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16 QT큐티체조.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 운동

이머징 처치
성령께서는 교회가 시대에 따라 그 소명을 다하도록 인도해 오셨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인 사회의 문화적 변화에 따라 상황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 운동으로, 15세기에는 종교 개혁을 통한 개신 교회의 형태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 등등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이머징은 아직 이 운동의 구체적인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도 붙여진 이름이다. 단지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머징 처치로 명명한 새로운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이다 (이머징 교회, 2005). 포스트 모던 시대를 기준으로 서구 교회가 더 이상의 ‘기독교 왕국’ (Christendom)이 아닌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이머징 교회 운동’이다. 이머징 교회들의 세 가지 흐름들을 살펴보자.

각교회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로
에디 깁스와 볼저는 공동 저서인 ‘이머징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이머징 교회들의 공통점이며 핵심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들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서구 교회들이 보여준 ‘기독교 왕국’과 같은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 축소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게 하는 대리인 (agent)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교회의 핵심적인 주제인 동시에 핵심적 지향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주기도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마 6:10)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숙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핵심적 사명과 주제라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눅 4:18).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각 교회들은 먼저 개교회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사랑으로 하나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요 14:34,35). 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특징이며 모든 믿는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본질이다(요17:11,20-26). 교단 연합을 추구하며 초교단 연합을 추구하는 운동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는 가장 가시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전세계의 교회와 함께 하는 지역 교회의 열심의 균형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하는 지역 교회의 건강한 영성으로 작용 하게 될 것이다.

내부적 활동에서 외부적 사역으로
지역 교회가 개교회중심적인 모습에서 탈피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른 바 선교적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섬기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역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다. 아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훈련과 활동들은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훈련소가 전투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관인 것 처럼 말이다. 세상을 섬기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정리한 다음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지역 (Local)과 세계(Global)을 섬기기 위한 목표들을 설정하여야 한다. 가장 먼저는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조사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역 전도도 지역 사회를 섬기는 활동들과 병행해야 한다.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채우며 지역 주민들을 사회적 연결망으로서 교회가 기능해야 한다. 동네의 주요 활동들에 교회가 참여하여 더 나아가 주도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활동들이 조금씩 발전하면 교회는 점차 내부 지향적인 모습에서 외부 지향적인 교회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회들이 많이지게 될 때 주변의 교회와 함께 하는 이른 바 한 지역에서의 연합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축소된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언제나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 (마 3:2;4:17,23;9:35;10:7). 천국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하는, 즉 공의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전 우주적으로 임하게 된 복된 소식이었다 (사52:7). 그렇다면 복음은 단지 한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는 복음의 축소주의 (reductionism) 그 이상의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소식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모든 사회 계층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함께 모든 사회 영역에 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눅 3:7-14). 천국 복음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다(눅 4:1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처럼 가난한 자들이야 말로 천국을 받아들인 만한 준비가 누구보다도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눅 6:20). 성도들의 직장 생활 가운데 복음에서 소외된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복음이 능력이 누룩처럼 퍼져야 한다.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시각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총체적 복음이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 변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면 교회들도 복음의 완성도를 점점 더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회가 다가온다.
이제 지역 교회들은 두 가지 면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한 가지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포스트 모던 시대 가운데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문화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교회가 시대에 적합하면서 그 사명을 다하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다. 이머징 처치는 바로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게 하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암울할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 천의 선지자를 남겨 두셨듯이 21세기 가운데도 새로운 운동을 통하여 천국 복음을 세상 가운데 전할 주님의 교회를 계속 일으키고 계심을 본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교회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송기태 선교사(singasong62@hotmail.com) 미션 달라스 총무(www.missiondallas.org)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큐티체조를 통한 GBS(그룹큐티)의 예

무리의 도와 제자의 도
마가복음 3:7-19

마음열기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중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평소 드리는 예배와 그런 집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차이점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본문말씀 14일(화) 큐티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 군중과 제자
1)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뜨거운 열기와 많은 숫자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7-10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7절),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다(8절). 무리가 너무 많아서 작은 배를 띄워서 설교하실 정도였다(9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고치셨는데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 왔다(10절).

2) 각처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무엇인가(8, 10절)?

그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① 그가 하신 큰 일(기적과 이적)을 들었기 때문이고 ② 자신들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함이었다.

3) 예수님은 따르는 군중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9절)? 예수님이 보이신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듣고 군중들이 몰려들었을 때 예수님은 이들과 약간 거리를 두기 위해 배를 띄우고 앉으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 때문에 아우성치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지만(마 4:23), 우리가 순간적인 기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복음의 내용에 더욱 집중하기를 원하신다.

4)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뒤로한 채 산으로 오르신 후 열두 제자를 따로 부르셨다(13절). 당신은 인간적인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군중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 부름 받은 제자인가?

2. 제자의 특징
5) 예수님의 제자들(13절)이 수많은 무리(7절)와 대조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눅 6:12 참조)?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누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한다(눅 6:12).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대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제자 됨의 주도권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리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메시지나 고난이 찾아오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

6)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신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14-15절)?

예수님과 ① 함께 있게 하시고, ② 보내사 전도하며 ③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기 위해서다.

