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며,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에 영생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47-59
한글본문.
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영어본문.
47 I tell you the truth, he who believes has everlasting life. 48 I am the bread of life. 49 Your forefathers ate the manna in the desert, yet they died. 50 But here is the bread that comes down from heaven, which a man may eat and not die. 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will live forever. This bread is my flesh, which I will give for the life of the world.” 52 Then the Jews began to argue sharply among themselves, “How can this man give us his flesh to eat?” 53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 54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55 For my flesh is real food and my blood is real drink. 56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remains in me, and I in him. 57 Just as the living Father sent me and I live because of the Father, 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live because of me. 58 This is th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Your forefathers ate manna and died, but he who feeds on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59 He said this while teaching in the synagogue in Capernaum.

도움말.
참된 양식, 참된 음료(55절). ‘참된’이란 의미는 만나와 같은 물질적인 양식과 비교되는 완전한 은혜의 실체이며 영원한 효과를 가진 양식임을 뜻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의 특성은 무엇인가(51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56절)?
? 물어봐. 광야의 만나와 생명의 떡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49-50, 58절)?
! 느껴봐. 나는 예수님께만 참된 양식과 음료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영생의 양식과 음료를 더욱 풍족히 먹고 마시기 위해 좀 더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인가?

Meditation. 먹고 마셔야 할 참된 양식과 음료
‘아멘’이 네 번(47, 53절)이나 쓰인 문맥이다. 그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문맥의 무게만큼이나 내용도 무겁기 그지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는 논지(51절)를 발전시켜, 자신의 살이 영생할 수 있는 참된 양식이며, 그 피는 영생하게 하는 참된 음료라고 천명하신다(55절). 그리고 영생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역설하신다(54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인해 예수님과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되며(56절),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 역동하기 때문이다(53절).
주님의 살과 피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점점이 방울방울 찢기고 흘러내렸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주님을 우러를 때 그 살과 피가 “믿는 자”(47절) 속에서 생명이 되어 역사한다(53절). 영생의 삶을 지금 여기서 살게 하며 마지막 날에도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한다. 당신은 오늘도 그 십자가 언덕에 오르고 있는가? 그 언덕에 오르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늘 감사와 기쁨을 강요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 함께 울어 주고 함께 아파할 때만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평생 자녀와 가족을 가슴에 묻고 죽을 때까지 상처를 견디어 내며 살아야 할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민규 필자 주

I.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에는 긍정의 강요가 넘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승리하는 삶일까? 예수 믿으면 내면의 아픔은 모두 기쁨으로 바뀌어야 하나? 믿으면 실패를 느끼는 것도 좌절감이나 우울한 감정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참된 기독교인이라도 죽을 때까지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다만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런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의 안식을 누릴 기회들이 있을 뿐이다. 상처와 고통 그리고 기쁨과 평화란 두 손님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적으로 오거니 가거니 하는 삶, 그래서 견딜 만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상처는 잠시 잊거나 덮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요즘 신앙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상처와 고통, 슬픔을 넘어서 늘 기뻐해야 한다는 강요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일처럼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학대한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혹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기 때문이란다.

II. 몸글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초청이지 강요가 아니다. 사실 슬플 땐 울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볼 때는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반응이다. 이는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깊은 영성을 지닌 기독교인의 자세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목석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메마르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다. 성경을 보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감정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조건 부정적이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는 세상에 사는 동안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세상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런 예들을 살펴보자.

1.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

1) 건강한 염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 사이엔 염려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염려는 누구나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염려 자체가 항상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선한 염려도 있고 나쁜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염려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한 염려라면 부정적이지만 이웃 사랑과 섬김의 차원의 지혜로운 염려라면 영성의 일부가 된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하고 의로운 염려를 하라고 요구하신다. 많은 이가 겪는 지저분하고 해로운 염려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건강한 염려가 있기에 우리는 부주의한 사고도 면할 수 있고 어떤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긍정적인 염려에 관한 바울의 예를 보자. 고후 11:28을 보라! 바울은 그를 짓누르는 선한 근심을 토로한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오직 그분에게 맡기고 나는 편히 쉬며 기뻐하리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모습은 “신앙 없음”, “믿지 못함”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염려하듯이 말이다.

