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성경적 죄의 정의: 웨슬리안 vs. 칼빈주의 —

죄를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주로 광의적으로 정의해 “완전한 의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비해, 웨슬리안들은 웨슬리의 정의를 따라 죄를 주로 협의적으로 정의해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정의는 신자가 이 세상 속에서 성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에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답하고, 웨슬리안은 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죄의 두 가지 정의 중 어느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페친 여러분께서 판단하실 수 있도록, 번역을 마치고 판권 계약 중에 있는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끝난 후 명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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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은 흔히 죄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모든 것, 또는 그 뜻에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곤 한다 … 이 관점은 완벽한 의를 요구하는 이상적인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그 정황이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유한한 피조물도 그러한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정의에서 도출되는 것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날마다 말과 생각과 행위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소위 죄의 “광의적” 정의에 기꺼이 동의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즉시 이 광의적 정의에 반대해 죄의 “협의적” 정의를 내리곤 했는데, 이 정의는 죄를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의 의도적으로 위반으로 이해한다. 이 정의는 존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The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쓴 유명한 구절 속에 등장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태만, (사람들이 부적절하게 표현하곤 하는) 결점, 판단과 실행에서의 실수, 다양한 약점들을 대속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면에서는 대속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런 것들이 적절한 의미의 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하기 쉬운 상태의 몸에서 부득이하게 흘러나오는 실수들과 모든 연약성은 사랑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에서의 죄는 아닙니다 … 죄라고 불러 마땅한 것 즉 율법을 알면서 고의로 범한 것만이 아니라, 부당히 죄로 불리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생각 없이 범한 것도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죽을 운명인 인간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무지와 잘못의 자연적 결과인 비고의적 위반을 배제하는 완전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가당착을 피하기 위해 “무죄적 완전(sinless perfection)”이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비고의적 위반을 피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웨슬리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죄의 “광의적” 정의보다 죄에 관한 그의 두 번째 통찰이 신약성경의 죄 개념에 더 부합함을 말하고 싶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윤리적 개념의 죄이지 법률적 개념의 죄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죄는 지식이나 규범 뿐만 아니라, 선택이나 동기에 관한 요소를 포함한다.

죄의 정의에 관한 이 모든 논의는 신자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문제로 넘어가면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죄의 율법적 또는 “광의적” 정의는 필연적으로 죄의 율법적 또는 “협의적” 정의를 그 속에 포함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중생한 사람, 그리고 특별히 성결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나은 판단의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것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가 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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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마흔 한 개의 구절 전체를 철저히 검토해 발견한 내용을 요약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간략한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죄의 법률적 정의는 간단히 말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다. 죄의 윤리적 정의는 웨슬리가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 서른 일곱 개의 구절 모두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임의로 다섯 구절을 선택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서에서 사례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 14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이런 해석은 이미 가련한 사람을 이전보다 훨씬 끔찍한 위치에 두는 해석임이 분명하다! 그가, 알려졌던 알려지지 않았든, 또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피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 주님의 요구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된다.

둘째, 로마서 6장 15절의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구절이 되고 만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신양성경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셋째, 바울 서신 중에서 또 한 구절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장 15절의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죄의 법률적 정의를 대입하면 “깨어 의를 행하고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는 구절이 된다.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그 언제라도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해석은 성경구절을 터무니없게 만들어버리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이 구절은 신약 시대의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말씀이 된다. “깨어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네 번째 사례는 히브리서 10장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인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소용 없을 것임을 경고하는 준엄한 말씀이다.

“짐짓”(willfully, KJV, 고의로, 일부러 – 역주)이라는 부사는 우리가 다루는 죄의 문제가 의지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어로서,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도해본다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고의로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죄의 윤리적 정의를 대입하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뜻이 된다. 이 해석은 준엄한 경고의 말씀을 보존하면서도, 신약성경 전체의 취지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해석은 타락한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현재 고의로, 알려진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유효하다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모두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원문은 의도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다는 의미의 분사 형태이기 때문에, 그런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진정한 회개로 범죄하기를 멈추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사로서 전적으로 충분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다룰 마지막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9절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여기서 죄와 관련해서 두 용어는 명사이고, 두 용어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문맥 속에서 의미상 조화를 이룬다.

