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0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이 집 안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데려와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에 그를 내린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명하신다. 이로 인해 서기관들과의 논쟁이 발생한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2:1-12
한글본문.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영어본문.
1 A few days later, when Jesus again entered Capernaum, the people heard that he had come home. 2 So many gathered that there was no room left, not even outside the door, and he preached the word to them. 3 Some men came, bringing to him a paralytic, carried by four of them. 4 Since they could not get him to Jesus because of the crow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 above Jesus and, after digging through it, lowered the mat the paralyzed man was lying on. 5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6 Now some teachers of the law were sitting there, thinking to themselves, 7 “Why does this fellow talk like that? He’s blaspheming!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8 Immediately Jesus knew in his spirit that this was what they were thinking in their hearts,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hinking these things? 9 Which is easier: to say to the paralytic,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take your mat and walk’? 10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 . . .” He said to the paralytic, 11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12 He got up, took his mat and walked out in full view of them all. This amazed everyone and they praised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도움말.
도(2절). 헬라어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상(4절). 일반 서민들이 짚으로 만든 자리나 담요처럼 누울 수 있는 구조물을 가리킨다.
신성모독(7절). 헬라어 ‘블레스페미’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불경스럽게 대하거나 그의 특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뜻한다. 율법(레 24:16)은 당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한다.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10절)?
⬇ 아래로 인간. 중풍병자가 낫게 되는 데 누구의 믿음이 사용되었는가(5절)?
? 물어봐.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됐던 건 무엇인가(2절)?
! 느껴봐. 나는 다른 이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는 사람인가, 그 길을 여는 사람인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통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Meditation. 도를 듣는 사람들, 지붕을 뜯는 사람들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전하셨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 침상에 메워 온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 ‘무리들’(4절)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도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결국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그 집의 지붕을 뜯고 그의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린다. 주님은 도를 듣는 사람들이 아닌 지붕을 뜯은 사람들의 행위를 믿음이라 인정하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다. 그리고 지붕이 뜯긴 그 집은 하나님의 영광(17절)으로 가득하게 된다.
주님의 도에 집중하는 것은 분명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골몰하다가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방치하거나 방해할 수도 있다. 도만 찾지 말고, 사람도 찾아야 한다. 도를 따라 모이는 교회만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 흩어지는 교회도 되어야 한다. 당신의 한 귀는 주님의 도를 향해, 다른 한 귀는 신음하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가?

2014-01-0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낫기를 구하는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널리 알리게 되고, 동네 밖에 머무시던 예수님을 사방에서 찾아온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40-45
한글본문.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영어본문.
40 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him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41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ling,” he said. “Be clean!” 42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43 Jesus sent him away at once with a strong warning: 44 “See that you don’t tell this to anyone. But go, show yourself to the priest and offer the sacrifices that Moses commanded for your cleansing, as a testimony to them.” 45 Instead he went out and began to talk freely, spreading the news. As a result, Jesus could no longer enter a town openly but stayed outside in lonely places. Yet the people still came to him from everywhere.

도움말.
불쌍히 여기사(41절).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로서, 애가 타다, 애간장이 녹다 등의 의미다. 예수님이 치유사역을 행하신 근본 동인이다(마 15:32, 20:34, 눅 7:13 등).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44절). 나병 치유는 제사장의 검사를 통해 확인되며, 치유를 받은 사람은 감사 예물을 드려야 했다(레 14:1-57).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어떤 마음으로 고쳐주셨는가(41절)?
⬇ 아래로 인간. 나병환자에겐 어떤 믿음이 있었는가(40절)?
? 물어봐. 왜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여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을까(43-44절)?
! 느껴봐. 나는 삶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유일한 답이 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 꿇어 엎드리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할 문제거리는 무엇인가?