2) 건강한 상심과 슬픔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거룩한 상심과 슬픔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들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심히 슬퍼하셨다. 사도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을 초월한 도인처럼 초연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몹시 상심하며 그들을 위해 많이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고후 2:4 새번역). 그는 “난 속상하지 않아!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신앙으로 하나님께 맡기니 내 마음은 늘 편하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때론 속상하고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거룩한 표현일 수 있다.

3) 건강한 분노

예수님을 보라. 악한 자, 위선자들을 보셨을 때 세상을 달관한 이처럼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계셨나? 아니면 분노를 품으셨을까? 예수님은 나사로와 같은 가까운 이가 죽었을 때,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시며 슬피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3-35). 그저 연기하신 것이 아니셨다. 교리상으로 볼 때 죽은 자가 하나님 품으로 갔으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목회적 차원에서 위로한 것일까? 아니다. 지금 사랑하는 이가 당장 내 곁을 떠난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살기 좋은 나라로 이민하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도 슬피 운다. 딸을 좋은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아버지도 식장에서 슬피 운다. 성경은 애통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물론 무엇에 관한 애통인가가 중요하다. 사리사욕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세상을 꿈꾸는 애통일 때 복이 있다는 뜻이다.

4) 거룩한 불평

불평하는 것은 과연 항상 나쁜 것일까?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평뿐만 아니라 기쁨도 평화도 다 나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중심일 때 슬픔도 불평도 저주까지도 다 좋은 것이다. 나쁜 말을 하고 죽고 싶은 마음은 악한 것일까? 욥도 하나님께 불평했고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욥 3:1-10). 물론 그의 거룩한(?) 친구들은 그의 이런 신앙 없는 행위를 꾸짖었다.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불평했다.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다. 위선으로 우리는 자신을 학대하고 남에게 짐을 지운다.

그들은 악하고 속이 좁은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몰라서 불평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롭고 선한 이들이었기에 세상에 대해 불평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그분의 능력을 믿어서 하나님께 아픔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웃들과 피조물의 고통에 함께 참여했다. 마치 우리의 연약하고 고통스러움에 참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말이다. 제발,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그들의 눈물에 함께 울어 주고 고통에 함께 아파할 때만 그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고 늘 감사해야 할까? 정말 짜증 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받아들이고 감사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 분노하는 이들이 결국 더 크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전도연)가 그런 예일 것이다. 유괴범에 의해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가짜 용서와 감사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다가 결국 터져 버린다. 강요된 긍정은 결코 힐링의 힘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참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자신의 좌절과 한을 표출하셨다.

2. 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마음이 늘 평안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성령이 충만한 이는 늘 마음이 평안하고 초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는 성경으로 본다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하다. 몸을 가지고 사는 한, 그리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삶에는 눈물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성경은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눈물도 아픔도 사라지고, 연약함을 더는 체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상태는 오직 부활 이후의 복이다. 지금은 아직 아니다. 이미 천국이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크고 작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늘 부분적으로만 주님의 생명과 평온을 체험할 뿐이다. 오히려 믿는 이들도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남들처럼 다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거하기 때문이다.

3. 사역자라고 연약함과 고통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 후의 현실이다.

1)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런 일이 있는데 괴로워하지도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기뻐 찬양하는 것이 높은 영성일까? 난 솔직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때론 나도 기도 가운데 충만을 체험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해도 그렇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내가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씀을 크게 오해한 것이었다. 이는 중요한 과정이 생략된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난 내 내면의 슬픔으로부터 도망하여 주님의 기쁨을 찾았다. 그러나. 진짜 기쁨이 넘칠 수 있으려면 내 연약함을 다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세상엔 별 인간 없다. 물론 영적으로 충만하면 힘든 일에 대한 극복이 빨라진다. 쉽게 과거를 털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자 강박관념을 가질 때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집착해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한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2)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도피일 뿐 바른 방식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가식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회복된 상태다. 순수함이 있는 아이에겐 조작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어른보다 건강하다. 아이처럼 슬플 때 진실하게 슬프고 아플 때 진실하게 그 아픔을 느껴라. 이웃이 슬플 때 그들과 함께 진실하게 슬퍼해 보자. 그때 우리에겐 힐링이 일어난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 안에 스며드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이 방식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라.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울어 주라.