먼저 죄의 법률적 정의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완벽한 행위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 기준에서 벗어났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절대적 의의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해석은 틀림없이 하나님 자녀의 수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히 모든 유한한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윤리적 정의로 돌아가, 죄에 사용된 동사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깨닫고나면, 우리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계시 전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였음이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하나님의 알려진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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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 지점에서 “그렇지만 죄의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무슨 차이를 가져오는가? 이런 논의는 그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로 논쟁을 벌이자는 것 아닌가? 인간의 연약성에서 비롯된 기억에서의 실수나 판단의 오류, 행동의 불완전성을 죄로 부르면 왜 안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내 대답은 삼중적이다. 첫째, H. 오톤 와일리(H. Orton Wiley)의 말로 표현하면, “죄가 아닌 것을 죄로 부르면, 실제로 범죄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 된다.” 죄의 이 “넓은” 또는 율법적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육체에 매인 인간이 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 받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죄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어떤 것도 죄로 만들지 않는 것과 다를바없다. 죄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만약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이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도 죄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그렇게 흔히 죄로 일컬어지는 것들과, 거짓말이나 도둑질이나 부도덕함 같은 진짜 죄들 사이에 아무런 질적 차이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종류의 죄를 향해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의식과 양심은 여기에 결정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약속을 잃어버린 것이나 약속을 깨드린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객관적 공정성이라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무지에 의해 사실을 잘못 진술한 것이든 거짓말에 의해 잘못 진술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약속된 것은 지켜지지 않았고, 또 진실이 아닌 것이 진술되었다.

그러나 주관적, 윤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약속을 잃어버린 경우와 잘 알지 못해 잘못된 진술을 한 경우 모두에는 후회는 하더라도,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죄는 아니다. 기억에서의 실수와 무지는 유감스러운 것이고,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정죄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양심은 언제나 죄의 본질은 의도와 동기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법의 실체적 또는 객관적인 면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선의로 실수하는 것을 허가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선택과 의도와 목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셋째, 이 구분이 지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 인간의 실수와 연약성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죄와 예리하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마 1:21). 그는 우리를 육적인 죄에서 씻어주신다(요일 1:7).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동정하시고 체휼하신다(히 4:15). 이는 한편에서는 주님께서 가지신 우리의 내적, 외적인 죄를 향한 태도와,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나약함에 대한 태도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책망하시고(요 16:8), 우리를 죄성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롬 8:2).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롬 8:26). 자범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죄성을 씻어주시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약성은 순간적 경험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전쟁터에서 매일 매일 직면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극복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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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글은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적 율법관을 적용함으로 웨슬리안들이 강조하는 성경적 성결론을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오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문 출처는 판권 계약이 완료된 후에 명기하겠습니다). 장기영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05082018.

복음을 왜곡시키는 14가지 방법 (by 하워드 스나이더) 장기영 박사(서울신대)

— 복음을 왜곡시키는 14가지 방법 (by 하워드 스나이더) —

1. 복음을 주로 로마서를 통해서만 설명하라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성경 전체를 공부하고 성경을 그 전체의 관점에서 해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는 완고한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고통을 당한다 (나의 글 “Misplacing Romans (로마서 잘못 읽기)”를 참고하라).

2.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라
성경은 사적이고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개인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많은 방법과 많은 비유를 통하여 모든 것의 화해를 가르친다 (엡1장, 골1장). 그리고 심판 역시 가르친다.

3. 하늘만 목적으로 삼으라
사람들은 “하늘에 가는 것”을 구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과 초대교회 신조들은 “하늘로 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 전체의 궁극적 구원에 초점을 두지, 우주적으로 땅과 하늘이 영원히 분리될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4.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시키라
이 방법은 교회에 “불법의 비밀”이 침범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표징 중 하나이다. 사탄은 단지 우리에게 아주 소수만 (그리고 주로 특별한 종류의 남성들만) “사역”으로 부르셨다고 납득시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교회의 유효한 능력을 90%나 감소시켜버린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라는 편견은 교회 안의 다른 어떤 편견보다 교회를 약화시킨다. 이 편견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성경적 교리와 성령의 은사들과 모든 성도들을 디아코니아(사역과 봉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소명을 지속적으로 파괴한다.