Meditation. 복음이 빠진 신비
나병 환자가 기습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 꿇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율법의 정결예법을 거스르고 부정을 자초하신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며 ‘깨끗함’을 명하신다. 그러나 그를 돌려보내실 때에는 제사장에게 보여 입증하라고 하신다. 예수님 자신은 율법에 매이지 않으시지만, 그가 당시 유대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아갈 때 있을지 모를 충돌과 장애를 배려하신 것이다. 율법에 대한 자유가 오히려 한 영혼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굴레가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엄히 경고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전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에게 단지 ‘기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널리 전했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동네 밖으로 물러나 계셨다.
예수님은 복음이 빠진 신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 깨끗함을 받은 그의 몸 된 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복음이 빠진 신비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당신은 어떠한가?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당신이 변화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적당한 음주는 비신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금주를 하게 될까?

성서의 술에 대한 시선들<이민규 교수>.
2014년 1월 6일 오전 4:54

적당한 음주는 비신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금주를 하게 될까?

건전한 음주문화는 하나님의 선물- 성서의 술에 대한 시선들

성서는 음주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

성서에 나타난 술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음주에 대한 성서의 시각이 필자가 생각한 것보다 매우 긍정적이라는 점에 깜짝 놀랐다. 물론 이는 성서에는 술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긍정적인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필자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성서는, 음주란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크나큰 즐거움이고, 풍성하고 넘치는 술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술이 없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에 따른 재앙이다. 성서는 음주에 대한 폐단을 엄중히 비판하면서 건전한 음주문화를 추구한다. 성서에서 음주는 인생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 묘사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인들의 구원의 때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최상급 포도주가 차고 넘쳐나는 잔치로 이해했으며, 초대교회에서는 예배 때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포도주를 마시던 풍습이 생겼다. 이를 통해 술에 대한 초대교회의 열린 마음을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음주는 하나님의 주신 선물로 삶의 큰 즐거움이며 괴로움을 잊게 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처음으로 한 행위도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었고 예수님의 첫 기적도 포도주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만드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음주의 위험에 대하여도 잘 인식하고 있고 잘못된 음주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한다. 성서의 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그러나 어느 문화와 마찬가지로 지나친 음주에 따른 만취한 행동에 대한 것이지 결코 다른 보편적인 문화에 비해 특별하게 부정적이진 않다. 성서에서 술이란 잘 마시면 즐거움이고 과하면 독이 된다는 입장이다.성서 속의 음주문화

성서의 음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사실 고대 이스라엘과 로마 사회가 오늘날 식사 때마다 포도주와 맥주를 일상적인 음료수처럼 마시는 프랑스나 독일 문화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식사 때 제자들과 포도주를 일상적으로 마시던 것도 술 문화가 아니라 음식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포도주를 마셨다. 평소에는 포도주를 물로 수 십 배 희석해서 음료처럼 마셨는데 잔치 때는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를 마셨다. 성인들은 주로 묵은 포도주를 선호했다.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았지만 새 포도주로도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사 49:26 ; 호 4:1 ; 행 2:13 참조, 삿 9:13 참조, 사 65:8; 미 6:15) 쿰란 공동체는 새 포도주를 음료처럼 즐겼다.(1QS 6:4-6; 1QSa 2:17-18, 20; 1QH 10:24) 로마인들도 매일 포도주를 음료로 마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건네받은 마실 것(막 15:36)인 신 포도주(포도 초)는 심한 갈증을 장시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는 음료로 로마 군인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마시던 것이었다.

