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명절 중에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밝히시고,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할례를 언급하시면서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하게 함이 옳다고 선언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7:10-24
한글본문.
10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영어본문.
10 However, after his brothers had left for the Feast, he went also, not publicly, but in secret. 11 Now at the Feast the Jews were watching for him and asking, “Where is that man?” 12 Among the crowds there was widespread whispering about him. Some said, “He is a good man.” Others replied, “No, he deceives the people.” 13 But no one would say anything publicly about him for fear of the Jews. 14 Not until halfway through the Feast did Jesus go up to the temple courts and begin to teach. 15 The Jews were amazed and asked, “How did this man get such learning without having studied?” 16 Jesus answered, “My teaching is not my own. It comes from him who sent me. 17 If anyone chooses to do God’s will, he will find out whether my teaching comes from God or whether I speak on my own. 18 He who speaks on his own does so to gain honor for himself, but he who works for the honor of the one who sent him is a man of truth; there is nothing false about him. 19 Has not Moses given you the law? Yet not one of you keeps the law. Why are you trying to kill me?” 20 “You are demon-possessed,” the crowd answered. “Who is trying to kill you?” 21 Jesus said to them, “I did one miracle, and you are all astonished. 22 Yet, because Moses gave you circumcision (though actually it did not come from Moses, but from the patriarchs), you circumcise a child on the Sabbath. 23 Now if a child can be circumcised on the Sabbath so that the law of Moses may not be broken, why are you angry with me for healing the whole man on the Sabbath? 24 Stop judging by mere appearances, and make a right judgment.”

도움말.
할례(22절).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요일에 상관없이 생후 8일째에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창 17:12).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의 교훈의 특징은 무엇인가(16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15절)?
? 물어봐.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18절)?
! 느껴봐. 나는 종교적인 전통과 규칙보다 한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외모가 아니라 공의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때에 나의 관계망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Meditation. 주님의 저울에서 가장 무거운 추
초막절로 흥성거리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은밀히 올라가신다(10-11절). 사람들 사이에는 또 수군거림이라는 고질적 질병이 도진다(12절). 언제나 그랬듯이 수군거림이 있는 곳에서 믿음을 찾기란 너무도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그들은 예수님을 걸고넘어지려 한다. 이번에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잘 가르치시는 것이 문제였다(15절). 예수님은 당신이 베푸신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밝히신다(16-17절). 그리고 전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일(5:1-18)을 이상하게 여긴 것에 대해(21절) 할례와 안식일 규정이라는 구체적 선례를 들어 반박하신다(22절). 신체의 일부와 관련된 할례 의식이 안식일 규정보다 더 상위에 있다면 절망적인 병자의 몸을 고치고 건강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안식일 규정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도전하신다(23절).
예수님의 저울질에서 가장 무거운 추는 사람이며 인격이며 영혼이다. 규칙과 일과 결과가 아니다. 당신의 저울에서 가장 무거운 추는 무엇인가?

2016-01-29.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유대로 가서 세상에 나타내라고 권고한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하시면서 갈릴리에 머물러 계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7:1-9
한글본문.
1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영어본문.
1 After this, Jesus went around in Galilee, purposely staying away from Judea because the Jews there were waiting to take his life. 2 But when the Jewish Feast of Tabernacles was near, 3 Jesus’ brothers said to him, “You ought to leave here and go to Judea, so that your disciples may see the miracles you do. 4 No one who wants to become a public figure acts in secret. Since you are doing these things, show yourself to the world.” 5 For even his own brothers did not believe in him. 6 Therefore Jesus told them, “The right time for me has not yet come; for you any time is right. 7 The world cannot hate you, but it hates me because I testify that what it does is evil. 8 You go to the Feast. I am not yet going up to this Feast, because for me the right time has not yet come.” 9 Having said this, he stayed in Galilee.