5. 경제와 정치 문제는 복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라
경제와 정치를 복음에서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제자도와 상관 없는 문제로 만드는 것은 비성경적 이원론이다. 복음은 경제적, 정치적 실체이며, 따라서 교회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경제와 정치가 복음의 빛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포괄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6. 공동체를 우선시하지 말라
신약성경 저자들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 그리스도의 몸,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또 서로에게 참여하는 공동체를 중시하였다. 공동체가 성경적 코이노니아로서의 나눔에 덜 진실할수록, 교리적 논쟁이 더 중시되고, 교회는 공동체가 아닌 다른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것이 내가 『왕의 공동체 (Community of the King)』 및 다른 책들에서 공동체를 주제로 많이 다루는 이유이다.

7. 구약을 무시하라
두 가지 가장 일반적인 실수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라고 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무시하는 것과, 신약이 구약의 모든 중요한 진리들에 영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 잘못된 통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 예로, “약속된 땅”은 “천국”이나 어떤 내적인 영적 체험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주 성경의 역사적 맥락이나 성경 자체의 의미와 전혀 동떨어진 “영적인 사실들”을 억지로 구약 속에서 찾으려 하게 된다.

8. 공의(justice)를 개인적 의(personal righteousness)로 제한하라
시가서, 예언서, 율법서, 지혜서로서 구약 성경은 끊임없이 공의와 개인적인 의를 동일한 종합적 실재의 양면으로 다룬다. 정의와 개인적인 의가 얼마나 자주 짝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둘이 성경에서 얼마나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는지 살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주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와 개인적인 의를 분리시켰다. 예를 들어, 의가 개인적 도덕성을 의미한다면, 정의는 하나님께서 대속이나 심판을 통해 직접 다루시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9. 중보기도를 경시하라
나는 성경에서 모세, 다윗, 선지자들, 욥,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모범 및 서신서들에서 기도에 대해 읽으면 읽을 수록, 나와 교회가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라는 중요한 사역을 경시해왔음을 확신하게 된다. 기도의 신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 백성들의 지속적인 중보기도는, 우리 자신이 당면한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나라와 백성과 종교들 간의 관계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주 그렇게 해왔다. 중보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중요한 방편이다.

10. 제자는 되지 말고 신자만 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신약은 “신자들”이라는 말을 아주 드물게 사용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형제들” 또는 “그들” 같은 말 대신에 “신자들”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적 용어들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수가 아닌 제자들의 수, 그리고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다.

11.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체하게 만들라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주권, 사랑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마태복음에서의 “하늘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달리 표현한 것임을 알았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와 분리될 수도 없는 교회와의 신비한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고, 천상적이면서 지상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순간적면서 점진적이고, 내적이면서 외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12. 신앙을 단지 삶의 작은 부분만이 되게 하라
우리는 일상적 삶과 신앙적 삶과 구분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작은 일부분이 되도록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 작은 일부분마저도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감당하라. 성경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항상 그러하다. 성경적으로 보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사랑은 믿음으로 가능케 되어서, 소망 즉 하나님께서 창조 전체를 온전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확신에 의해 힘을 얻는다.

13. 창세기 9장을 무시하라
“언약” 혹은 “계약” 신학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신학들은 거의 언제나 (창3:15절을 잠깐 언급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부터 다룬다. 하지만, 성경에서 명백한 첫 번째 언약은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세상과의 언약”(창9:13)을 맺으시는 데서 발견된다. 분명히 반복되고 강조되는 점은,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 및 모든 살아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과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만약 구원에 대한 이해가 창세기 3장에서 12장으로 바로 뛰어넘어버린다면, 우리는 창조 질서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놓치게 될 것이고, 성경 속에 있는 다른 모든 가르침도 왜곡하게 될 것이다.