7) 제자에게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삶(Being)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와 능력 있는 사역(Doing)이 뒤따라야 한다. 제자도에 있어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8)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더욱 힘써 따라야 할 것은 각각 무엇인가?

기도하기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결단한 것이나 개인과 공동체의 중요한 기도제목을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큐티를 눈으로 읽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큐티체조의 본문관찰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본문이해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컬러링 과정(표시하기)을 통해 ‘위로 하나님’, ‘아래로 인간’, ‘물어봐’ 질문에 답을 하고, 저널링 과정인(묵상하기, 이해하기) ‘느껴봐’를 통해 도전주신 말씀, 나의 상황, 기대하는 변화를 따라 소감을 쓰고, ‘옆으로 실천해’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을 따라 해보길 바랍니다.
큐티에 본문관찰은 분문이해와 삶으로 적용하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관찰질문에 답을 써보는 것은 큐티를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Quiet Time에 그림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더 될듯합니다.

MBTI의 E와 I에 관하여

유진 박의 크리스천 신혼 일기
골방남과 광장녀
박유진 – 카피라이터(Let it flow)

회사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을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곧 남편을 만날 생각에 그렇게 신이 났다. 남편이 늦는 날에도 하루 동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 생각에 기다리는 게 마냥 즐거웠다. 몇 시에 와? 출발했어? 지금 어느 역이야? 문자를 수없이 날리다 보면 문밖으로 발소리가 들린다.

“남펴어어언∼∼, 어서 와!!!!”

아침에 보고 밤에 봐도 또 반가운 우리는 신혼부부. 들어오자마자 오늘 하루 수고를 치하하는 뜨거운 포옹을 날린다. 저녁 뭐 먹었어? 올 때 지하철에서 앉아 왔어? 어디서부터 앉아 왔어?! 나 지하철에서 누구 만났는지 알아?!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다.
그런데 빨간 미니 소파에 널부러지는 남편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저기, 있잖아, 나, 잠깐만 쉴게.”

“……어? 그럼 그럼, 쉬어야지. 뭐 마실래? 주스 줄까??

음료수를 내밀다 보니까, 잠깐, 뭔가 반가움의 온도가 다르다는 생각에 뾰로퉁해진다. “뭐야, 내가 안 반가워?!” 남편, 한참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연다.

“내가 사실은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 그래서 너를 충분히 반가워해줄 수가 없어…”

뭬야아앗! 뭐시라? 아니 반가워해주는 것에 무슨 에너지가 필요하다구? 아니 내가 꽃가루를 뿌리랬나, 현수막을 걸랬나, 그, 그냥 반가워하는 게… 힘들어? 우리 신혼인데?!!! 나, 이 결혼…잘못한 거야? 마음이 식었어? 나 사랑한다고 한 거 다 거짓이었어?!!!

1초 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이야기한다. “아니, 나는 네가 반갑지. 그런데 충분히 그 마음만큼 반가워해 줄 에너지가 없다구. 생각해봐, 나는 저녁 내내 모임에 회의에 사람들 계속 만나다가 지하철에서도 계속 사람들 많은 데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에너지가 다 바닥나 있는 상태라구. 그런데 너는 에너지도 많은 애가 하루 동안 있었던 얘기를 너무 하고 싶어 하잖아. 그걸 내가 충분히 받아주려면 잠깐 다시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 극 I성향(MBTI)이잖아.”

같은 공동체에서 섬기면서 익히 알았던 바, 우리는 극단의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진 사람끼리의 만남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광장녀, 그는 골방남. 연애 때도 남의 결혼식에만 가면 그날은 꼭 다퉜는데,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을 만나는 나는 에너지가 충천해서 식장과 피로연장 곳곳을 날아다니는 반면, 그는 곧 그 광장의 에너지에 모든 힘을 빼앗기고 비실비실 구석탱이 화환들 옆에 앉아서 “빨리 가자.. 빨리 가자..” 경을 외우면서, 갈 생각이 전혀 없는 나의 종횡무진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곤 했다.

“그,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다행히도 기질 차이에 대한 선이해 덕에 일단 대화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남편은 으흠∼하더니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뭐든 일단 말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나로서는 또 답답∼해지는 순간.
하긴 이 남자, 결혼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었을 때, 그렇게 말했었지.

“혼자 있는 공간이 없어서 힘들어…”

우리 신혼집은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그날 이후,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남편이 먼저 들어온 날은 혼자 쉴 시간이 있으니 상관이 없었고,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그가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15분 동안 “왔어?” 이외의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 충전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침묵의 15분이 지나면 다시 뜨거운 재회의 포옹부터 시작하는 거다. 수고했어!! 오늘 별 일 없었어?! 내가, 내가 오늘은!!! 나로서는 기다려온 시간을 15분 유예함으로써 기다리던 반응 - 충분히 마음껏 반가워하는 - 을 얻으니 크게 손해도 아니었다. 잠깐씩 그의 조용한, 혼자만의 충전시간을 지켜주는 것으로 우리의 알콩달콩 신혼라이프는 다시 돌아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신혼의 가나안에도 광장과 골방의 큰 강은 존재했다. 그때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 강을 건넜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