문맥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들의 죄악이 눈과 같이 희게 용서함을 받았다”는 선언으로 보지 않을 때 1장의 결말이 묘사하는 그들이 왜 그토록 비참하게 심판을 받는지에 대한 답이 보다 쉽게 나온다.

위의 본문에 관한 독일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셨던 독일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그러셨다. 전공 교수들도 교리 때문에 다 눈치를 봐야 한다고. 교리의 장벽이 너무 강해서 자체적인 번역을 따로 해야 할 판이라고. 그래서 독일어 성경에는 각주로 전공 교수들의 의견을 다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권력을 가진 비전문가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란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우리 성서공회에서도 번역에 참여하시는 교수들이 이런 문제로 많이 고민한다. 한번은 필자도 대한성서공회 당국자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다 알지만 결정권이 있는 분들(비전공자들이심)이 불편해하시는데 할 수 없잖아. 아직 때가 아니야!”

사실 문맥을 살펴보아야 본문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죄로 붉게 더럽혀졌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눈처럼 희게 씻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의 얼룩은 짙은 홍색이다. 너희는 너희가 양털처럼 하얗게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이사야의 질문은 풍자적 의미를 내포하며, 백성들의 얕은 회개를 넌지시 말하는 것이다.”

독일성서공회 해설 성경을 번역한 대한성서공회 관주 해설 성경전서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백성과 소송하시려고 이들을 불러내신다. 18 하반절은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보통은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이를 무조건적인 용서의 약속으로 이해한다. 문맥상으로 보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다면(사실 그렇다!), 과연 너희가 (제사를 통해) 눈처럼 희어지겠는가? …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언약으로 정한 의무에 순종해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며 약속하신 바들도 요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신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은 성도의 상태를 설교하려면 계시록이나 다른 본문으로 설교해야 더 적합할 것 같다. 이사야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하나님이 유다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도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세상에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사야서 1장은 소송의 문맥에서 쓰였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2)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로 시작하는 18절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본문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패역한 유다 백성을 소송하신다. 1장은 언약의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를 밝히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송사하시고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들의 죄악은 무엇인가? 전체 문맥에서 보자. 11~14절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다양한 제사와 월삭과 절기를 정성껏 준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그들이 가난한 자와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은 결코 언약에 따른 복을 그들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고(10~17절) 그들에겐 저주만 내려질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가지고는(10절), 기도하는 이의 손에 과부와 고아의 피가 있을 때 그 기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15절).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의 복을 받는 길은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길이다(16~17절).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 이후 18절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만일 너희 죄가 주홍 같다면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만일 진홍같이 붉다면 양털같이 되겠느냐?(사 1:18)”

회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여 주실 것이지만 유대의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다(1:23).”

그래서 하나님이 몸소 개입하셔서 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죄악에 빠진 창기와 살인자들 같은 원수들은 심판받고(1:23~24)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회복될 것이다(1:25~26).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대부분은 패망을 받을 것이다. 죄를 씻는 길은 피의 제사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닌 회개와 순종뿐인데 강퍅한 악인들은 이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1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사 1:28~31).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명시된 사회적 의무를 행하지 않을 때 어떤 종교적 제의도 죄 사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종교적 제의로는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죄를 결코 희게 만들 수 없다. 불가능하다. 회개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함을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세상에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 1:18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악인으로 살면서 종교적 제의와 절기를 지킨다고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법은 없다는 가르침은 결코 그리스도 언약에 따른 완벽한 죄 사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오히려 이사야서 1장 18을 단박 구원 방식으로 오해해서 실족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형제자매에게 몹쓸 죄를 지어 놓고도 진심으로 뉘우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홍 같은 내 죄가 눈과 같이 희어졌다잖아. 죄 사함 받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면서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는 이를 다그친다. 회개 없는, 삶의 변화로 이끌지 못하는 죄 사함은 거짓 구원의 확신을 만든다. 그리고 나와 이웃을 실족하게 한다.