14. 제자도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돌봄과 상관없는 것이 되게 하라
우리가 창조 질서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성경이 약속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 축소시키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손해이다. 우리는 교회를 메마르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지나치게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되고, 선교의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제자도와 창조의 돌봄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교회는 인내와 겸손 속에서 “견고한 진을 파할 정도로” (고후10:4) 강해질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초점을 옮겨 복음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면 문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뒤튼다, 왜곡한다, 구부린다, 침식한다, 중화한다, 약하게 한다, 취소한다, 꺾어버린다 등 어떤 동사를 사용하든, 문제는 지속될 것이고, 주의 깊게 성경에 기초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제자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 속에서 제자들이 복음 왜곡의 문제와 분투했음을 본다. 그러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할 때까지”(사11:9) 하나님의 성령은 여전히 능력 있게 그리고 신기하게 일하시고, 여전히 약속을 성취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모든 진리” (요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출처: http://howardsnyder.seedbed.com/…/14-favorite-ways-to-twis…/
2014년 5월 6일에 장기영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8. QT큐티체조. 사사기 10:10-18.

간단설명. 이스라엘은 고난 가운데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우상숭배로 인해 그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 사이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왔다.

성경본문. 사사기 10:10-18
한글본문.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영어본문.
9.The Ammonites also crossed the Jordan to fight against Judah, Benjamin and the house of Ephraim; and Israel was in great distress. 10.Then the Israelites cried out to the LORD, “We have sinned against you, forsaking our God and serving the Baals.” 11.The LORD replied, “When the Egyptians, the Amorites, the Ammonites, the Philistines, 12.the Sidonians, the Amalekites and the Maonites oppressed you and you cried to me for help, did I not save you from their hands? 13.But you have forsaken me and served other gods, so I will no longer save you. 14.Go and cry out to the gods you have chosen. Let them save you when you are in trouble!” 15.But the Israelites said to the LORD, “We have sinned. Do with us whatever you think best, but please rescue us now.” 16.Then they got rid of the foreign gods among them and served the LORD. And he could bear Israel’s misery no longer. 17.When the Ammonites were called to arms and camped in Gilead, the Israelites assembled and camped at Mizpah. 18.The leaders of the people of Gilead said to each other, “Whoever will launch the attack against the Ammonites will be the head of all those living in Gilead.”

도움말.
근심하시니라(16절).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해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모여서(17절). 모이다(히. 짜아크)는 동사는 ‘군대를 소집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는가(16절)?
⬇ 아래로 인간.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가운데 보인 반응은 무엇인가(10, 15절)?
? 물어봐.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셨는가(12-13절)?
! 느껴봐.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절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 옆으로 실천해. 최근 들어 실수를 통해 깊이 배웠던 점은 무엇이며, 이를 잊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Meditation.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식 구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구원이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처럼 여겼다. 아모리 족속의 압제로 18년간이나 고통을 당하자 이스라엘은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범죄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했다(10절).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고 응답하신다(12절).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응답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그들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하시고 근심하신다(16절). 하지만 변화 없는 기계적인 회개만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12-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진정 변화되길 원하셨다.
나는 어떠한가? 위기와 고난 가운데 깨달은 것을 소중히 지켜나가고 있는가? 반복적인 실수를 줄여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7. QT큐티체조. 사사기 10:1-9.

간단설명. 아비멜렉의 죽음과 소사사인 돌라와 야일의 통치 이후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고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블레셋과 암몬 자손을 통해 이들을 억압하셨다.

성경본문. 사사기 10:1-9
한글본문.
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영어본문.
1.After the time of Abimelech a man of Issachar, Tola son of Puah, the son of Dodo, rose to save Israel. He lived in Shamir, in the hill country of Ephraim. 2.He led Israel twenty-three years; then he died, and was buried in Shamir. 3.He was followed by Jair of Gilead, who led Israel twenty-two years. 4.He had thirty sons, who rode thirty donkeys. They controlled thirty towns in Gilead, which to this day are called Havvoth Jair. 5.When Jair died, he was buried in Kamon. 6.Again the Israelites did evil in the eyes of the LORD. They served the Baals and the Ashtoreths, and the gods of Aram, the gods of Sidon, the gods of Moab, the gods of the Ammonites and the gods of the Philistines. And because the Israelites forsook the LORD and no longer served him, 7.he became angry with them. He sold them into the hands of the Philistines and the Ammonites, 8.who that year shattered and crushed them. For eighteen years they oppressed all the Israelites on the east side of the Jordan in Gilead, the land of the Amorites. 9.The Ammonites also crossed the Jordan to fight against Judah, Benjamin and the house of Ephraim; and Israel was in great distress.