사실 지나친 음주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가 나온 이후부터이다. 그때부터 술은 마치 허가된 마약처럼 사용되어 수많은 이들이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삶이 파탄 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증류주를 아직 만들지 못했고 지독하게 더운 열대 문화인 이스라엘에서 술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빈도는 추운 겨울기간이 긴 북방계 문화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음주로 인한 문제가 그곳에서는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음주에 대한 긍정적인 성서의 태도는 당시 음주의 문제가 오늘처럼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오히려 성서에서 말하는 술 취함의 폐단에 대한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성서에서 ‘술’은 포도주와 독주를 말한다. 어떤 이들은 성서의 포도주를 포도 주스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서는 발효되지 않은 음료를 포도주라 부른 적이 없다. 포도주는 항상 알코올이 함유된 ‘술’이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만든 기적을 행했을 때에 잔치를 맡은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요 2:10)라고 말했다. 이 점은 예수 당시의 포도주는 알코올이 포함된 발효된 술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사실 냉장고가 없던 중동 지역에 포도즙은 반나절만 지나면 발효가 시작되기 때문에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포도주로 번역한 “오이노스”라는 말은 사실, 포도 이외에도 건포도(b.B. Bat. 97b), 석류(아 8:2), 사과, 야자, 꿀 허브, 무화과 등으로 만든 술을 의미한다. 즉, 포도주라기보다는 과실주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래도 그 중 포도주가 가장 대중적이었다. 독주는 히브리어 “세카르”, 그리스어로 “시케라”에 대한 번역으로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맥주와 유사한 것으로(잠 20:1; 사 24:9) 취하게 하는 술이었다.(사 28:7-8; 29:9; 참고 삼상 1:15) 맥주는 BC 3500년 전부터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인들이 만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보리 빵을 걸쭉하게 갈아 물에 넣어 자연 발효시켜서 맥주를 만들었는데 약으로도 사용했다. 당시 의사가 처방한 700종의 약 중에 100종이 이 맥주였다. 마치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병에 포도주를 약으로 처방한 것을 상기시킨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보리즙을 토기 그릇에 담아 발효시키고 탄산가스가 빠져나가도록 하여 맥주를 마셨다. 신약 시대에 로마와 유대문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독주)들이 있었다.문제는 술에 대한 남용이다

금주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에 따른 종교적 정결성을 위해 때론 지켜야만 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왕의 포도주를 마시길 거부했는데, 이는 이방인의 제사 때 바쳐진 것이었기 때문이다.(단 1:8-16) 레갑 족속도 도시문화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한 차원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느라 집을 짓지 않고 살았으며 포도주도 금했다.(렘 35:1-19) 나실인은 금욕적 차원에서 포도주와 독주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모두 금했다.(민 6:1-4; 삿 13:4-5, 7, 14; 참조 암 2:11-12) 세례 요한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것은 그가 나실인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마 11:18 병행구 눅 7:33) 그러나 예수와 그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포도주를 당시의 음식문화의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적절하게 누렸다.

1) 성서의 술 취함에 대한 부정적 견해

성서는 술에 취하는 것을 비판한다.(삼상 1:14렘 13:13; 겔 23:33, 눅 21:34; 롬 13:13; 갈 5:21, 벧전 4:31) 모세의 율법은 사형에 마땅한 패륜아의 특징으로 술 취함을 제시한다.(신 21:20-21) 술 취함은 성적 타락과 매춘, 부도덕에 종종 연관된다.(노아의 경우 창 9:20-27, 롯의 경우 창 19:30-38; 암 2:8; 합 2:15) 성서는 술의 남용에 대하여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독한 술은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 이것에 빠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혜롭지 않다. (잠 20:1) 술은 경제적인 가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잠 21:7) 술은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독한 술을 찾는 사람과, 밤이 늦도록 포도주에 얼이 빠져 있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11) 포도주쯤은 말로 마시고, 온갖 독한 술을 섞어 마시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22)술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인 너 사마리아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술에 빠진 주정꾼의 도성, 기름진 평야의 높은 언덕에, 화려한 왕관처럼 우뚝 솟은 사마리아야, 시들어 가는 꽃 같은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사 28:1)이외에도 이사야 28장 7절, 29장 9절, 56장 12절과 예레미야 23장 9절과 51장 7절, 요엘 3장 3절 등에서 술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지도자가 술에 빠지는 것은 치명적이다. 잠언은 왕에게 독주를 멀리할 것이 권고하고(잠 31:4-5), 술을 탐하는 지도자는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사 56:11-12)고 말한다. 임금과 대신들이 밤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없는 동안에 반역을 꽤하는 자들이 모반을 꾸밀 수 있다.(호 7:5) 이사야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비난했다.(사 28:7)