3)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때 아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내 연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하는 그릇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던 중 바울은 질병을 앓았다. 하도 사역의 방해가 되어서 그가 이를 사탄의 하수인 같은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그가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성령님께서 함께하셔도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약함을 체험한다. 피할 길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롬 8:26).

4)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결코 염려와 속상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피하지 마라.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그럴수록 그런 감정을 잘 다스리고 극복이 빠르다.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더 아프다. 현실적으로 보면 영적인 사람일수록 사는 것이 더 힘들다. 사서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살면 힘든 일과 갈등도 더 많이 겪는 것이 정상이지, 어찌 가는 길이 늘 평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치고 평탄한 길 간 사람 없다. 진리의 길은 늘 모욕, 갈등, 핍박을 겪게 된다. 그래도 살 만하다. 왜? 주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나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는 긍정의 자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병이 드는 것 같다.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단한 사람은 없다. 믿음이 있다 해도 내면은 다 약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를 믿어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평생 상처는 평생 상처로 남는다. 다만 끌어안고 주어진 삶을 살아 낼 능력을 배울 뿐이다. 체면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 중에도 마음이 아픈 이들이 주변에 많다.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자. 외롭고 힘들 땐 솔직하게 힘들다고 말하자. 그리고 약함을 고백하는 이의 손을 잡아 주자. 우리 모두 자신의 약함 가운에 주변의 위로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강함을 체험해 보자.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나의 약함을 기뻐한다고 말한 바울의 의미는 자신의 연약함에서 도피하여 강함을 체험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만큼 그분의 강함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글쓴이,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성서신학 교수,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저자
<뉴스엔조이 2015.04.10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6. QT큐티체조. 요한복음 6장.

간단설명.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을 행하려 이 땅에 보낸 하늘의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린다. 예수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37-46
한글본문.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영어본문.
37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will come to me, and whoever comes to me I will never drive away. 38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will but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39 And this is the will of him who sent me, that I shall lose none of all that he has given me, but raise them up at the last day. 40 For my Father’s will is that everyone who looks to the Son and believes in him shall have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41 At this the Jews began to grumble about him because he said, “I am th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42 They said, “Is this not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can he now say, ‘I came down from heaven’?” 43 “Stop grumbling among yourselves,” Jesus answered. 44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the Father who sent me draws him,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45 It is written in the Prophets: ‘They will all be taught by God.’ Everyone who listens to the Father and learns from him comes to me. 46 No one has seen the Father except the one who is from God; only he has seen the Father.

도움말.
선지자의 글(45절). 이사야 54장 13절 내용을 가리킨다.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39-40절)?
⬇ 아래로 인간. 누가 예수님께 오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37절)?
? 물어봐. 생명의 떡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41절)?
! 느껴봐. 나는 주님과 달리 오히려 ‘내 뜻’을 행하는 데만 힘쓰고 있지는 않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오늘 내려놓아야 할 내 뜻은 무엇인가?

Meditation. 수군거림이 아니라 믿음으로
모든 일에는 뜻이 있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일에도 뜻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38, 39, 40절)이다. 예수님께 맡겨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39절). 예수님은 이 거룩한 뜻을 선포하시면서 자신에게 나아올 것(37, 44-45절)을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 초대 앞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수군거림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을 꼬투리잡고 서로 수군거리기만 한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군거림이 대신하고 있다(41절). 이에 예수님은 단호한 어조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꾸짖으시면서(43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사람들만 자신에게 올 것이며, 그들만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을 재천명하신다(44절).
하나님께 이끌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온 사람, 주님의 소유이며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사람에게 수군거림은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은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군거림으로 대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5.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무리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면서 만나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을 소개하고 그 떡이 바로 자신임을 밝히신다. 그리고 자신에게 올 때 결코 주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30-36
한글본문.
30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영어본문.
30 So they asked him, “What miraculous sign then will you give that we may see it and believe you? What will you do? 31 Our forefathers ate the manna in the desert; as it is written: ‘He gave them bread from heaven to eat.'” 32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it is not Moses who has given you the bread from heaven, but it is my Father who gives you the true bread from heaven. 33 For the bread of God is he who comes down from heaven and gives life to the world.” 34 “Sir,” they said, “from now on give us this bread.” 35 Then Jesus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he who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36 But as I told you, you have seen me and still you do not believe.