도움말.
내 때(6, 8절). 다른 문맥들(2:4, 8:20, 12:23, 13:1, 17:1)에서 ‘때’는 시간(time)을 뜻하는 ‘호라’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결정적 시각(timing)을 뜻하는 ‘카이로스’가 사용되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일하시기 전 무엇을 의식하고 계시는가(6, 8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하는가(3-4절)?
? 물어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7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늘 영적 촉각을 세우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주님의 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영성을 위해 더욱 힘쓸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타이밍의 귀재이신 예수님
때를 가리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도 자신의 때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고, 때를 따라 사명을 감당해 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는 사람들의 때와는 달랐다. 초막절이 가까워지자(2절)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갈릴리가 아닌 유대로 올라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권한다(3-4절). 예수님의 정체를 나타내려면 초막절보다 좋은 때가 어디 있겠느냐는 논리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때”(6절)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며 갈릴리에 더 머물러 계시기로 작정하신다(9절). 허영심으로 가득한 동생들과 함께 유대로 올라가 초막절을 지내셨다면 예수님의 정체는 분명 크게 드러날 순 있었겠지만 왜곡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다 때를 헤아리는 기준이 있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서게 하는 그 타이밍을 잡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누군가는 자기 계획이 완성되었을 때를, 누군가는 재정이 준비되었을 때를, 누군가는 사람의 허락이 있을 때를 잡는다. 당신은 어느 때를 잡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일을 앞두고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제자들 중 여럿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예수님이 남은 열둘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며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한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60-71
한글본문.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영어본문.
60 On hearing it, many of his disciples said, “This is a hard teaching. Who can accept it?” 61 Aware that his disciples were grumbling about this, Jesus said to them, “Does this offend you? 62 What if you see the Son of Man ascend to where he was before! 63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64 Yet there are some of you who do not believe.” For Jesus had known from the beginning which of them did not believe and who would betray him. 65 He went on to say, “This is why I told you that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the Father has enabled him.” 66 From this time many of his disciples turned back and no longer followed him. 67 “You do not want to leave too, do you?” Jesus asked the Twelve. 68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69 We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of God.” 70 Then Jesus replied, “Have I not chosen you, the Twelve? Yet one of you is a devil!” 71 (He meant Judas, the son of Simon Iscariot, who, though one of the Twelve, was later to betray him.)

도움말.
이 말씀(60, 61절). 이 구절에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로서, 주로 설명, 진술, 선언을 뜻한다.
영생의 말씀(68절). 이 구절에서 ‘말씀’은 헬라어 ‘레마’로서, 주로 명령, 지시, 약속을 의미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무엇까지 아시는 분이신가(64절)?
⬇ 아래로 인간.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는가(68절)?
? 물어봐.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는가(69절)?
! 느껴봐. 주님의 말씀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알게 된다는 진리를 늘 기억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자세와 태도에서 변화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Meditation. 이 말씀과 영생의 말씀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이 선포되자(6:47-59) 제자들 가운데 동요가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두 부류로 첨예하게 나뉘게 된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과 예수님께 남은 사람들이다(66절). 이 둘을 갈라놓은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떠난 사람들은 “이 말씀” 운운하며 ‘로고스’(61절 뜻풀이 참고)만을 붙잡고서 서로 수군거린다. 듣기에 어렵다고 머리를 젓더니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간다(66절).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영생의 말씀”임을 담대히 고백하며 ‘레마’(68절 뜻풀이 참고)를 의지하여 예수님 앞에 머문다. 그 제자들이 머문 이유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래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69절).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의 항목이 아니라 믿음의 항목이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아는 것이다. 그리할 때만 이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 된다. 땅에 살아도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된다. 당신은 알고 믿으려 하는가, 아니면 믿고 알려 하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GBT 선교회.

하나님이 세상을 dvu 하사 God so ‘dvu’-d the world…

글/카메룬 밥 크레슨

성경번역선교사 리 브람렛은 흐디문화 어딘가에 하나님의 표시를 남겨놓았다는데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조사하는 내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카메룬 사람들이나 역사 속에 하나님의 발자취는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누구시고 얼마나 그들과 소통하길 원하시는지 흐디 사람들이 알도록 어떤 단서를 숨겨 놓았을까?