음주가 보다 보편적이었던 로마문화까지 그 독자층이 넓어진 신약에서 음주의 문제에 대한 경고는 더욱 강화된다. 에베소서는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엡 5:18) 또한, 술을 탐닉하는 자는 교회 감독이나 집사가 될 수 없다.(딤전 3:3, 8; 디도 1:7) 여기서 우리는 디모데전서 3장 3절의 우리말 번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난폭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딤전 3:3) 여기서 “술을 즐기지 않으며”는 정확한 번역이 아닌 듯하다. 본문의 헬라어 “파로이노스”는 “술을 즐기는 자”라는 넓은 개념보다는(단순히 술을 무리 없이 즐기는 정도가 아닌) “술고래, 술주정뱅이, 모주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술주정을 하지 않고”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딛 1:7도 마찬가지다)

젊은 여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나이 많은 여인들은 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나이 많은 여자들도, 행실이 거룩하고, 헐뜯지 아니하고, 과도한 술의 노예가 아니고,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게 하십시오. (딛 2:3) 요한계시록은 특히 포도주를 하나님의 진노나 부도덕의 은유로 사용한다.(계 14:8, 10; 16:19; 17:2; 18:3)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술 취함이 육신에 속한 생활이며 구원에 위협적이라 경고한다.(눅 21:34) 마태는 비유에서 술 취해 방탕한 생활을 한 종은 천국에서 쫓겨나게 되는 내용을 담는다.(마 24:45-51; 병행구 눅 12:42-48)2) 성서의 술에 대한 중립적 혹은 긍정적인 표현들

포도주는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당시 즐겨 마시던 대중적인 술이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포도주를 주며 복을 빌어 준다.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창 14:18-19)구약에서 제사예배가 한 성소로 집중되면서(신 12), 이제 십일조로 제물을 바친 사람이 자신의 제물을 먹을 수 있게 명령받았다. 이때 하나님 앞에서 포도주든 독주든 마음껏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복이다.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신 14:26)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크다고 한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시 4:7)이는 포도주의 기쁨이 크다는 것을 전제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포도주를 창조하신 것을 찬양한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시 104:15)하나님은 인간을 풍요롭게 살게 하려고 은과 금뿐만 아니라 기름과 포도주를 넉넉하게 공급하신다.(호 2:8) 자신의 재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잠 3:10)이라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에서 솔로몬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입맞춤이 포도주보다 달콤하다고 찬미한다.(1:2, 7:9) 사랑은 포도주보다 솔로몬을 즐겁게 한다.(4:10) 느헤미아는 아닥사스닥 왕의 술을 관리하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이는 술의 질과 독을 감별하기 위해 당연히 술을 시음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나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다. 왕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 어느 날… (느 2:1)나라를 구한 에스더는 왕과 함께 연회에서 술을 마셨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왕은 또다시 에스더에게 물었다. (에 5:6) 왕과 하만은 에스더 왕후가 차린 잔치에 함께 갔다. 둘째 날에도 술을 마시면서 왕이 물었다. (에7:1-2) 당대의 의인 욥도 가족들과 포도주를 마셨다. 하루는, 욥의 아들과 딸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욥 1:13). 다니엘도 평상시에는 포도주를 즐겼다.(단 10:3) 포도주가 모자라거나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난이다.(신 28:30; 사 16:10; 24:11; 65:21 렘 48:33, 애 2:12; 호 2:9; 엘 1:10; 학 2:16, 비교 사 55:1; 렘 31:12; 슥 9:17) 언젠가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시온 산으로 부르시어 오래된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사 25:6)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사 25:6)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기독교가 포도주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없음을 보여준다.(마 9:14-17) 요한복음은 하나님은 포도원지기로 소개한다.(요 15)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포도주를 마실 것을 권고한다.(딤전 5:23)포도주와 가나의 혼인 잔치