도움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 예수님이 자신을 ‘내가 …이다’라는 진술로 계시하신 것들 중 첫 번째 내용이다(8:12, 10:7, 9, 11, 14, 11:25, 14:6, 15:1, 5).
생명의 떡(35절). 생명을 주는 떡, 혹은 살리는 떡이라는 의미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35a)?
⬇ 아래로 인간.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어떤 복을 누리는가(35b)?
? 물어봐. 하나님이 주시는 떡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33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을 통해 생명의 떡을 늘 얻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생명의 떡을 더욱 풍성히 누리기 위해 고쳐야 할 습관은 무엇인가?

Meditation. 표적과 일이 지향하는 꼭짓점
무리들이 예수님께 ‘표적과 일’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30절). 그들은 그 선례로 모세를 통해서 공급된 만나를 말한다(31절).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기억을 바로잡으시며, 그 만나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확증하신다(32절). 그리고 그들이 던져놓은 논점 위에 “참 떡”론을 세우신다(32-33절).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임을 밝히시고(35절) 그들을 향해 일갈하신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절). 예수님은 스스로 모든 표적들과 기사들이 지향하는 꼭짓점이시며, 하늘의 표적과 기사 그 자체이심을 선언하신다. 그들의 시선이 닿아야 할 궁극의 좌표가 예수님 자신임을 역설하신다.
믿음은 무엇을 바라고 보는가의 문제다(히 11:1). ‘표적과 일’이 아니라 그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이 지향하는 그 꼭짓점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 당신의 믿음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4. 주일에는 읽는 QT. 새해에 꿈꾸는 생활 4.

간단설명.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한다. - 존 웨슬리

성경본문. 마태복음 26:40-41
한글본문.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영어본문.
40 Then he returned to his disciples and found them sleeping. “Could you men not keep watch with me for one hour?” he asked Peter. 41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Meditation. 생활 기도
대학부 시절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수레바퀴에 비유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Lordship)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전도를 네 축으로 삼아 순종하는 삶을 살아 나가면 균형 잡힌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수레가 안 다니는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타이어가 제대로 굴러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재밌는 비유였습니다.

함께 배운 친구들과 나누다 보면 이 네 축 가운데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제 경우 비교적 잘한 건 말씀과 전도이고, 조금 취약했던 건 기도와 교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는 오랫동안 아킬레스건처럼 제 성장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잘만 기도하고, 기도 시간을 즐기는 것 같은데, 제겐 참 힘들고 뜻대로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부와 청년부를 보내고, 장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장 취약한 기초 삶(Basic Life)은 아마도 기도일 것 같은데, 분발을 다짐하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개선을 추구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영역이 됐습니다. 마치 깨어 기도하라던 주님의 거듭되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기도는커녕 잠에만 골몰하던 제자들과 방불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상 기도하지 않는 삶을 언제까지 지속할 순 없습니다. 이 일 저 일에 마음을 뺏기고, 시간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 하며 미루기만 하고, 모처럼 기도를 하다가도 급한 일이 생각나 몇 분 만에 일어선다면 주님의 안타까워하시는 호소와 제발 그러지 말라는 호령을 듣게 될 것 같습니다. 매일 펼쳐지는 시간 가운데 언제가 가장 기도하기 좋은지를 살펴서 꾸준히 기도의 무릎을 꿇는 한 해가 되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기도
“기도하기 어려워하는 저희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주님을 부르고 만나며 사귀는 즐거움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6-01-2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빠지지만,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안전하게 상륙한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하신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6:16-29
한글본문.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영어본문.
16 When evening came, his disciples went down to the lake, 17 where they got into a boat and set off across the lake for Capernaum. By now it was dark, and Jesus had not yet joined them. 18 A strong wind was blowing and the waters grew rough. 19 When they had rowed three or three and a half miles, they saw Jesus approaching the boat, walking on the water; and they were terrified. 20 But he said to them, “It is I; don’t be afraid.” 21 Then they were willing to take him into the boat, and immediately the boat reached the shore where they were heading. 22 The next day the crowd that had stayed on the opposite shore of the lake realized that only one boat had been there, and that Jesus had not entered it with his disciples, but that they had gone away alone. 23 Then some boats from Tiberias landed near the place where the people had eaten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24 Once the crowd realized that neither Jesus nor his disciples were there, they got into the boats and went to Capernaum in search of Jesus. 25 When they found him on the other side of the lake, they asked him, “Rabbi, when did you get here?” 26 Jesus answered, “I tell you the truth, you are looking for me, not because you saw miraculous signs but because you ate the loaves and had your fill. 27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 28 Then they asked him, “What must we do to do the works God requires?” 29 Jesus answered, “The work of God is th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도움말.
내니(20절). 헬라어 ‘에고 에이미’로서 예수님 자신의 임재 사실만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한 내용(출 3:14)과 일맥상통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풍랑 이는 밤바다에서 고난당하는 제자들을 만나 뭐라고 말씀하시는가(20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기 전후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19-21절)?
? 물어봐. 무리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왜 다른 답변을 하셨을까(25-26절)?
! 느껴봐. ‘나다’(It is I, 20절)라고 말씀하시며 다가오시는 주님을 나는 매 순간 만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극복해야 할 풍랑 같은 상황은 무엇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Meditation.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
가버나움으로 가던 제자들의 뱃길에 폭풍이 인다(17-18절). 조악한 고기잡이배 안에서 패대기쳐지는 제자들 중에서 어제 오병이어의 표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두려워할 따름이다(19절). 그러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자 배는 가버나움에 순적히 당도한다(20-21절). 이튿날, 바다 건너 가버나움에 이른 무리들이 묻는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25절). 그러나 예수님은 답을 피하신다. 제자들만이 볼 수 있는 표적이 있고, 제자도의 순종 중에만 알 수 있는 구별된 섭리가 있는 법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따라 온 이유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지적하시면서(26절),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할 것을 명하신다(27절). 그 일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29절).
배에서도 가버나움에서도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지만, 빼놓지 않고 꼭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믿고 영접해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당신은 지금 이 거룩하고 복된 일을 행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일상기도‬ _ 모자람 가운데 드리는 기도