도움말.
돌라(1절). 벌레, 지렁이라는 뜻이다.
야일(3절). ‘여호와께서 빛을 발하신다’는 뜻이다.
어린 나귀(4절). 히브리어 ‘아이르’는 ‘젊고 활기찬 수나귀’를 말하는 것으로 나귀 중에서 가장 좋은 나귀를 가리킨다.
하봇야일(4절). 야일의 촌락들이라는 뜻이다.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는 히브리 동사 ‘짜라르’에 해당하며 억압하다, 묶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표현은 ‘심하게 압제했다’는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나는가(8-9절)?
⬇ 아래로 인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6절)?
? 물어봐. 나는 겸손하다고 하지만 왕처럼 주인 같은 행세를 하려 하진 않는가(4절)?
! 느껴봐. 내가 머물렀던 자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남아있는가, 아니면 좋지 못한 냄새가 나는가?
➡ 옆으로 실천해. 후임자나 다음 세대에 선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는가?

Meditation. 나는 어떤 기억을 남기는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는 떠난 이후에 어떤 영향력을 남겼는가로 평가된다. 사사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했지만(1절), ‘야일’은 이스라엘 가운데 왕처럼 행했다. 아들이 30명이나 된다는 것은 여러 아내를 두었다는 것이고, 이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타고 다니며 성읍 30개를 가졌다는 것은 최고급 승용차와 함께 다스릴 성읍을 하사했음을 암시한다. 꼭 기드온 같아 보이는데, 왕이 아니라고 했지만 하고 다닌 모습은 영락없는 왕이었다. 야일이 죽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에 있던 여러 신들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18년간 심한 압제 가운데 두셨다. 하나님만 드러나게 해야 할 사사가 사명을 망각하고 왕처럼 다스리고 나면 꼭 이스라엘에 심각한 영적 후유증이 나타난다.
내가 머문 자리를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더욱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감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만들진 않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6. 주일에는 읽는 QT.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10.

간단설명. 물 따르기, 설거지, 구두 수선, 사도의 일, 이 모든 것은 하나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 윌리엄 틴데일

성경본문. 창세기 31:38-41
한글본문.
38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골로새서 3:22-24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Meditation. 일(Work) : 라반의 이야기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곱게 자라던 야곱은 최소 20년을 집을 떠나 타지에서 노동자로 살았고, 최소임금은커녕 의식주만 제공 받으면서 밤낮으로 고된 축산업에 종사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가 야곱이 노예같이 일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주목할 만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자신의 일을 묘사하는가.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끝도 없고, 보수가 적고, 심신이 피로하고, 그저 힘들기만 하다.”(151면)

성경에서 거의 최초로 등장하는 노동자였던 야곱은 장인이자 고용주였던 외삼촌에게서 독립을 앞두고 줄곧 어떤 태도로 일해 왔고, 어떻게 수고와 보람을 느꼈는지 피력하고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는 이 챕터의 소제목들에서 야곱이 사랑으로 일했고, 믿음으로 일했고, 소망으로 일했다는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일의 신학(Work & Faith)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노동은 고되지만 않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하나님과 이웃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길이었습니다.

일터에 이미 진입했든지, 앞으로 진입할 계획이든지, 아니면 라반처럼 사업체를 운영하는 고용주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일의 신학을 모색하고 잘 구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터를 구하는 일부터 힘든 시대를 살고 있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를 새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에게 맡기신 어떤 재능이라도 잘 활용하도록 가르쳐주시고, 인내와 열심으로 우리의 시간을 잘 사용하는 능력을 주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5. QT큐티체조. 사사기 9:46-57.