성서에서 예수님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었다. 6개의 돌 항아리에 가득 채운 물의 양은 대략 360-540리터 사이였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필요 이상의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만들었을까? 구약과 유대문헌에서 풍성한 포도주는 다가올 구원의 시대에 대한 복이다.(렘 31:12; 욜 3:18; 암 9:13-14; 2 Apc, Bar, 29:5; Sib. Or. 2, 317-18; 3.620-23, 744-49) 넘치는 포도주는 메시아의 도래 때 유다 지파가 받을 복과 관련 있다. 메시아가 오시면 사람들은 포도주로 옷을 빨 정도로 포도주는 흔한 술이 된다. 포도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어 눈이 붉어질 정도다.(창 49:11-12) 낙원이 회복될 때는 산들이 단 포도주를 흘릴 것인데(욜 3:18절),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작은 산들은 포도주에 녹아버릴 것이다.(암 9:18)

로마서 14장은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고기와 포도주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본문은 기본적으로 우상숭배에 드려진 고기와 포도주에 관한 내용이지 음주 자체에 대한 논의는 아니다. 성도는 화평하고 덕을 세우도록 힘을 써야 하기에(롬 14:19),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거리끼는 형제나 자매를 시험들게 하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롬 14:2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상대에 대한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와 포도주를 먹고 마실 자유가 있다고 해도 이웃을 시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21절)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결코 다른 이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22절)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게 된다. 특정한 음식을 먹고 자기 취향의 옷을 입는 것이나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것도 말이다. 항상 어떤 이유든 반대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처방은 단지 율법주의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의 상황과 달리 율법주의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의 믿음이 너무나 연약한고로 그들의 실족을 막기 위한 대응이었을 뿐이다.닫는 글

한국 사회는 오늘날 과하고 왜곡된 술 문화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있다. 술만 덜 마신다면 개인과 가정파탄도 줄어들 것이며, 성적 타락도 덜할 것 같다. 우리 문화에서 손님을 접대하면 당연히 술이 나오고, 술을 마시면 갈 데까지 마신다. 처음엔 한 잔만 하자고 하지만 한 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권하는 사람이나 마시는 사람 서로가 잘 알고 있다. 거리의 어디를 가더라도 유흥업소가 넘쳐나는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다. 한국 문화에서 쾌락과 방탕, 성적 타락을 조장하는 문화에 술이 한 몫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술 소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줄여야 하고 건전하지 못한 방탕한 음주문화는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증류주가 없었던 성서시대의 문화에서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발생시키는 독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서에서 술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넘치는 포도주는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복이다. 넘치는 포도주는 메시아 잔치의 위대함을 상징하며, 완성될 낙원은 포도주가 넘치는 곳으로 소개될 정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차고 넘치게 만든 것이었다. 세례 요한이 금주를 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늘 잔치에 참여하시며 술을 드셨다.

성서에서 술은 인생을 즐겁게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물론 마시지 않을 자유도 있다. 적당하고 건전한 수준으로 즐길 때 술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성서는 술이 과할 때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 지혜로운 경고를 한다. 성서는 과도한 음주가 마약과 같은 쾌락, 무절제, 방탕과 음란으로 흘러 죄의 빌미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절제된 음주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지만 절제되지 못할 때 술은 백해무익한 것이 된다. 결국 술이 잘못이 아니라 술을 대하는 사람이 문제다. 그러나 오늘날 지나친 음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애주가들 때문에 건전한 음주가까지 죄인 취급하거나 음주를 경건하지 못한 신앙인의 잘못된 행동으로 보고 정죄하는 것은 바리새주의의 시각이지 예수님의 시각은 아니다. 잘못된 술 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근거로 금주를 주장하는 것은 성서를 넘어선 시각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성서의 주장을 넘어선 금주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방탕한 술 문화를 몰아내고 건전한 음주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민규 l 교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성서대학교 성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나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이 어부였다. 어릴적에 여러번 봐왔지만, 술은 그들을 삶을 책임지려는 건전한 인간에서 통제불능의 동물로 만들곤했다. 요즘 드는 생각은 비단 술만 이었겠나 싶다! 사람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했던가,
조절하고 싶어도, 거절하고 싶어도 안되는 일들에 대해 항변하는 술끝에 고래고래 그들의 넋두리를 들은 기억이 새롭다.
주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그 잔치에 주인이 주님인 것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의 나라에는 술을 먹고도 속쓰림이 없었으면 한다.
<난 마시지도 않았는데 왠 넋뚜리!ㅋ>