우리도 변론해 보자. 진심 어린 뉘우침과 이웃을 향한 삶의 변화 없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말이다. 회개는 단순한 죄 사함 교리에 대한 동의나 종교 행사에 참여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진심으로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경청해야 할 말씀이다. 우리도 세상의 악인들과 다름없이 살면서 죄 사함의 은혜만 강조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뉴스엔조이 목회/신학 에서>

 

[재림을 알리는 징조가 없다니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림 이전에 징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바른 성경해석은 정확한 가르침을 찾는 많은 이에게 사막의 오아시스같이 시원한 생수가 되지만 성경의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에게는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종말에 관한 가르침들이 유별스럽게도 이를 확증한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절대로 성경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고 검증되어야지, 성경 특정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온갖 공상과 그럴듯한 상상이란 모래 위에 세우면 안 된다.

마태복음 24:3절에서 제자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한다. 하나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징조이고 하나는 재림의 때에 대한 징조에 관한 것이다. 24:3절은 “또”라는 용어로 청중들에게 제자들이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첫 번째 질문)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두 번째 질문)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리고 예수님은 첫 번째 질문을 답하신다.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에 관한 징조들을 주신다. 마태복음 24:35 절까지는 분명히 다른 징조들과 무화과나무 비유의 징조를 통해 설명된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36절에서는 “그러나”를 사용하여 제자들의 두 번째 질문 즉, 주의 임하심(재림)과 세상의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에 대한 답을 주신다. 헬라어의 “그러나”는 종종 사건의 변환을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다. 즉, 본문에서는 이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재림 때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답은 예루사렘 멸망의 때에 대한 답과 확연히 다르다. 재림 때는 어떤 징조도 주어지지 않으며 아버지 이외에는 누구도 그 시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재림에 관한 한 절대 징조가 없으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은 계속 반복된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 24:42-43).

이후 충성스러운 종의 비유와 결혼식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징조가 없으니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다. 이 두 비유 후의 결론은 마 25:3절이다.

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3)

도대체 예수님도 하늘의 천사도 모르는 때와 시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계선을 왔다갔다 하는 이들도 잇다. 비록 날짜나 시점을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재림이 임박했다”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표현으로 성도들을 임박한 재림론자들로 만드는 이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 지금 우리 세대에도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우리 때에 올 것이라는 뜻으로 변질시킨다. 성경 어디에도 절대 그 때와 시를 밝히지를 않는다. 성도들에게 재림의 징조에 대한 힌트조차 없다는 점을 복음서는 못박는다. 그 징조를 알아내느라 힘빼지 말고 무조건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재림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다.마라나타! 예수님이 우리 때에 오실까? 답은 모르니까 깨어있으라 밖에는 없다. 백번 천번을 물어도 답은 동일할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때와 시는 몰라도 그 년도는 알 수 있지 않나? 대략이라도 가까이 온 것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한다. 성경에서“때”는 단순 “날짜”와 “시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시기”에 관한 의미다. 이는 연도도 당연히 포함된다.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런지, 밤중일런지, 닭 울 때일넌지, 새벽일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3-37).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하여 동일한 말씀을 전하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당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징조를 재림에 관한 징조로 오해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재림의 징조는 없다.

지금이 말세라는 말, 참으로 구렁이 담넘어 가는 표현이다. 2000년 전에도 말세였고 현재도 미래도 늘 말세일 것이다.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까지의 기간이지 어떤 시점이 아니다. 지금이 말세라는 말로 사람들 현혹하는 것도 사실 준이단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람들 겁주고 이상한 위기감을 조성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늘 믿음으로 살면 된다. 내가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개인적인 종말이 우주적 종말보다 먼저 올 수도 있다. 예수님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 징조? 그런 것은 없다.

계속하여….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

 

[예수님의 재림 이전 인류에게 대환난이 있을까?]

필자는 어렸을 때 예수님의 재림 이전 분명히 대환난의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살아생전 끔찍한 대환난을 겪을까봐 겁이 났다. 휴거를 당하지 못하고 남게 되면 어떻하나, 정말 걱정이었다. 사실 그런 설교와 글들이 당시에는 난무했다. 그러나 신약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신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필자는 누구라도 성경을 꼼꼼하게 읽고 연구하는 이라면 이런 결론에 이르리라고 본다.