“완전하신 하나님, 당신은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충만이시며 그 어떠한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넉넉한 당신의 품 안에서, 다함없는 당신의 부요함 안에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며 풍성히 채우시는 주님, 우리가 충만한 당신의 사랑을 알고 충만 그 자체이신 당신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오직 당신 안에 거하는 즐거움으로 매일매일을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하나님 아버지,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넉넉히 채워지기 보다 모자람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거나 꼭 필요한 것을 구입하지 못할 때 우리는 모자람을 뼈저리게 느끼고 힘겨워하기도 합니다. 필요한 재능이 부족하거나 힘이 없어서 한없이 자신의 모자람을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쇠약하여져서 자신의 모자람에 직면하게 될 때도 있고, 영적 성장을 추구하지만 늘 실패하고 모자란 자신의 모습에 부딪쳐서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토록 모자람이란 우리 일상에서 떨쳐버리고 싶어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모자람의 위로’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야기들 속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의 삶 속에서도 모자람이 있었고 연약함과 실패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신 당신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자람 가운데 살면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자람을 넉넉히 채워주실 수 있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모자람 속에서 인내와 겸손을 배우길 원합니다. 모자람 가운데 나의 힘과 자원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능력과 돌보심으로 사는 축복받은 삶을 누릴 수 있음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모자람 가운데 자족하기를 원합니다. 모자람이 탐욕으로 자라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모자람 가운데 인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늘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생각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나눌 것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소서. 재정이 충분치 못하다고 하여 나눌 수 없다고 움켜쥐지 않게 하여 주시고, 더욱 더 주는 삶으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우리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즐거움과 넉넉함을 가지고 더욱 열매맺는 삶과 사역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믿음을 주시옵소서. 실패하고 실망하더라도 늘 새롭게 일으켜주시는 당신 안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아버지, 간구합니다. 모자람을 채우시는 당신은 또한 우리의 모자람을 공동체를 통해 채우심을 고백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모자란 재정과 재능과 힘과 시간과 연약함과 쇠함과 실패를 서로 채우는 참된 한 몸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세상의 모자람을 채워가기 위해 우리를 나누고 드릴 수 있는데까지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모자란 가운데 충만함을 경험하고 넘치는 충만함으로 당신의 나라를 채워가는 매일이길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일상사역연구소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