2014-01-06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이 열병으로 누운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자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비롯한 온 동네가 모여든다. 그들을 고치신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시고 무리를 피해 온 갈릴리로 다니며 전도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9-39
한글본문.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영어본문. 29 As soon as they left the synagogue, they went with James and John to the home of Simon and Andrew. 30 Simon’s mother-in-law was in bed with a fever, and they told Jesus about her. 31 So he went to her, took her hand and helped her up.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wait on them. 32 That evening after sunset the people brought to Jesus all the sick and demon-possessed. 33 The whole town gathered at the door, 34 and Jesus healed many who had various diseases. He also drove out many demons, but he would not let the demons speak because they knew who he was. 35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36 Simon and his companions went to look for him, 37 and when they found him, they exclaime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38 Jesus replied, “Let us go somewhere else–to the nearby villages–so I can preach there also. That is why I have come.” 39 So he traveled throughout Galilee, pr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도움말.
잡아(31절). 헬라어 ‘크라테오’로서, 정복하다, 지배하다라는 뜻이다. 곧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은 것이 창조주의 권세로 그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해 질 때(32절). 안식일의 종료 시점을 의미한다.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34, 39절)?
⬇ 아래로 인간. 나음을 입은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가(31절)?
? 물어봐.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서 보이는 특징은 무엇인가(35절)?
! 느껴봐. 나의 기도 생활은 상황과 형편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예수님처럼 기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과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Meditation.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상이몽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찾아 시몬의 장모를 열병에서 놓이게 하신다. 해가 지자,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린 사람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께 모여든다. 예수님은 각종 병자들을 만나 치료하신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다. 아침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찾는다며 의기양양하게 상황을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정색하고 다른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다. 대중적 열광과 인기를 뒤로 하고, 낯선 마을들로 제자들을 잡아 이끄신다. 기도하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의 입술에서 그 이유가 고백된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의 기대와 제자들의 기대는 사뭇 달랐다. 제자들의 성공 지향적 야심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예수님의 충심이 대조를 이룬다. 당신에게는 과연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명이 있는가? 당신의 걸음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현장이 아니라, 사명의 자리로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길을 위해 기도의 무릎을 꿇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1-05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푯대를 향하여1

간단설명.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 A. W. 토저

성경본문. 푯대를 향하여1

한글본문.
빌립보서 3:13-14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린도전서 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영어본문.
Philippians 3:13-14
13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1 Corinthians 9:26
Therefore I do not run like a man running aimlessly; I do not fight like a man beating the air.

Meditation. 초점이 분명한 삶을 살라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수많은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만, 연말이 되어 뒤를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내지 못해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성취하지 못하고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초점 없이 산만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분명하면 내가 가진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는 마치 태양 빛의 초점을 맞춰 엄청난 힘을 만드는 돋보기의 이치와 같습니다. 평범한 햇살이 두꺼운 종이를 태울 수도 있고, 심지어 강철도 뚫을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삶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모든 요인들을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한 가지 목표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빌 3:13-14). 또한 그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려 노력했습니다(고전 9:26). 바울은 초점 없는 삶이 마치 결승점 없이 달리는 마라톤과 같고, 상대방 없이 싸우는 권투 경기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이렇듯, 믿음의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초점이 분명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은 도전합니다. “삶이 영향력을 갖기 원한다면 삶의 초점을 맞추라. 그만 첨벙거리라.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 적게 하라.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활동도 잘라내라. 그것이 유익하고 좋은 활동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만 하라. 활동성과 생산성을 혼동하지 말라. 무엇 때문에 목적 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가?”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당신이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초점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활동과 계획 가운데 가지치기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기도
“사랑의 주님, 분명한 목적 없이 마냥 흔들리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초점 있는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 주소서.”