그리고 어느 날 꿈 속에서, 하나님은 리가 흐디 말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살펴보게 하셨다. 리와 그의 아내 타미는 흐디 동사가 3개의 모음 중 하나로 끝난다는 것을 배웠다. 거의 대부분의 동사가 i, a 그리고 u로 끝난다. 그러나 ‘사랑하다’(dv)의 경우는 i와 a로만 끝나고 u는 없었다. 왜 u는 없을까? 리는 흐디 번역위원회(마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들의 모임)에 가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dvi 할 수 있습니까?” “예!” 그들은 대답했다.(dvi의 의미는 과거 아내를 사랑했었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말한다)
“당신의 아내를 dva 할 수 있습니까?” “예!” 그들은 또 대답했다. (dva의 의미는 아내의 처신에 달려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잘하고 정숙함을 지킨다면 사랑할 것을 말한다)
“당신의 아내를 dvu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니죠!”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만약 당신이 아내를 dvu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아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심지어 그녀가 당신에게 물도 주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는 때에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심지어 그녀가 간통을 했을 때에도 당신은 그녀를 계속 사랑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우리 말에는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 순간, 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떠올리며 잠잠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dvu 할 수 있을까?” 그는 물었다.

몇 분간 정적이 흘렸다. 그리고 눈물이 장로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그들에게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는가? 이 말은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수 천 년이 지나고 흘러도 지킬 것이다. 우리가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짓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랑을 계속 지킬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모음에 “나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 인지로 널 사랑해!” 라는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해, 너의 조건과 상관없이 널 사랑해.” 라는 말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조건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에 심어 놓으셨다. 수세기 동안, 이 작은 단어는 문법적으로 나, 사람들의 이해 부분에서 나,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가 쓰여졌을 때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신념 체계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렇다면, 우리 조상 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영과 연결해 주는 주술사가 필요할까? 많은 사람들은 그 문제에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수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몇 백명에서 수 천명으로 늘어가고 있다. 흐디 신약성경이 출판 준비 중이 요즘, 29,000명의 흐디사람들은 이제 에베소서 5:25절의 “남편은 아내를 dvu 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dvu 한 것 같이 하라.”의 말씀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전세계, 방방곡곡 하나님의 말씀이 번역되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 그 독생자를 희생하심으로 얼마나 풍성한 하나님의 dvu (변하지 않는 사랑)를 누리고 있는지 그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바르게 정립되었다. 그 십자가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었다. 마지막 남은 부족을 위한 말씀의 마지막 구절이 번역되는 그 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원문 출처: http://www.wycliffe.net/articles?id=2922&pg=1&topic-id=24
<GBT선교회 펫북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며,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에 영생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47-59
한글본문.
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영어본문.
47 I tell you the truth, he who believes has everlasting life. 48 I am the bread of life. 49 Your forefathers ate the manna in the desert, yet they died. 50 But here is the bread that comes down from heaven, which a man may eat and not die. 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will live forever. This bread is my flesh, which I will give for the life of the world.” 52 Then the Jews began to argue sharply among themselves, “How can this man give us his flesh to eat?” 53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 54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55 For my flesh is real food and my blood is real drink. 56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remains in me, and I in him. 57 Just as the living Father sent me and I live because of the Father, 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live because of me. 58 This is th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Your forefathers ate manna and died, but he who feeds on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59 He said this while teaching in the synagogue in Capernaum.

도움말.
참된 양식, 참된 음료(55절). ‘참된’이란 의미는 만나와 같은 물질적인 양식과 비교되는 완전한 은혜의 실체이며 영원한 효과를 가진 양식임을 뜻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의 특성은 무엇인가(51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56절)?
? 물어봐. 광야의 만나와 생명의 떡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49-50, 58절)?
! 느껴봐. 나는 예수님께만 참된 양식과 음료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영생의 양식과 음료를 더욱 풍족히 먹고 마시기 위해 좀 더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먹고 마셔야 할 참된 양식과 음료
‘아멘’이 네 번(47, 53절)이나 쓰인 문맥이다. 그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문맥의 무게만큼이나 내용도 무겁기 그지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는 논지(51절)를 발전시켜, 자신의 살이 영생할 수 있는 참된 양식이며, 그 피는 영생하게 하는 참된 음료라고 천명하신다(55절). 그리고 영생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역설하신다(54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인해 예수님과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되며(56절),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 역동하기 때문이다(53절).
주님의 살과 피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점점이 방울방울 찢기고 흘러내렸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주님을 우러를 때 그 살과 피가 “믿는 자”(47절) 속에서 생명이 되어 역사한다(53절). 영생의 삶을 지금 여기서 살게 하며 마지막 날에도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한다. 당신은 오늘도 그 십자가 언덕에 오르고 있는가? 그 언덕에 오르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늘 감사와 기쁨을 강요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 함께 울어 주고 함께 아파할 때만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평생 자녀와 가족을 가슴에 묻고 죽을 때까지 상처를 견디어 내며 살아야 할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민규 필자 주