살면서 어느 시대나 특정 지역에서는 말할 수 없는 환난이 있다. 지금 북한에서 견디어 나가는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면, 현재 이슬람 무장단체인 IS 치하에서 혹독한 고문과 강간 참수를 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지금도 대환란은 있다. 그러나 전 인류가 당해야 하는 극심한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가 필자의 답이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환난은 분명한 징조다. 그러나 이는 주 후 66~70년에 유대민족이 겪은 전쟁에 따른 당시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에 관한 징조이지 마지막 재림을 위한 징조는 아니다. 성경은 당시 성전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징조를 누누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진노는 곳 현실로 나타났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막 13:30). 이때 택하신 자들에게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셨다면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모두 몰살당했을 것이다(마태 24:22 누가 13:20). 다행히 많은 기독교인은 산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건졌다. 이 내용이 혹시 마지막 때 재연되지는 않을까?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늘 깨어 있어야지 그날이 언제일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날에 대한 어떤 징조도 주어지지 않은채 재림이 급작스럽게 도둑같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막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그래도 성경에 징조가 있지는 않을까? 재림 전에 대환난이 있지는 않을까? 두려운 대환란의 가르침은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혹여나 전 세계적인 환란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지구 종말의 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재앙들은 결코 예수님의 재림 바로 이전에 일어날 미래의 “대환난”의 내용이 아니다. 또한, 마태복음 24:15(참조 막 13:14; 눅 21:20)의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능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은 절대로 마지막 재림 이전에 관한 징조가 아니라 유대전쟁 때(AD 66-70) 유대인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성전멸망과 잔혹한 유대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다행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유대 기독교인이 산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마 24:16)

만일 온 인류가 겪을 대환난이 마지막 재림 이전의 징조라면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재림할 세상 끝날을 자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수가 없다. 사실 온 인류가 대환난을 겪는 일이 발생한다면 정말 놀라운 징조고 그 때를 누구나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라도 알 수 없다. 재림에 관한 징조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미 다 주어졌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늘 밤, 혹은 내일이라도 가능하다. 그냥 믿음으로 깨어있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 이전에 징조로 전 인류가 겪을 대환난은 없다. 휴, 다행이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시고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늘 믿음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책을 읽어 보시길!
윌리엄 R. 킴볼, 김재영 옮김, 성경이 말하는 대환난의 진실,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이민규 교수님의 펫북에서>

 

[휴거 성경적일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휴거”를 주장하지 않는다. 휴거 사상은 성경에 없다. 어디서도 마지막 날 성도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고 남은 자들은 대환란을 겪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성도들의 휴거에 대한 상상과 믿음은 정말 세계적이다. 휴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성도들을 보는 것은 드물지 않다. 이는 역사적 상황과 문화, 문맥을 무시한 채 데살로니가전서 4:17 한 구절만 읽어서 생긴 문제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본문에는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세 가지 이미지가 사용된다.
1)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구름 가운데 만나는 장면(혹은 하나님 임재가 성막에 충만함을 의미할 때,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때도 구름이 나온다.),
2) 인자(하나님의 백성)가 구름 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단 7). 다니엘서에서 이는 현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악한 짐승의 제국을 이기는 인자로 묘사된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신학적 메시지를 주기 위한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는 묵시문학적인 표현이다. 신약에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참여한다.
3) 로마 황제가 예를 들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 시민들이 도시 밖에 나가 환영하며 그를 영접(파루시아)하는 모습.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은 “공중”이란 표현이다. 왜 하늘로 승천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공중을 끌려 올라간다고 했을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에서 공중이란 우리 말의 “공중”혹은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베소에서 “공중에 권세잡은 통치자”라 할 때 이는 마귀와 그 졸개들이 지배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영적인 영역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엡 2:2).

공중은 상징적으로 사탄과 마귀가 거하는 장소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첫째, 재림 때 그곳의 마귀들은 다 제압당할 것이다. 이는 마귀가 지배하던 영적 영역인 “공중”이 더는 마귀의 영역이 아니라는 승리의 소식이다. 예를 들어 2차대전 때 독일 수도인 베를린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연합군 사령관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적지의 수도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을 만난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둘째, 이 말은 우리가 지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직접 영접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공중은 영적인 공간이다. 결코, 우리가 슈퍼맨처럼 하늘로 날아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휴거는 없다. 데살로니가 전서 4:7절 본운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 재림(3차원적인 space), 공중 부양같은 엉뚱한 상상하지 말기를.

신약의 구조는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신 예수님의 초림, 심판 주로 오실 예수님의 재림, 심판, 새하늘 새 땅입니다.

계속하여…
<이민규 교슈님의 펫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