피터 엔즈(Peter Enns)의『아담의 진화( Evolution of Adam, The: What the Bible Does and Doesn’t Say about Human Origins)』

아래의 글은 별아저씨의 집(우종학 Jong-Hak Woo)의 글을 퍼왔습니다. 성경으로 업을 삼는 사람으로 고민하고 즐기는 내용입니다.

http://solarcosmos.tistory.com/662

[책] The Evolution of Adam by Peter Enns (아담의 진화)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오전 12:57:10 |

지난 추수감사절 휴일에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이제야 올립니다. 풀러신학교 서점에 놀러갔다가 고른 책 중의 하나인데요 Peter Enns 교수가 쓴 The Evolution of Adam 입니다. 2012년에 Brazos Press에서 출판되었네요.

이 책은 인간의 기원, 특히 아담과 관련해서 창세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혹은 아담에 관해서 창세기가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지 않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핵심질문으로 삼아 풀어가는 책입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창세기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룹니다.

현대인들이 고대나 중세 때와는 다르게 창세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저자는 3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바로 과학의 발전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늘어난 과학지식은 자연의 역사 그리고 우주와 생물과 인간의 기원에 대해 과거에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던져주었고 그래서 예전에 창세기를 읽던 방식이 도전을 받았으며 새로운 읽기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얘기입니다.

둘째는 19세기의 성서신학 혹은 성서비평의 발전 때문입니다. 성서신학이 발전하면서 창세기 사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에 창세기 이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던져준 것이죠. 가령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이야기가 꽤나 다른데 이 두가지는 다른 문서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알려졌지요. 결국 성서신학의 깊이를 통해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성서고고학의 발전입니다. 고대 바벨로니아의 문서들의 발견이라든지 근동지역의 문화비교라든지 고고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두번째가 성경 내적인 요소라면 세번째는 성경 외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두가지는 성경, 특히 창세기를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물론 성서비평이나 성서고고학의 단점들이나 부작용들도 있지만 수용할만한 학문적 결과들은 결국 창세기에 대한 이해를 깊이있게 해줍니다. 거꾸로 말하면 창세기를 얼마나 엉뚱하게 잘못 읽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성경공부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공부를 꼭 해야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저자는 창세기를 재조명하고 창세기에 담긴 아담에 대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간단하게 훑어볼까요?

전반부는 창세기가 언제 쓰여졌고 근동지방의 다른 창조이야기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창세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다룹니다. 저자가 보는 관점은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서술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근동지역의 다른 신들과 달리, 이스라엘이 믿었던 그 신은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창세기 1,2장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메세지는 이스라엘의 신만이 진정한 창조주이라는 것이죠. 가령, 창세기 1장의 서술을 보면 다른 민족들의 창조설화와 비슷한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신들과의 차이점들을 드러냄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2장의 서술은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서의 아담을 제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으로서 즉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아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그 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의 핵심 메세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과 목적을 이해하면 창세기 1,2장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기원 과정을 세밀하게 (가령 과학적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독자들의 시도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읽어내려는 실수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신약의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룹니다. 구약 창세기가 역사적 아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신약에서 바울은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기술했기 때문에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요즘 논란이 되는 새관점과도 관련이 될 수 있을텐데요. 후반부에서는 바울 당대의 랍비들이 구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관련된 내용들 그리고 바울이 제시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한 원죄와 구속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저자의 관점을 요약해 보면 로마서에서 바울이 아담을 “인류의 조상”으로 제시한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같은 위치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구원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조상이 되는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아담-그리스도”라는 구조를 통해서 창조적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실제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깨달음을 갖게 된 뒤에 가능했던 창조적 서술입니다. 바울은 당대의 해석학적 기법들과 스스로 경험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토대로 창세기 2장을 재해석하여 원죄와 구속의 신학을 아담-그리스도의 틀로 풀어서 제시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입니다.