간단설명. 아비멜렉은 세겜 성읍의 남은 사람들이 피신한 보루를 불태우고 이어 북동쪽에 있는 데베스까지 점령하려다가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두개골이 깨져 죽는다.

성경본문. 사사기 9:46-57
한글본문.
46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7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8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9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50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6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영어본문.
46.On hearing this, the citizens in the tower of Shechem went into the stronghold of the temple of El-Berith. 47.When Abimelech heard that they had assembled there, 48.he and all his men went up Mount Zalmon. He took an ax and cut off some branches, which he lifted to his shoulders. He ordered the men with him, “Quick! Do what you have seen me do!” 49.So all the men cut branches and followed Abimelech. They piled them against the stronghold and set it on fire over the people inside. So all the people in the tower of Shechem, about a thousand men and women, also died. 50.Next Abimelech went to Thebez and besieged it and captured it. 51.Inside the city, however, was a strong tower, to which all the men and women–all the people of the city–fled. They locked themselves in and climbed up on the tower roof. 52.Abimelech went to the tower and stormed it. But as he approached the entrance to the tower to set it on fire, 53.a woman dropped an upper millstone on his head and cracked his skull. 54.Hurriedly he called to his armor-bearer, “Draw your sword and kill me, so that they can’t say, ‘A woman killed him.’ ” So his servant ran him through, and he died. 55.When the Israelites saw that Abimelech was dead, they went home. 56.Thus God repaid the wickedness that Abimelech had done to his father by murdering his seventy brothers. 57.God also made the men of Shechem pay for all their wickedness. The curse of Jotham son of Jerub-Baal came on them.

도움말.
보루(46절). 히브리어 ‘쩨리아흐’는 숨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지하실 또는 동굴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엘브릿 신전 지하에 만들어놓은 피난처를 의미한다.
데베스(50절). 세겜의 위성도시로 북동쪽으로 16km 정도 떨어져 있다.
맷돌(53절). 곡식을 가는 데 쓰는 둥글넓적한 돌이다.
무기를 든 청년(54절). 장수를 위한 전쟁수행 보조원으로 장수를 위해 다양한 무기를 운반하고 장수가 넘어뜨린 적을 죽이는 일도 수행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어떻게 다루셨는가(56-57절)?
⬇ 아래로 인간. 아비멜렉의 최후는 어떠했는가(53-54절)?
? 물어봐. 아비멜렉이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칼로 죽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54절)?
! 느껴봐. 열심히 달려갔지만 결국 허망하게 그만두게 된 적은 없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지금 내가 열정을 쏟고 있는 일이 열매 없이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Meditation. 가치의 진가는 최후에 드러난다.
아비멜렉은 왕처럼 행세하려 했지만, 불량잡배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세겜 성읍을 허물고 여세를 몰아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피한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아버지 기드온이 미디안을 공격할 때 했던 영웅적 행위를 흉내내지만(7:17), 무자비한 살인자의 행동에 불과했다. 그는 백성들을 지하 피난처에 몰아넣어 불로 태워 몰살시켰다(49절). 또 아무런 대의명분 없이 인근에 있는 위성도시 데베스까지 점령하고는 그들 역시 불살라 죽이려 했다(52절). 하지만 이러한 무모한 열정을 하나님은 심판하셨다. 망대 위의 여인이 던진 맷돌이 아비멜렉의 머리에 정확하게 맞아 두개골을 깨뜨렸다(53절). 그가 죽자 그동안 아비멜렉 주변으로 모였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55절).
하나님은 우리가 도모하는 일들의 가치를 최후에 드러나게 하신다. 그때까지는 어렵고 괴로운 일들이 많다. 나는 최후승리를 확신하는가? 내가 인내하며 몰두하는 이 일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8-05-04. QT큐티체조. 사사기 9:30-45.

간단설명. 아비멜렉을 조롱하는 가알의 말을 들은 스불은 이 사실을 조용히 아비멜렉에게 알려 공격을 감행하게 한다. 이에 가알은 내어 쫓기고 세겜 백성들은 죽임을 당한다.