I.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에는 긍정의 강요가 넘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승리하는 삶일까? 예수 믿으면 내면의 아픔은 모두 기쁨으로 바뀌어야 하나? 믿으면 실패를 느끼는 것도 좌절감이나 우울한 감정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참된 기독교인이라도 죽을 때까지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다만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런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의 안식을 누릴 기회들이 있을 뿐이다. 상처와 고통 그리고 기쁨과 평화란 두 손님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적으로 오거니 가거니 하는 삶, 그래서 견딜 만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상처는 잠시 잊거나 덮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요즘 신앙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상처와 고통, 슬픔을 넘어서 늘 기뻐해야 한다는 강요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일처럼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학대한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혹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기 때문이란다.

II. 몸글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초청이지 강요가 아니다. 사실 슬플 땐 울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볼 때는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반응이다. 이는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깊은 영성을 지닌 기독교인의 자세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목석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메마르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다. 성경을 보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감정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조건 부정적이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는 세상에 사는 동안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세상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런 예들을 살펴보자.

1.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

1) 건강한 염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 사이엔 염려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염려는 누구나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염려 자체가 항상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선한 염려도 있고 나쁜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염려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한 염려라면 부정적이지만 이웃 사랑과 섬김의 차원의 지혜로운 염려라면 영성의 일부가 된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하고 의로운 염려를 하라고 요구하신다. 많은 이가 겪는 지저분하고 해로운 염려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건강한 염려가 있기에 우리는 부주의한 사고도 면할 수 있고 어떤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긍정적인 염려에 관한 바울의 예를 보자. 고후 11:28을 보라! 바울은 그를 짓누르는 선한 근심을 토로한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오직 그분에게 맡기고 나는 편히 쉬며 기뻐하리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모습은 “신앙 없음”, “믿지 못함”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염려하듯이 말이다.

2) 건강한 상심과 슬픔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거룩한 상심과 슬픔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들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심히 슬퍼하셨다. 사도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을 초월한 도인처럼 초연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몹시 상심하며 그들을 위해 많이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고후 2:4 새번역). 그는 “난 속상하지 않아!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신앙으로 하나님께 맡기니 내 마음은 늘 편하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때론 속상하고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거룩한 표현일 수 있다.

3) 건강한 분노

예수님을 보라. 악한 자, 위선자들을 보셨을 때 세상을 달관한 이처럼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계셨나? 아니면 분노를 품으셨을까? 예수님은 나사로와 같은 가까운 이가 죽었을 때,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시며 슬피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3-35). 그저 연기하신 것이 아니셨다. 교리상으로 볼 때 죽은 자가 하나님 품으로 갔으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목회적 차원에서 위로한 것일까? 아니다. 지금 사랑하는 이가 당장 내 곁을 떠난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살기 좋은 나라로 이민하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도 슬피 운다. 딸을 좋은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아버지도 식장에서 슬피 운다. 성경은 애통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물론 무엇에 관한 애통인가가 중요하다. 사리사욕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세상을 꿈꾸는 애통일 때 복이 있다는 뜻이다.

4) 거룩한 불평

불평하는 것은 과연 항상 나쁜 것일까?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평뿐만 아니라 기쁨도 평화도 다 나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중심일 때 슬픔도 불평도 저주까지도 다 좋은 것이다. 나쁜 말을 하고 죽고 싶은 마음은 악한 것일까? 욥도 하나님께 불평했고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욥 3:1-10). 물론 그의 거룩한(?) 친구들은 그의 이런 신앙 없는 행위를 꾸짖었다.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불평했다.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다. 위선으로 우리는 자신을 학대하고 남에게 짐을 지운다.