요약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저자는 인류의 조상으로서 역사적 아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첫째, 창세기 자체가 인류의 조상, 혹은 인류의 기원을 메세지로 담은 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창세기 1,2 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역사적 서술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아담을 제시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원죄와 구속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입니다. 역사적 아담을 인정하지 않으면 죄와 구속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죠. 저자는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유효함이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달려있지 않다고 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조상으로서의 아담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신학적 차원에서 아담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조상으로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죠.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창세기에 제시된 창조스토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해서 많은 부분 저자에 공감합니다. 결국은 신학적 맥락을 봐야 합니다. 성경은 신학적 텍스트니까요. 창세기 1,2장이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세지가 무엇이었는가를 성서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면 바울이 어떻게 아담을 이해했는가에 관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궁금증을 가질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성경의 무오성이나 권위, 해석 등등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지겠지요. 가령, 창세기가 아담을 인류의 조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데 신약의 바울은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서 바울을 제시하는 것이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겠지요. 사실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구약본문의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차용한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당대의 해석학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충격일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성경을 코란이나 혹은 무슨 마법의 책으로 생각하지 말고 “책”으로서의 성경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거꾸로 역설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 중에서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과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남아있습니다. 가령, 기존에 제시된, 진화한 한 인간(혹은 한 쌍, 혹은 무리)을 하나님이 택해서 영적인 존재로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해도 좋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좋습니다만) 만들었다는 관점은 저자가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일독을 하셔야 겠습니다. 보수적인 관점은 아니지만 저자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 덧붙여서, 책의 제목은 아담이 진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의미합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12월 초에 따끈따끈하게 출간된 Four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입니다. 이 책은 4명의 저자가 역사적 아담에 관해서 서로 다른 관점의 견해를 펼치는 책입니다. 기능적 창조를 제시했던 칼빈대학의 John Walton도 저자 중의 한명이고 John Collins도 저자 중의 한명이군요. 성탄절 프로젝트가 되겠네요. 4개의 관점이 어떻게 다르게 제시되는지 궁금합니다.

2014-01-04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교훈과 권위에 놀라고, 그 소문이 온 갈릴리 지방에 퍼지게 된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28
한글본문.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영어본문.
21 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Jesus went into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22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not as the teachers of the law. 23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ried out, 24 “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25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 27 The people were all so amazed that they asked each 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and with authority! He even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obey him.” 28 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도움말.
회당(21절). 안식일인 매주 토요일에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와 성경봉독을 하고 서기관의 성경해석을 듣기 위해 모인 장소다.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25-26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22, 27절)?
? 물어봐. 정작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에 순종한 건 누구인가(26절)?
! 느껴봐. 나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오늘 하루 힘써 순종해야 할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Meditation. 해 아래 유일한 새 것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신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신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을 건지시기 위해 율법의 굴레 속으로 복음을 가지고 친히 들어가신다. 율법 속으로 침노해 들어간 복음은 당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 와중에 귀신까지도 그가 사로잡은 사람의 입술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드러낸다. 귀신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그 귀신은 결국 쫓겨난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더 놀라며 예수님의 복음을 ‘권위 있는 새 교훈’(27절)이라 칭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접한 그들은 연신 놀라기만 했고(22, 27절), 예수님의 교훈은 소문이 되어 흩어진다(28절).
주님의 말씀은 분명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새 것이 없는 해 아래(전 1:9)에서, 오직 새 것을 주고, 새 것을 살게 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교훈이다. 그 말씀은 과연 당신에게 얼마나 큰 권위를 행사하는가? 귀신도 순종하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당신은 매일 신실하게 삶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그 하늘의 새 교훈을 깨닫고 더욱 힘써 순종해야 할 삶의 영역은 어디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카작에 나랑 비슷하게 엄지를 닮은 한국인이 ㅅㄱㅅ로 가 있다. 펫북에서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99년도 만났으니 십년이 넘게 알고 지넨 사람이다.
그는 이래저래 고민하더니 카작으로 갔고, 그곳에서 오래 살 모냥이다. 애도 둘이란다. 벌써인가 싶었는데, 허허 그도 서른을 훌쩍 넘겼네, 솥단지 라면을 휘리릭 비운지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얼음나라서 잠시 고생할 때 따따시 보내라고 사랑을 보내온 지라, 그 소소함도 기억이 난다.
그 놀라움은 그의 일상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