성경본문. 사사기 9:30-45
한글본문.
30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1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2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3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 34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5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6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7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8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9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40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1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영어본문.
30.When Zebul the governor of the city heard what Gaal son of Ebed said, he was very angry. 31.Under cover he sent messengers to Abimelech, saying, “Gaal son of Ebed and his brothers have come to Shechem and are stirring up the city against you. 32.Now then, during the night you and your men should come and lie in wait in the fields. 33.In the morning at sunrise, advance against the city. When Gaal and his men come out against you, do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34.So Abimelech and all his troops set out by night and took up concealed positions near Shechem in four companies. 35.Now Gaal son of Ebed had gone out and was standing at the entrance to the city gate just as Abimelech and his soldiers came out from their hiding place. 36.When Gaal saw them, he said to Zebul, “Look, people are coming down from the tops of the mountains!” Zebul replied, “You mistake the shadows of the mountains for men.” 37.But Gaal spoke up again: “Look, people are coming down from the center of the land, and a company is coming from the direction of the soothsayers’ tree.” 38.Then Zebul said to him, “Where is your big talk now, you who said, ‘Who is Abimelech that we should be subject to him?’ Aren’t these the men you ridiculed? Go out and fight them!” 39.So Gaal led out the citizens of Shechem and fought Abimelech. 40.Abimelech chased him, and many fell wounded in the flight–all the way to the entrance to the gate. 41.Abimelech stayed in Arumah, and Zebul drove Gaal and his brothers out of Shechem. 42.The next day the people of Shechem went out to the fields, and this was reported to Abimelech. 43.So he took his men, divided them into three companies and set an ambush in the fields. When he saw the people coming out of the city, he rose to attack them. 44.Abimelech and the companies with him rushed forward to a position at the entrance to the city gate. Then two companies rushed upon those in the fields and struck them down. 45.All that day Abimelech pressed his attack against the city until he had captured it and killed its people. Then he destroyed the city and scattered salt over it.

도움말.
스불(30절). ‘거주’라는 뜻을 가진 세겜의 방백(ruler) 즉 지도자로 아비멜렉의 신복이다(28절).
매복(32절). 상대편의 동태를 살피거나 상대편을 불시에 습격하기 위해 적당한 곳에 몰래 숨어 있는 행위를 말한다.
청하노니(38절). 매우 강력한 청유형으로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의 간곡한 부탁을 의미한다.
아루마(41절). 세겜에서 남동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우뚝 솟은’이란 의미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성읍 세겜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가(45절)?
⬇ 아래로 인간. 스불은 가알의 오만한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가(30-33절)?
? 물어봐. 가알이 백성이 산에서 침입한다고 외쳐도 스불이 헛것을 본다고 태연하게 둘러대는 이유는 무엇인가(36절)?
! 느껴봐. 나의 비판적이고 교만한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나를 곤란하게 한 적은 없는가?
➡ 옆으로 실천해.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마음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을까?

Meditation. 프린스 킬러의 귀환
가알은 호기롭고 오만하게 세겜 백성들 앞에서 아비멜렉을 멸시하고 도전장을 내미는데(29절), 아비멜렉의 신복이었던 세겜의 방백 스불은 그의 말에 분노해 이 사실을 알리고 구체적인 전략까지 갖추어 공격을 제안한다. 아비멜렉은 그날 밤 곧바로 공격을 실행에 옮긴다. 결국 가알은 적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방심하고 있다가 뒤늦게 공격에 나서지만 결국 참패하고 쫓겨난다(40절). 아비멜렉은 이렇게 가알의 반란을 진압하지만 포악하고 무자비한 킬러로 변신해 있었다. 22절은 아비멜렉이 ‘왕자’처럼 다스렸다고 보고하는데, 이제 그는 킬러가 되어 선량한 백성들마저 잔인하게 학살하고 마침내 성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소금을 뿌려 저주한다(45절). 그는 처음 마음을 잃어버리고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잔인한 킬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처음 주신 마음을 끝까지 잘 간직하고 지켜낼 수 있는가? 지금 흔들리는 부분은 없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