그들은 악하고 속이 좁은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몰라서 불평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롭고 선한 이들이었기에 세상에 대해 불평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그분의 능력을 믿어서 하나님께 아픔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웃들과 피조물의 고통에 함께 참여했다. 마치 우리의 연약하고 고통스러움에 참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말이다. 제발,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그들의 눈물에 함께 울어 주고 고통에 함께 아파할 때만 그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고 늘 감사해야 할까? 정말 짜증 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받아들이고 감사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 분노하는 이들이 결국 더 크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전도연)가 그런 예일 것이다. 유괴범에 의해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가짜 용서와 감사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다가 결국 터져 버린다. 강요된 긍정은 결코 힐링의 힘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참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자신의 좌절과 한을 표출하셨다.

2. 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마음이 늘 평안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성령이 충만한 이는 늘 마음이 평안하고 초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는 성경으로 본다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하다. 몸을 가지고 사는 한, 그리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삶에는 눈물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성경은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눈물도 아픔도 사라지고, 연약함을 더는 체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상태는 오직 부활 이후의 복이다. 지금은 아직 아니다. 이미 천국이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크고 작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늘 부분적으로만 주님의 생명과 평온을 체험할 뿐이다. 오히려 믿는 이들도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남들처럼 다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거하기 때문이다.

3. 사역자라고 연약함과 고통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 후의 현실이다.

1)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런 일이 있는데 괴로워하지도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기뻐 찬양하는 것이 높은 영성일까? 난 솔직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때론 나도 기도 가운데 충만을 체험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해도 그렇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내가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을 크게 오해한 것이었다. 이는 중요한 과정이 생략된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난 내 내면의 슬픔으로부터 도망하여 주님의 기쁨을 찾았다. 그러나. 진짜 기쁨이 넘칠 수 있으려면 내 연약함을 다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세상엔 별 인간 없다. 물론 영적으로 충만하면 힘든 일에 대한 극복이 빨라진다. 쉽게 과거를 털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자 강박관념을 가질 때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집착해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한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2)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도피일 뿐 바른 방식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가식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회복된 상태다. 순수함이 있는 아이에겐 조작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어른보다 건강하다. 아이처럼 슬플 때 진실하게 슬프고 아플 때 진실하게 그 아픔을 느껴라. 이웃이 슬플 때 그들과 함께 진실하게 슬퍼해 보자. 그때 우리에겐 힐링이 일어난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 안에 스며드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이 방식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라.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울어 주라.

3)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때 아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내 연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하는 그릇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던 중 바울은 질병을 앓았다. 하도 사역의 방해가 되어서 그가 이를 사탄의 하수인 같은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그가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성령님께서 함께하셔도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약함을 체험한다. 피할 길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롬 8:26).

4)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결코 염려와 속상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피하지 마라.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그럴수록 그런 감정을 잘 다스리고 극복이 빠르다.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더 아프다. 현실적으로 보면 영적인 사람일수록 사는 것이 더 힘들다. 사서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살면 힘든 일과 갈등도 더 많이 겪는 것이 정상이지, 어찌 가는 길이 늘 평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치고 평탄한 길 간 사람 없다. 진리의 길은 늘 모욕, 갈등, 핍박을 겪게 된다. 그래도 살 만하다. 왜? 주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나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는 긍정의 자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병이 드는 것 같다.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단한 사람은 없다. 믿음이 있다 해도 내면은 다 약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를 믿어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평생 상처는 평생 상처로 남는다. 다만 끌어안고 주어진 삶을 살아 낼 능력을 배울 뿐이다. 체면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 중에도 마음이 아픈 이들이 주변에 많다.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자. 외롭고 힘들 땐 솔직하게 힘들다고 말하자. 그리고 약함을 고백하는 이의 손을 잡아 주자. 우리 모두 자신의 약함 가운에 주변의 위로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강함을 체험해 보자.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나의 약함을 기뻐한다고 말한 바울의 의미는 자신의 연약함에서 도피하여 강함을 체험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만큼 그분의 강함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글쓴이,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성서신학 교수,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저자
<뉴스엔조이 2015.04.10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